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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VUCA시대란 무엇인가?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VUCA시대란 무엇인가?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은 현재의 급변하는 시대에서 기업이나 조직이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속적인 변화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VUCA 시대에서는 기업이나 조직이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잃고, 시장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기존의 시장 흐름이나 기업 운영 방식이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아이디어나 전략, 기술 등을 수용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또한, 변화를 대처하는 능력은 기업이나 조직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거나, 시장의 변화에 대응하여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출시할 수 있습니다. VUCA 시대란, 미국 군대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로서, Volatility(불안정성), Uncertainty(불확실성), Complexity(복잡성), Ambiguity(모호성) 의 약자입니다. 이 용어는 현재의 급변하는 현대 사회와 경제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불안정성(Volatility)은 변화가 빠르고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을 의미합니다. 경제ㆍ정치ㆍ사회적 변화 등이 빠르게 발생하며, 기업이나 조직은 이러한 변화에 빠르게 대처해야 합니다. ▲불확실성(Uncertainty)은 미래의 예측이 어렵고 불확실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경제적ㆍ정치적ㆍ기술적 등 다양한 변화 요인이 있어 미래의 방향성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복잡성(Complexity)은 문제가 복잡하고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문 지식과 시각, 그리고 협력과 창의성이 필요합니다. ▲모호성(Ambiguity)은 정보나 상황이 불분명하고 모호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각과 전문 지식, 그리고 의사소통 능력이 필요합니다. VUCA 시대에서는 이러한 변화와 불확실성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과 능력이 필요합니다. 기업이나 조직은 변화에 대처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민첩성과 창의성을 강화해야 합니다. 또한, VUCA 시대에서는 신뢰가 매우 중요합니다. 변화와 불확실성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환경에서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협력이 더욱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는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고, 대화와 협력이 어렵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기업이나 조직에서는 내부적으로도 신뢰가 필요합니다. 직원들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팀워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며, 문제 발생 시 서로 지원하고 협력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고객과의 신뢰도 매우 중요합니다. 고객은 브랜드나 기업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며, 신뢰가 깨지면 브랜드 이미지가 손상되고 고객 유지가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VUCA 시대에서는 기업이나 조직에서는 직원 간, 브랜드와 고객 간에 신뢰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협력과 혁신은 VUCA 시대에서 경쟁우위를 유지하고 성장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현재 스마트폰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인공지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디지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가상융합경제는 메타버스와 같은 디지털 공간에서 일어나는 경제 활동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경제 활동은 게임, 가상현실 체험, 가상의 상품 판매, 가상의 부동산 거래, 가상 화폐 거래 등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 경제 활동은 현실 세계의 경제와 유사한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탄생시킬 수 있습니다. 메타버스와 디지털 가상융합경제는 미래의 새로운 경제적 성장 동력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기존 산업과 새로운 산업 모두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대비하여 기업이나 개인이 디지털 기술과 경제적 지식을 적극적으로 습득하고 활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회가 급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은 걸어가거나 뛰어가고 있는데 나는 가만히 있거나 기어가고 있어서 그렇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생각한 것을 행동해보고 개선해 나아가야겠습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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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서양음악의 토대 실내악의 방향과 미션[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서양음악의 토대 실내악의 방향과 미션 영화 타이타닉과 현악사중주 영화를 문화산업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타이타닉(1997 개봉)의 마지막 장면 중의 하나는 현악사중주의 악사들이었다. 그들의 마지막 음악은 우리 귀에 익숙한 찬송가였고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의 편성이었다. 여전히 클래식음악이 대중적이지 않을 당시였지만 이 영화 하나로 클래식에 대한 이야기가 오렛동안 회자되었다. 이로 인한 효과였을까? 1998년부터 우리나라의 실내악 공연은 서울 중심과 대구, 부산, 광주 등 광역시의 전문 문화예술공연장에 부쩍 증가하였다. 그 즈음 1988년 개관하여 십년 남짓한 예술의전당의 활약은 1978년 개관한 세종문화회관의 광화문에서 서초동 중심으로 전환하는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도 클래식 강국으로 발전한 K-클래식이 그때부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부산과 제주의 실내악축제 지난 1월 부산문화회관(재단법인 이정필 대표이사)에서는 예술감독 김동욱 교수를 중심으로 부산쳄버페스티벌이 7개의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뉴욕 필하모닉, 퍼시픽 심포니, 독일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 BBC 콘서트 오케스트라, 뮌헨 필하모닉 리더들을 비롯해 대학팀까지 출연하였고, 제주출신의 피아니스트 심희정 교수는 코스모폴리탄앙상블과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4번을 협연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김동욱 예술감독은 제주실내악페스티벌에도 참여하는 등 제주와도 인연이 깊다. 