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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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공연