실내악 활동은 보통 전국적으로도 연초에 시작한다. 부산실내악은 1월에, 제주실내악은 2월에 진행되고 있으며, 송파에 위치한 롯데콘서트홀에서도 3월에 대규모 국제실내악 축제가 예정되어 있다. 실내악은 일정 공간내에서 진행하고 매우 예민한 작업으로 예술공간의 비수기라고 하는 연초에 개최되면서 클래식음악의 진수를 공감할수 있고, 공연장 입장에서는 극장 가동율 향상 및 활성화에도 보탬이 된다. 한편, 제주문화예술진흥원과 심희정 교수를 중심으로 성료한 2023 제주실내악페스티벌은 올해 6년차가 되면서 프로그램과 출연진 등 전국에 내놓아도 뒤처지지 않았다. 외국인 참여 빈도수는 미흡하지만 제주의 문화를 소재로 만든 제주창작음악과 지역 청년예술가와 라이징스타 프로그램은 오히려 타 지역 실내악 축제를 앞서면서 수범사례로 알려지고 있기도 하다. 아래는 제주도내 언론 리뷰 기사 제주일보 2023년 2월 19일 제주문화예술진흥원(원장 김태관)은 제6회 제주국제실내악페스티벌 기간 동안 5회 공연의 유료관객은 총 1,650명으로 집계됐다고 19일 밝혔다. 김태관 원장은 “관객의 부재는 우리나라 어느 공연에나 해결해야 할 숙제로 늘 고민하고 있다” 며 “그러나 이번 페스티벌의 유료관객은 결코 작은 수치가 아니기에 앞으로도 더욱 수준 높은 무대로 도민 여러분의 관심에 보답하겠다” 고 말했다. 한라일보 2023년 2월 19일 '제주국제실내악페스티벌(JICMF)'은 제주대 음악학부 심희정 교수를 주축으로 도내 음악인들이 지난 2018년부터 이어 온 실내악 전문 음악축제다. 페스티벌조직위원회의 열정으로 이어져 온 축제는 올해 6회 행사를 치르며 제주의 '겨울음악축제'로써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제민일보 2023년 2월 19일 제주문화예술진흥원(원장 김태관)과 제주국제실내악페스티벌 조직위원회(조직위원장 심희정)가 공동 주최한 이번 축제는 지난 8일부터 16일까지 제주문예회관에서 무대를 이어갔다. 김태관 진흥원장은 "이번 축제는 대중과 포퓰리즘에 휩쓸리고 있는 상황에서 순수예술의 고유성과 중요성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고 말했다. 뉴제주일보 2023년 2월 9일 축제는 2018년에 지역 음악인들에 의해 작게 출발했지만 2020년부터는 공적 자금이 안정적으로 투입되기 시작하면서 조직위원회도 생기고, 제주 테마의 창작곡이 위촉되기 시작했다. 전시형 음악회라는 개념도 도내 음악 축제 중 처음 시도됐다. 출연진도 화려해지고 있어 제주에서 주목받는 축제로 성장하고 있다. 특히, 제주 신인 뮤지션들이 무대에 설 기회가 많이 주어지고 있다. 첫날 개막 공연은 ‘제주로의 초대’를 주제로 제주 소재 창작곡 발표와 축제 상주단체, 우리나라 정상급 연주자들의 협업 공연 순으로 실내악의 다채로운 연주 방식이 소개되는 장으로 마련됐다. 순수예술과 예술산업의 과제와 방향 문화예술의 불모지라 하였던 제주에서 지난 수 년간 클래식과 공연예술의 저변확대를 위한 다양한 노력들은 이제야 조금씩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수년전만 하더라도 현악사중주에 갸우뚱하는 도민들이 많았었지만 지금은 피아노트리오, 현악앙상블 등 실내악에 대한 도민의 인식 수준이 매우 높아졌고 특히, 금번 제주실내악페스티벌에서 도민 관객들은 스탠딩 앵콜을 외칠만큼 클래식 수준이 몰라보게 성장하였다. 물론 관객의 부재는 우리나라 어느 공연장에서나 공통의 미션으로 지속적인 숙제이고,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이기에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누군가는 꾸준하게 해야한다. 순수예술이 튼튼해야 그에 관련된 다양한 예술의 기조가 흔들리지 않게 마련이고 이는 우리 다음 세대들을 위한, 우리의 아이들을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 전문가 육성에 앞장서고 있는 대학과, 청년예술가들의 무대를 만들어주고 지원 육성하는 문화예술 현장에서의 콜라보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행정의 뒷받침이 있다면 제주의 문화예술산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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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도대체 왜 이럴까요?'[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오래 전 한 개그코너에서 희극속 개그연기자의 행동에 극본상 해설을 맏고 있는 개그맨이 '도대체 왜 이럴까요?' 라는 말을 남기며 유명세를 타던 기억이 생각납니다. 필자는 오늘 불명확한 행정청의 처분이 발생되는 상황에 대해 위 희극인의 말을 빌어 '도대체 왜 이럴까요?' 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폭넓게 행정청의 재량처분을 인정한다’ 라고 할지라도 일부에서 발생되는 행정청의 처분은 '심각하게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거나, 형평이나 비례원칙을 뚜렷하게 배치됨' 에도 처분이나 행정심리(행정심판)과정에서 오히려 합리성이 결여된 행정청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로서는 ‘합리성 결여, 형평이나 비례원칙 위반’ 이라는 말 자체를 쉽게 이해하지 못 할 수 도 있지만, 행정청의 처분으로 고충에 빠진 일반인들과 상담을 하다보면 일반인들의 생각속에서 행정청의 위반된 행위가 나타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사례에 비추어 설명 드리자면 최근 전라남도 OO군에서 축사 신축을 위해 허가를 요청하였지만, 행정청에서 접수 이후 건축심의위원회 실시 등의 검토기간을 수개월 이상 지연시키다가 종래에는 허가신청 접수 이후의 조례개정 사유로 불허가 처분을 내린 사유로 제가 있는 사무실까지 어렵게 찾아주셨습니다. 확인하여보면 의뢰인이 행정청에 축사 신축과 관련된 허가 신청 접수와 비슷한 시기에 제3자의 허가가 승인된 사항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OO군의 조례 또한 의뢰인의 허가신청 접수 이후인 수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개정이 되어 조례개정 부칙상 이전의 접수 및 허가사항에 대해서는 소급(과거의 기준일자)하여 적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음에도 무리한 적용으로 불허가 처분을 내린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심각한 합리성 결여 및 형평이나 비례원칙’ 을 심각하게 위반하였다고 행정심리를 신청하여 종래에는 OO군 불허가 처분 취소 재결을 받아 의뢰인의 고충을 해결드린 적이 있습니다. 두 번째 사례로 전북 OO군 소재에서 기존 폐기물처리업을 허가 받고 사업을 영위하던 분이 현재의 재활용 대상폐기물이 상당하게 실익이 없어 폐타이어로 변경하는 과정에서 법률적으로도 제한사항이 없음에도 행정청은 '향후 마을 도로사용으로 도로가 파손이 되어 주민의 불편사항을 초래할 수 있다' 라는 법률에 근거하지 않는 불명확한 사유로 변경허가 불허가 처분을 내려 저를 찾아 주신사항에 대해 행정청이 제시한 불허가 사유가 ‘심각한 합리성 결여’ 부분이 상당하여 「폐기물관리법」 주무부처에 의뢰인의 변경허가와 관련사항에 대한 대정부질의와 회신 및 법률에 근거하지 않는 처분사유라는 점을 주장하여 재 결정을 받았던 사항도 있었습니다. 또한, 다른 사건으로 전북 OO시 소재의 한 사업장에 관한 사항으로 행정심리과정 중 일반인의 행위에 대해서 행정청에서 시정조치명령을 하였다고 행정청에 유리한 답변을 하였지만, 사실관계를 확인하여 보니 행정청은 행정처분을 하기 위해서는 「행정절차법」 에 따라 사전처분명령 통지와 상당한 기간을 정해 의견제출을 받고 절차와 원칙에 따라 시정조치 등의 행정처분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절차와 원칙을 무시한 행정처분명령서를 제시한 사실에 대해 관련법령에 위반 행정처분으로 무효됨이 합당하다는 주장을 통하여 처분의 합리성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종래 일반인이 결정에 유리하게 재 결정되었습니다. 상기의 사례들과 비추어 '도대체 왜 그럴까요?' 말밖에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추후 이러한 처분을 내린 행정청 담당자를 찾아가 문의를 하였지만, 아무런 답변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국민에게만 사전약속 강요하기 보다는, 행정청 또한 사전된 약속을 기준하여 판단해야 진정된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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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⑰ 제2차 파리여행7 (어머니의 죽음)[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모자(母子) 파리에 도착 1778년(22살) 3월 23일 월요일 오후 4시경에 모차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파리에 도착했다. 만하임을 출발하여 9일이 소요되었다.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파리를 향해 떠난 지 6개월 만이었다. 아버지 레오폴트의 모차르트에 대한 준비와 계획은 이번에도 부지런히 진행되었다. 자신의 아들 일행이 파리에 도착하기 전에 파리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프리드리히 멜키올 그림 남작(Friedrich Melchior, Baron von Grimm 1723~1807)에게 편지를 보내 두 모자와 만날 수 있도록 미리 부탁했다. 그는 독일 태생으로 25세에 파리로 이주하여 프랑스어 문예 평론가로 언론에 기고 활동을 하며 루이 14세의 외손자인 루이 오클레앙 공작의 비서이자 외교관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멜키올 그림 남작(Friedrich Melchior, Baron von Grimm 1723~1807) 그림 남작과 모차르트의 만남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는 모차르트 가족이 파리를 방문할 때마다 희망과 성공의 기반을 마련해 준 은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1763년, 7살 볼프강 모차르트와 12살 난네를 모차르트 남매가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손에 이끌려 파리에 연주여행을 왔을 때, 그는 잘츠부르크 출신의 이 신동 음악가족을 인터뷰 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빈의 쇤부른 궁에서 프란츠 1세 황제와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의 초대로 이루어진 두 번의 성공적인 연주회를 문화 잡지에 게재하여 파리의 음악계와 귀족 사회에 모차르트의 명성을 휘날려 주었다. 1766년 5월, 3년 동안의 영국과 네덜란드의 연주여행을 마치고 10살과 15살이 되어 잘츠부르크로 가기 위해 파리로 돌아온 두 남매를 다시 만난 그림 남작은 실질적 상담과 도움을 주며 1766년 5월 10일부터 7월 9일까지 여러 연주회를 주선하여 주었다. 특히, 7월 15일자 문학평론 기고에서는 그간의 연주여행에서 모차르트 가족이 이루어낸 모든 영역에서의 놀라운 발전에 대해 언급하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젊은 작곡가의 오페라를 통한 미래의 성공을 예측하고 널리 알렸다. 1778년 3월 24일, 22살의 청년으로 어머니와 함께 찾아온 모차르트를 그림 남작과 부인 루이제 데피네(1726~1783)는 변함없이 따뜻이 맞이했다. 그리고 르 콩세르 스피리튀엘(Le Concert Spirituel)의 지휘자 요제프 르그로(Joseph Legros 1739~1793) 감독을 소개했다. 르그로는 모차르트에게 교향곡(제31번 파리교향곡) 작곡을 의뢰했다. ‘콩세르 스피리튀엘’은 프랑스에서 최초로 열렸던 공공연주회를 말한다. 과거 왕궁이나 교회에서만 열렸던 음악회를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한 것이다. 1725년에 파리에서 시작되었다가 프랑스 대혁명으로 1790년에 중단되었고, 1987년에 재현되었다. 고난의 연속, 파리 생활 그림 남작은 모차르트를 돕기 위해 관리자를 자청하여 조언자와 지도자의 역할을 도맡았다. 그의 인맥으로 파리에 온지 이틀째부터 작곡 요청이 이어졌다. 육군 장군과 외교관을 지낸 플루트 애호가 드기뉴 공작(Duc de Guisnes 1735~1806)은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을 주문했다. 모차르트는 발레곡 “레 프티 리엥”을 비롯한 작곡과 귀족들을 위한 초청연주회도 자주 개최하였다. 베르사이유 궁정의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소개 받기도 했다. 재정적 어려움을 막기 위해 피아노 교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작곡에 대한 사례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 안나 마리아가 남편 레오폴트에게 파리에서, 1778년 4월 5일 ..... 이곳의 삶은 절망적으로 불행해요. 아침부터 밤까지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서 감옥살이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방은 너무나 어둡고 형편없어서 종일 햇볕 한 자락도 쬐기 힘들어요, 창밖으로 보이는 것이라곤 손바닥만 한 안마당 밖에 없고요. 비 오는 날만 빼고는 날씨가 어떤지 전혀 알 수 없어요, 뜨개질이라도 좀 해보려고 하지만 방은 어둡고 손가락은 싸늘해서 그것도 만만치 않아요, 불을 때도 방은 추워요, 집에 피아노가 없으니 볼프강은 아침 일찍 집을 나가서 ‘콩세르 스피리튀엘’ 감독인 르그로 선생 댁에서 작업을 해요, 그러나 나는 온종일 볼프강의 얼굴도 못 봐요, 이렇게 더 지내다가는 말하는 법을 완전히 까먹을 것 같아요, 그만 써야겠어요, 팔도 너무 아프고 눈도 너무 아파서 더 이상 못 쓰겠어요, ..... 모차르트와 어머니는 4월부터 값싼 숙소에서 지내고 있었다.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남편의 답변은 언제나 냉정했다. 비용을 대는 사람은 그였고, 그의 목적은 아들의 훈육과 아들이 독립심을 갖고 자신의 재능에 걸맞은 취업의 달성을 쟁취해내는 것이었다. 아들에 대한 걱정과 당장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더욱 그녀를 위축 시켰다. 자신의 조언에 무관심한 모차르트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육체적 아픔이 시작되었다. 머리와 치아에 통증이 오고 귀도 고통스러웠다. 파리 시내에서 들려오는 개혁에 대한 소문들이 공포로 다가왔다. 잘츠부르크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더욱 간절해졌다. 6월 11일, 그녀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쓰러져 자리에 누웠다. - 모차르트가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1778년 6월 12일 ..... 콩세르 스피리튀엘의 개막 공연을 위한 교향곡을 완성했어요. 리허설에서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그렇게 형편없는 연주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얼마나 삑삑거리고 소리들이 뒤섞이는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에요. 솔직히 끔찍한 지경이었고 리허설을 다시 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은 시간을 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언짢고 분개한 심정으로 속이 상해서 잠자리에 들었어요. 이튿날 나는 아예 그 연주회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그렇지만 저녁에 날씩가 좋아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결국은 참석하기로 결정했어요. 그 대신 연주가 리허설 때처럼 엉망이면 오케스트라 속으로 곧장 걸어가서 악장(콘서트마스터) 라우사이의 바이올린을 낚아챈 다음 내가 직접 지휘를 하리라고 작정을 했죠. ..... 교향곡 제31번 '파리 교향곡 6월 18일, 콩세르 스피리튀엘에서 “파리 교향곡”이 연주되었다. 리허설은 엉망이었지만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새 교향곡에 대한 반응은 대단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마음은 이미 파리를 떠나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파리에 오고 싶지 않았다. 난생처음 아버지와 동행하지 않은 연주여행 길에서 자신의 선택으로 일정을 진행하며 자유를 느꼈고 스스로 자신감을 갖고 만하임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했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억지로 오게 된 파리는 겉모습만 화려했을 뿐 가슴 한 구석은 뻥 뚫려 있었다. 더구나 알로이지아와의 사랑이 유보된 상황은 항상 청년 모차르트의 정신적 안정을 흔들고 있었다. 과거 1763년에 신동으로서 자신이 받았던 열광적인 환호는 이미 식어 있었다. 이제는 신동이 아니라 파리에서 음악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었다. 모차르트의 입장에서 그들은 무례함과 거만함으로 깊은 혐오감을 만들게 했고 매우 부도덕했다. 또한, 프랑스어가 본질적으로 비음악적이며 음악과의 융합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모차르트에 대한 그들의 냉정한 대우는 모차르트의 반감을 높여 나갔다. 파리교향곡의 성공은 환호를 불러일으키는 절묘한 순간을 정확히 맞춰낸 모차르트의 계산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그렇게 믿었다. 어머니의 죽음 연주가 끝나고 콩세르 스피리튀엘에서 집으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고열에 시달리며 누워있는 어머니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곧바로 의사를 데려왔으나 프랑스 의사를 거부하는 바람에 한참동안을 헤매고 다니다가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의사를 간신히 찾아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며칠이 지난 뒤에야 진찰을 받게 되었는데 그녀는 이미 청각을 상실하고 중증 상태로 의식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6월 29일에는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다음날 다른 의사를 불러왔지만 어머니는 고해성사와 종부성사를 마치고 나서는 의식불명의 상태가 되었다. 사흘 후인 7월 3일 밤 10시 20분경 안나 마리아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조용히 운명했다. 안나 마리아는 임종 다음날 파리 레알(Les Halles)에 위치한 생퇴스타슈 성당(Church of St Eustace)묘지에 안장 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모차르트의 슬픈 일생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건강 상태를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죽음을 가족들에게 차마 직접 연락할 수 없었던 그는 평소 잘 알고 지냈던 불린저(Bullinger) 신부께 부탁하여 부음을 알렸다. 레오폴트는 망연자실 했다. 닷새가 지난 7월 9일에야 아버지께 위로의 말을 전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림 남작은 레오폴트에게 모차르트를 잘츠부르크로 불러들여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레오폴트는 어머니를 신속하게 병원으로 모시지 않았음을 안타까워하며 모차르트를 질책했다. 7월 30일 난네를은 27번째 생일을 맞았다. 모차르트는 누나에게 '론도 카프리치오'를 작곡하여 악보를 보냈다. 슬픔에 빠진 모차르트는 넋을 잃고 그림 남작의 집에서 몇 주를 보냈다. 9월 말 모차르트는 초췌한 몰골로 파리를 떠났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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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창업성공, 돈은 벌 수 있을까?[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창업성공, 돈은 벌 수 있을까? 창업을 시작 하면 '나는 돈을 벌 수 있을까?'라는 마음가짐으로 매일매일 새롭게 계획하고 실행하고 도전하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청년창업자들은 활기찬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 배우면서 도전하는 마음으로 시작할 것이고, 시니어 창업자들은 그간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고 또한 시장생태계를 잘 이해하고 있어 자신감을 있게 사업을 시작할 것이다. 창업하여 돈을 버는 방법은 회사를 성장시켜 매년 매출액 대비 당기순이익을 통해 돈을 벌 수가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글로벌 기술 경쟁력있는 기반을 만들어 글로벌 시장으로 나가고자 하는 회사에게 기업을 매각하여 돈을 벌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외부 투자유치를 통해 기업을 성장시키고 기업공개를 통해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매각하여 돈을 벌 수가 있을 것이다. 기술창업의 경우 3단계로 창업성장 로드맵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1단계는 창업을 준비하고 시제품을 만들어 시장반응을 보고 완성된 제품을 만드는 단계이다. ▲창업준비 : 창업아이템을 생각하면서 팀구성 등 수익모델구상. ▲실전창업교육 참여 : 창업교육 및 멘토링을 받으면서 사업계회서 작성. ▲창업지원사업 참여 : 창업진흥원 예비창업패키지, 초기창업패키지 사업을 통해 시제품을 제작하고 시장에 제품을 출시하고 시장에서 반응을 확인 후 제품을 고도화함. ▲기술력강화 : 기술인력채용, 기업부설연구소설립, 벤처기업인증, 산업재산권확보 등을 통해 지속적인 기술력을 확보. 2단계는 마케팅을 통해 매출을 늘리고 창업성장을 위한 기술개발 및 인프라를 갖추는 단계이다. ▲창업자금융자 : 중소기업진흥공단, 기술보증기금, 신용보증기금 등을 통해 운전자금을 확보하여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함. ▲창업성장기술개발 참여 : 중소기업벤처기업부 창업성장기술개발사업 등을 통해 기술을 고도화하고 자사만의 경쟁력 있는 제품을 개발함. ▲마케팅지원사업 : 중소기업마케팅 지원사업 등을 활용하여 홈페이지, 홍보영상, SNS 마케팅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사와 제품을 홍보함. 3단계는 창업도약 단계로 투자유치 및 TIPS 사업 참여를 통해 혁신기업으로 성장하는 단계이다. ▲투자유치: 엑셀러레이터나 벤처키피탈로부터 투자유치를 받아 혼자가 아니라 전략적인 성장을 함께 준비함. ▲창업지원사업 : 창업도약패키지 사업을 통해 신제픔 개발하여 기술경쟁력을 강화함. ▲TIPS 선정 : TIPS (Tech Incubator Program for Startup)는 세계시장을 선도할 기술 아이템을 보유한 창업팀을 집중 육성하는 '민간 투자 주도형 기술창업 지원' 프로그램으로 선정 될 경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토대 구축함. 창업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돈을 어떻게 벌수 있을까를 고민하여 나는 어떤 전략으로 나아갈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글로벌 기술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업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본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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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인ㆍ허가 '지방자치단체의 재량권은 폭넓게 보장되어야 한다'[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최근 인ㆍ허가와 관련된 대법원 판례에서 '지방자치단체의 재량권은 폭넓게 보장되어야 한다' 라는 판결이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현저한 합리성 결여 또는 형평 (평등) 및 비례의 원칙을 위반하면 재량권을 일탈 및 남용된다' 라는 단서 조건을 달았지만, 이 대법원의 판례로 인해 자칫 국민의 적법하고 정당한 인ㆍ허가 관련 청구에도 주민반대 등의 민원이 발생되면 표심을 고려한 지방자치단체장의 판단하에 법적 제한사항이 전혀 없는 청구에도 재량권이라는 명목하에 불허 및 불승인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게 행정법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행정청에서 일정한 선택이나 판단의 권한을 부여하는 재량행위인 재량권은 법률로 규정된 행위요건 즉 법률에서 근거하여 실현될 수 있어야 하며, ‘재량행위가 법률에서 정한 한계 내에서 행사되어야 하고, 이 한계를 넘는 경우 위법한 재량행사가 되어 사법심사의 대상이 된다’ 라고 법률에서 규정되어 있습니다. (행정소송법 제27조) 하지만, 위 대법원 판례로 인해 행위제한이 없는 인ㆍ허가 청구사건에서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장래에 환경 위험이 예상된다 등의 막연한 사유로 불허가가 발생한 사건에서 지방자치단체의 손을 들어주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인ㆍ허가를 신청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게는 수천만 원 크게는 수백억 원이 소요되는 공사에서 마구잡이 식으로 법률의 위반사항 검토 진행하는 것이 아니며, 법으로 정한 테두리에서 자신의 재산권을 보장받기 위해 청구한 사건에서도 ‘님비 (더러운 것은 내 뒷마당에도 싫다)’ 등의 단순 민원으로 종래에는 불허가 및 불승인의 상황이 발생되어 손해발생으로 고통을 겪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지방자치단체의 존속이 '대한민국헌법' 에서 규정되어 있고,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작용이 '행정기본법' 에서 규정되어 있음에도, 실제 지방자치단체는 ‘집단민원발생’ 방지 및 차기 선거를 고려한 지방자치단체장의 인기 유지를 법률에 근거하지 않는 행정작용 즉 처분행위를 정당한 재량권을 포장한 채 시행하는데 그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아무리 주변의 민원이 있더라도 법률적 제한사항이 없으면 민원에 대해 정당하게 법률적 제한사항이 없어 적법한 시행을 한다고 답변을 하면 되고, 동일한 민원이 계속될 경우 '민원 관련 처리 법률' 에 따라 동일하게 처리 할 수 있음에도 현재의 지방자치단체는 법률에 근거하지 않는 행정작용을 난무하게 사용함에 그 원인이 분명하게 있다고 사설을 쓰는 본인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정부 든 국민이든 사전에 약속된 기준 즉 법을 잘 지킴으로써 실현이 가능한 것으로 국민도 규정된 법을 지켜야 하지만,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도 규정된 법을 잘 지킬 경우 '가장 이상적인 복지국가 건설' 은 조속히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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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영화 속 음악가 이야기③ 베토벤 - 영화 ‘불멸의 연인’[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영화 속 음악가 이야기③ 베토벤 - 영화 ‘불멸의 연인’ 영화 ‘불멸의 연인’ (Immortal Beloved, 1994) ‘불멸의 연인’은 베토벤이 1812년 7월 6일~7월 7일에 현재의 체코 북서부에 위치한 온천 도시 테플리체(Teplice)에서 쓴 편지의 수신자를 말하는데, 현재까지 그 수신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본인이 직접 작성한 작은 종이 10장의 이 편지는 당시 그의 친구이자 비서였던 안톤 쉰들러(Anton Felix Schindler, 1795~1864)가 갖고 있다가 쉰들러가 죽은 후 1880년에 베를린 주립도서관에 매각되어 보관되고 있다. 이 영화는 현재까지 연구된 베토벤의 일생과 불멸의 연인에 대한 사실 자료를 근거로, 기발한 추정과 극적 구성을 동원하여 각색한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대본으로 삼고 있다. 1994년에 거장 감독 버나드 로즈(Bernard Rose, 1960~ 영국)에 의해 치밀하고 뛰어난 기법으로 영화화 되어 오랜 세월동안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베토벤 역은 영국의 배우이자 음악가인 게리 올드먼(Gary Leonard Oldman 1958~ 영국)이, 쉰들러 역은 네덜란드의 예룬 크라베(Jeroen Krabbe 1944~ 네덜란드)가 맡았다. 그리고 불멸의 연인으로 묘사되는 조안나 역은 요한나 테어 스테게(Johanna ter Steege 1961~ 네덜란드)가 연기했다. 특히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Sir Georg Solti 1912~1997)경은 영화 ‘불멸의 연인’을 위해 교향곡 제9번 4악장을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와 함께 직접 OST를 녹음하였다. 독신으로 살았던 베토벤 오늘날 우리들에게 ‘음악의 성인’이라 불리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역경 속에서도 음악으로 커다란 업적과 사회적 성공을 이루었지만 자신이 그토록 염원했던 이상적인 사랑의 성공은 이루지 못했다. 많은 여성들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사랑을 찾아 방황도 했고, 항상 마음속에 누군가를 간직한 채 사랑에 빠져 살았지만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명성이 높은 음악가인 그에게 관심과 애정을 보낸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스스로 과도하게 자책한 자신의 신분에 대한 한계와 오히려 상대에게는 높았던 눈, 그리고 일찍부터 시작된 치명적인 귓병이 그를 결혼에 이르지 못하게 한 주요 원인이었던 것으로 베토벤 연구자들은 판단하고 있다. Symphony No.5 in C Major, Op. 67 '운명' 죽음을 앞둔 베토벤이 죽음의 문 앞에서 운명의 사자가 문을 두드리는 듯한 ‘교향곡 5번(운명)’의 역동적 음악과 함께 불멸의 여인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과 자신의 운명에 대한 회한의 독백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1827년 3월 26일 눈보라가 몰아치던 오후3시, 클래식 음악의 역사에서 청각장애로 인한 고통의 삶을 살면서도 의지를 불태우며 혁명적인 영웅의 풍모를 작품에 담아냈고 역경을 이겨낸 후 보편적 시각으로 달관의 작품세계를 깊이 펼쳐나간 그는 57년의 생을 마감하고 조용히 숨을 거둔다. Missa Solemnis in D Major, Op. 123 '장엄 미사곡 Kyrie(키리에)' 사흘 후인 3월 29일, 2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장례식이 거행된다.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자신이 말했던 장엄 미사곡이 흐르는 가운데 운구마차가 출발하고 운구행렬에는 베토벤이 운명하기 일주일 전에 문병을 왔던 슈베르트를 비롯한 많은 음악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Symphony No.6 ‘Pastoral(전원)’ 중 4악장 'Gewitter, Sturm(우뢰와 폭풍)' 격정적인 음악이 흐르고 베토벤은 경찰과 함께 동생 카스파의 집 문을 부수고 잠자는 동생 부부의 침실에 침입해 제수인 조안나를 가리키며 창녀라고 욕하며 두 사람을 모욕하고 행패를 부린다. 이유를 알지 못하는 동생 카스파는 분노하며 형 베토벤을 저주한다. 계속되는 형의 괴롭힘에 카스파는 병을 얻어 살다가 고통 속에 죽는다. Bagatelle No.25 in A minor, WoO 59 'Fur Elise(엘리제를 위하여)' 동생 가스파가 죽은 후에도 베토벤은 조안나를 괴롭히다가 나중에는 재판을 걸어 조안나에게서 양육권을 빼앗아 조카 칼을 데려와 키운다. 모든 사랑과 정성을 다해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만들기 위해 작곡도 중단하고 최선을 다해 조카 칼에게 모든 정성을 다 쏟는다. 커서 군인이 되고자 했던 조카 칼은 큰아버지의 음악공부에 대한 강요와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권총 자살을 시도한다. 서툰 조작법으로 목숨만은 건졌으나 그 일로 베토벤의 곁을 떠난다. Piano Concerto No.5 in Eb Major, Op.73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2악장' 쉰들러는 베토벤의 동생 요한 부부와 함께 유품을 정리하다가 세 통의 편지와 유서를 발견하고 모든 것을 불멸의 연인에게 남기기로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베토벤의 동생 요한과의 상속에 대한 다툼 끝에 쉰들러는 ‘내 음악과 전 재산을 내 불멸의 연인에게 모두 상속하노라’라고 씌어 진 베토벤의 유언장을 보여주며 대리인으로서 반드시 상속을 집행하겠다는 단호한 말을 남기고 불멸의 연인을 찾아 나선다. Piano Sonata No.14, Op.27, No.2 ‘Moonlight(피아노 소나타 월광)’ 쉰들러가 첫 번째로 추정한 불멸의 연인은 줄리아 백작부인이었다. 월광 소나타가 그녀에게 헌정된 곡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년 전 베토벤의 제자였던 17세의 줄리아는 베토벤의 청혼을 받았으나 아버지가 반대하자 베토벤의 천재성을 보여주기 위해 집으로 초대했고, 청각에 문제가 있는 것이 밝혀져 자존심을 상한 베토벤이 화를 내고 떠났기에 결국 줄리아 백작부인과 결별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Piano Concerto No.5 'Emperor(황제)' 쉰들러는 두 번째로 추정되는 베토벤의 연인인 에르도디 백작부인을 찾아간다. 그녀는 한 때 자신의 성에 베토벤의 거처를 마련하기도 했다. 피아노 소나타 ‘황제‘ 1악장을 연주하는 베토벤의 모습에 온 마음을 빼앗긴 그녀는 청력을 잃어가는 베토벤을 도와주며 사랑에 빠진다. 유럽 전역이 나폴레옹의 공격으로 전쟁터가 되고 급기야 비엔나도 폭격으로 인해 도시가 무너져가는 중에 에르도디 백작부인의 어린 아들은 포탄에 목숨을 잃는다. 시민혁명을 기대했던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려는 야욕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베토벤은 그에게 헌정하려던 ’황제‘ 악보에 적은 ’보나파르트‘라는 이름을 분노에 떨며 지워버린다. Piano Trio No.4 In D Major, Op,70 No.1 'Ghost(유령)' 베토벤은 아들을 잃고 낙담한 그녀에게 피아노 트리오 5번 ‘유령’을 헌정하며 음악 안에서 죽은 아들과 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위로한다. 그녀는 행복했던 그때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에르도디 백작부인도 불멸의 연인은 아니었다. 백작부인은 자신은 베토벤을 사랑했지만 베토벤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쉰들러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은 바로 제수인 조안나였다는 것을 알려 준다. 쉰들러는 도저히 믿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조안나를 찾아간다. Violin Sonata In A Major, Op.47 'Kreutzer(크로이쳐)' 쉰들러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다. 언젠가 베토벤이 빗속에 마차가 수렁에 빠져 호텔에서 만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와 고뇌 속에 작곡했던 곡이 바로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처’였다. 그날 베토벤을 만나러 왔다가 홀로 돌아간 여인이 적었다는 숙박계를 확보한 쉰들러에게 흐르는 음악 속에서 불멸의 연인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한다. 베토벤과 조안나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베토벤의 아이를 임신했었다. 운명의 그날, 마차 사고로 늦게 도착한다는 편지를 인편으로 보냈으나 베토벤이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자 미처 편지를 보지 못한 그녀는 자신이 버림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떠나버렸다. 그후 조안나는 베토벤에 대한 배신감과 오해를 품은 채 자신을 쫓아다닌 동생 카스파와 결혼했던 것이었다. Symphony No.9 in D Minor, Op. '환희의 송가' (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앞에 선 베토벤, 교향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학대 받던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던 그때를 회상한다. 어린 베토벤이 산속에서 개울물 속에 누워 하늘의 무수한 별을 바라본다. 음악이 끝나고 환호하는 객석의 박수소리를 듣지 못하는 베토벤을 지휘자가 관객을 향해 돌려 세운다) '브라보!', '브라보!', (객석을 향해 인사하는 베토벤, 객석에서 박수치며 미소 짓는 조안나) 조안나는 쉰들러에게 말했다. “한 때 그를 사랑했지만 그가 날 버렸어요. 전혀 소식도 없었고 그에게 난 아무것도 아니었죠 ... 건강이 악화되어 베토벤의 시대는 끝났다고 하는 소문이 나고 제9번 교향곡 초연이 있다는 걸 들었어요. 그가 오랫동안 증오했고 날 파멸시키려 했지만 난 연주회에 가고 말았어요. 마지막 기회였으니까요 ... ‘환희의 송가’ 때문에 난 그를 용서했어요. 도저히 그런 음악을 작곡할 수 있는 사람을 미워할 수 없더군요. 그 후로 그의 집에서 한 번 더 만났어요. 바로 죽기 직전에요.” 쉰들러는 조안나에게 필적을 보여 달라고 부탁하여 호텔 숙박계 서명과 대조해 보고는 일치하자 한숨을 쉰다. “베토벤 부인, 이 편지는 당신이 받아야 할 것 같군요” - 나의 천사이자 전부이며 나의 분신이여 그대에게 잠시 내 마음을 전하려하오 내일이 되야 머물 곳을 알게 될 것 같구려 그동안 부질없이 방황했던 시간들... 왜 이리 아픈지... 다시 합칠 수만 있다면 이 고통 없으련만 내가 있는 곳에 그대도 있어주오 이제 우리 같이 참다운 인생을 사는 거요- (불멸의 연인에게 쓴 베토벤의 편지를 전해 주고 밖으로 나온 쉰들러가 눈물 지으며 이층을 쳐다본다, 이층의 조안나가 클로즈업 되며 편지를 읽고 나서 통곡하는 모습을 비춘다.) 불멸의 연인은 누구인가? 불멸의 연인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계속 거론되고 있는 사람으로는 테레제 브룬스비크(Therese von Brunswick 1775~1861), 요제피네 브룬스비크(Josepjhine von Brunswick 1779~1821), 안나 마리아 에르되디(Anna maria von Erdody 1779~1837), 줄리아 귀차르디(Julie Guicciardi 1782~1856), 테레제 말파티(Therese Malfatti 1792~1851) 등이 있다. 그 중 현재 가장 유력한 불멸의 연인은 안토니 브렌타노(Antonie Brentano 1780~1869)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자선가, 미술품 수집가, 예술인 후원자였다. 베토벤과는 매우 절친한 친구였다. 미술가의 딸로 남편과 함께 빈으로 이사를 오면서 베토벤과 알게 되었고 그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다. 확실한 결과는 아직 없지만 언젠가는 밝혀질 수도 있는 ‘불멸의 연인’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절대로 사라질 수 없는 관심사인 것은 틀림이 없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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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나는 창업준비가 되어 있는가?[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나는 창업준비가 되어 있는가? 창업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지표 중 하나가 회복탄력성이다. 회복탄력성은 사전적 의미는 어떤 물질이나 사물이 원래 모양대로 돌아가는 힘을 뜻하며, 창업쪽에서는 실패하더라도 역경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를 강화하려면 의식적으로 글쓰기 연습을 하거나 아이디어나 관점을 표현하는 연습을 통해 능력을 배양할 수 있다. 글쓰기는 소통하려는 상대방의 수준을 최대한 고려하는 연습을 하기 위함이고 이를 통해 적절한 메시지도 선별하고 다듬는 논리성도 증진할 수 있다. 글쓰기는 말보다는 좀 더 자기조절능력을 통제하며 사용해야 하기에 좋은 훈련방법이 될 수 있다. 기술창업자들은 좋은 팀을 구성해야 하고, 창업네트워크도 확장해야 하기에 커뮤니케이션, 리더십 능력이 요구 되어 지고 있다. 창업자의 현재 창업준비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자가진단점검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희망하는 창업업종과 관련된 업무나 유사한 업무를 해 본 경험이 있다. ▲총투자금액의 최소 70%는 본인 자금이다. ▲최소 3개월 간 운영할 수 있는 초기 운영자금은 미리 준비되어 있다. ▲희망하는 창업업종과 부합하는 기술이나 서비스역량을 갖추고 있다. ▲가족, 친지 또는 친구들은 창업을 하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편이다. ▲매출 거래처는 이미 확보되어 있다. 또는 창업 후 손익분기점 매출은 1년 이내 도래한다. ▲창업업종 분야에서의 인맥 형성은 어느 정도 구성되어 있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매출전략은 수립되어 있다. ▲하루에 6시간 이상 집중하여 도전적인 사업에 몰입할 수 있으며, 사업의지가 충만하다. ▲투자금 상환을 위한 EXIT방안과 사업철수 대비책을 미리 세워 두었다. 자기진단 평가방법은 '매우부정(1)-보통(3)-매우긍정(5)'로 하여 설문하고 10가지 문항 중 총점이 35점이상이 되어야 창업의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30점이하라면 아직은 창업준비가 미흡하다고 볼 수 있다. 창업은 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실현해 나가는 것으로 어려움을 닥쳐도 극복할 수 의지가 있어야 한다. 무엇가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결심과 함께 기존환경과는 다른 환경을 조성하고, 다른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주어신 시간도 기존과는 다르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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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도로분쟁에 대한 책임 두번째 시간[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지난번 시간에 도로분쟁이 발생하는 원인으로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이 문제가 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전문가 컬럼을 보는 지방자치단체의 관련자들은 ‘무슨 근거 없는 말이냐?’라고 반박을 할 수 도 있겠지만, 도로분쟁이 발생된 원인을 파악하여 보면 대부분의 도로, 하수도 등의 기반시설을 지방자치단체가 신설 및 정비하면서 관례에 따라 처리함으로써 도로분쟁 등의 주민 갈등을 발생시키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최근 ㅇㅇ시 ㅇㅇ면에서 발생된 사례를 보면 마을 외곽을 통과하여 간선 도로를 신설하는 지방자치단체 정비 사업에서 수십 년간을 마을 진입로로 사용하였던 여러 소유자의 도로 지목의 토지를 정비 사업에서 제외하여 기반시설을 설치함으로써 종래에는 마을 진입로를 막는 분쟁을 발생시킨 적이 있습니다. 기반시설 설치에 있어서 공익사업을 지정받고 시행함에 있어서 추후, 도로 분쟁 등의 주민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문제소지가 분명하게 있었음에도 자신들은 ‘조례에서 제외할 수 있다’라는 예외 사유만 들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와 회피의 정당성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원인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기반시설 설치에 사업 시공을 한 시공사는 마을 진입로도 정비 사업에 포함시켜서 진행함을 계획하였지만, 기존 계획보다 확대된 구간을 시공하기 위해서는 계획된 예산이 한정되어 있고, 할증가치를 미고려한 공사예산으로 인해 차후 발생된 분쟁소지는 무시한 채 기반시설을 설치한 것으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해당 부분에 대해서 좀 더 면밀한 검토를 하였더라면 도로분쟁 등의 주민갈등이 발생되지 않았음에도 이를 간과한 사실은 지방자치단체가 공공복리에 대한 해석이 일방적으로 편의만을 강조하여 진행시킴으로써 문제를 발생시켰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지방자치단체는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 (약칭 : 토지보상법)에 따라 공익사업을 추진할 수 있으며, '토지보상법'에 따라 공익사업으로 지정된 사업은 법의 힘을 빌려 강제적으로 타인의 토지 등을 취득하거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토지보상법' 제4조에서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설치하는 청사ㆍ공장ㆍ연구소, 통로, 교량, 하천 등의 사업 등이 공익사업으로 지정될 수 있음을 규정하고 있으며, 공익사업을 지정받는 경우 ‘토지보상’ 절차에 따라서 강제수용을 통하여 공익사업을 원만하게 실현 시킬 수 있음에도 이러한 절차 진행이 귀찮고 힘들다는 사유로 사업추진에 편의성만을 생각하여 정비사업 등의 도시군계획사업을 추진함으로써 결론적으로 주민갈등을 부추기는 소극행정을 실현시키고 있습니다. 만약, 지방자치단체의 관계자나 담당 시ㆍ군ㆍ구 의원들이 이 글을 보신다면 향후에 추진되는 정비 사업이라도 힘듦과 고난은 있겠지만, 철저한 준비와 계획으로 국민 및 주민복지를 실현시켜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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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 ⑯ 제2차 파리여행6 (만하임을 떠나 파리로)[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집필한 '바이올린 연주법(1756년 7월 발간)' 모차르트가 태어난 1756년 당시의 레오폴트는 비록 궁정에 예속된 신분의 연주자이자 작곡자였지만 바이올린 교수법에 관한 책을 쓰고 음악가들을 가르치는 전문 교육자이기도 하였다. 그가 쓴 '바이올린 연주법'에는 활에 대한 사용법과 연주 자세를 포함한 바이올린의 연주법에만 국한되지 않고 스타일이나 성향 그리고 모든 음악과 관련된 미학 연구에 이르기까지 음악의 여러 정보가 수록되어 있었다. 이 연주법 책은 오늘날 18세기의 음악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문헌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1756년 7월에 출판된 초판은 1764년에 매진될 때까지 레오폴트를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1766년에는 네덜란드어 번역본이 출판되었고 1770년에는 프랑스어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현재도 '바이올린 연주법'은 계속 출판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되고 있다.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모차르트 연구자인 알프레드 아인슈타인(Alfred Einstein, 1880~1952)의 지적대로 레오폴트는 천재아들이 없더라도 '바이올린 연주법'의 저자로서 음악사에 당당하게 존재하는 인물이며 교육자이자 작곡자로서 업적을 남긴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분노 모차르트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낸 아버지 레오폴트의 절망과 분노에는 다양한 심리적 양태가 엮여 있었다. 레오폴트에게 모차르트는 아들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일찍이 천재성을 발견하여 가르친 제자이기도 했다. 아들의 재능을 발견한 그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중단하고 어려운 결단과 계획을 세웠다. 생계를 위해 잘츠부르크 궁정음악가를 포기할 수는 없었고 눈총을 받으면서도 모차르트의 연주여행을 위해 자주 휴가를 얻어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6살인 모차르트와 10살 된 딸을 데리고 뮌헨과 빈을 다녀오는 모험을 감행했다. 두 번의 여행까지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다.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음악적 재능의 성공은 자신의 사업적 노력이 있어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나이가 들면 그의 뛰어난 능력도 유럽 귀족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좋은 조건의 대궁정에서 자리를 얻어야만 했었다. 그것이 어려움 속에서 자신이 잘츠부르크를 떠나지 못하더라도 아내와 아들만이라도 출발시킬 수밖에 없었던 파리 여행의 목적이었다. 1778년 2월 4일에 쓴 아버지의 편지는 그래서 더욱 애절하고 단호했으며, 분노와 절망감이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청년으로 성장한 모차르트가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사랑에 눈뜨는 일은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었다. 스스로 옳다고 판단한 결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랑하는 사람의 평화로운 가정에 보탬이 되도록 알로이지아의 음악적 성공을 도와주고 싶은 젊은 청년 모차르트의 생각도 또한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 공교육과 또래들과의 집단적 성장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모차르트로서는 이러한 행동들이 오히려 다행스럽고 긍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재아들의 안정적 자리를 구하는 일에 조급했던 아버지 레오폴트에게는 이를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모차르트의 가정교육 초기에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던 모차르트 전가족의 연주여행은 사회학적 시각에서 볼 때 매우 특이한 상황이었다. 고향 잘츠부르크에서의 단순하고 협소한 생활환경은 연주여행을 통해 단숨에 상층사회로 이동하였다. 1762년 1월 잘츠부르크를 출발한 모차르트 가족은 바이에른의 선제후(選帝侯)인 막시밀리안 3세(1727~1777) 앞에서 연주하였고, 10월에는 빈의 쇤부른 궁에서 황제 프란츠1세와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 부부 앞에서 두 차례 연주하며 세상의 이목을 집중 시켰다. 딸에게 가르치던 피아노(당시는 하프시코드)를 모차르트가 세 살 때부터 함께 가르친 레오폴트는 아들 모차르트가 어머니와 함께 파리 연주여행을 시작하기까지 20년 동안 한시도 아들과 떨어진 적이 없이 함께 살며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하였다. 모차르트는 학교도 다니지 않고 항상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그의 보호와 감독아래 모든 사회적 교육과 음악적 훈련 그리고 교양과 언어까지도 아버지의 지도와 도움으로 학습하였다. 교사로서의 아버지는 아들의 음악적 실수를 매번 단호하게 고쳐 나갔다. 전문가로서의 아버지는 아들의 능력이 완벽과 최상을 이루도록 집요하게 요구했다. 이러한 훈련으로 모차르트는 뛰어난 재능을 최고의 기량으로 높여가는 음악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음악적 업적은 그의 인생에 적지 않은 대가를 동반했다. 동시대의 사람들에 의해 특이하고 별난 성격이라는 지적을 받게 된 이면에는 이러한 교육의 결과가 원인이 되기도 했다. 레오폴트는 아들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지탱해 나갔다. 또한 본인이 이루지 못한 사회적 신분의 상승도 아들을 통해 구할 수 있으리라 일말이나마 희망했다고 볼 수 있다. 모차르트를 통해 가족과 자신에게 도래한 기회를 알아차린 레오폴트는 모든 삶의 방향을 멈추거나 수정하고 애초의 1차 유럽 연주여행을 출발했던 것이다. 모차르트의 선택 아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받아들이고 반성하였다. 그는 항상 솔직하고 느낌을 그대로 표현했다. “아빠가 저에게 틀렸다는 근거를 제시하면서 저를 설득한다면 저는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만하임을 떠나기로 다짐한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 아버지에게 만하임에서, 1778년 3월 7일 ........... 아버지는 정말 무슨 일에나 정확하십니다. 하느님 바로 다음이 아빠입니다(이탈리아어로는 교황을 가리켜 파파라고 한다. 그것과 아버지를 아울러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건 제가 아이였을 무렵 제 모토, 그러니까 공리(公理)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공부를 하면, 한 만큼은 할 수 있다”고 말하시는 건 당연합니다. 아무튼 매우 애써주셨다는 것과 몇 번씩이나 오고 가셨다는 건 제쳐놓고, 후회하실 일은 전혀 없습니다. 사실 베버 양(알로이지아)은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저는 그저 아버지께서, 제가 최근 말씀드린 저의 새로운 아리아를 그 사람이 부르는 걸 들어주셨으면 했을 뿐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 노래가 그 사람에게 딱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아버지처럼, 포르타멘토로 노래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즐길 수 있을 겁니다. ........... 그런데 실토합니다만, 지난 편지에서, 아버지가 ‘후줄근한 차림새로 돌아다녀야 한다’고 쓰신 부분을 읽었을 때, 저는 매우 놀랐고, 눈물이 나왔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빠! 그건 분명 제 탓이 아닙니다. 그 점은 알고 계시지요. 우리는 여기서, 가능한 한 절약하고 있습니다. 식사와 방, 장작과 조명이 이곳에서는 무료입니다. 원하는 건 그것뿐입니다. 의복에 관해서는, 물론 아시는 바와 같이 타향에서는 허름한 복장으로 나돌아 다닐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다소간은 차림새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저는 파리 행에 모든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독일의 왕후는 모두 구두쇠니까요. 저는 열심히 일해서, 한시바삐 아버지를 현재의 슬픈 상황에서 빠져나오시도록 하는 일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한편, 저희 여행에 관한 일인데, 내주 오늘 그러니까 14일에 이곳을 떠납니다. 마차를 파는 일은 좀처럼 쉽게 해결되지 않네요. 파리로 떠나기 전에 알로이지아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던 모차르트는 베버의 집을 방문했다. 서가에서 책을 살피다가 당시 유럽 전역에 관심과 인기를 끌던 '돈 후안'이라는 희곡을 보게 되었다. 이 희곡은 나중에 오페라 '돈 조반니'로 재탄생 하였다. 만하임을 떠날 때 모차르트는 알로이지아로 부터 추억의 상징으로 장식이 달린 장갑을 받았다. 아버지 프리돌린 베버는 독일어로 번역된 몰리에르의 희곡을 선물했다. 모차르트와 베버의 가족들은 눈물로 이별을 아쉬워했다. - 아버지에게 만하임에서, 1778년 3월 11일 3월 5일자 마지막 편지, 잘 받아봤습니다. 그 편지에서, 우리의 친절하고 최고인 친구 그림 남작이 파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이번 토요일, 14일에 반드시 이곳을 떠납니다. …… 지금 막, 고용 마부하고 계약했습니다. 그 마부는 11루이도르로, 우리를 우리 마차(모차르트 모자가 잘츠부르크에서 만하임까지 타고 온 마차)로 파리에 데려다줍니다. 마차는 그 마부가 우리에게서 40플로린에 사줬습니다. …… 모차르트는 파리로 가지만 건강이 나빠진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잘츠부르크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몇 곡의 작곡으로 여비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러나 수입이 예상보다 적어서 어머니의 귀국비용이 마련되지 않았다. 모자는 일단 함께 파리로 간 다음 거기서 마차를 팔아 비용을 충당하기로 하고 마부와 소유권 이전을 계약했다. 1778년 3월14일 모차르트와 어머니는 만하임을 출발하여 메츠와 클레르몽을 거쳐 9일 후에 파리에 도착했다.<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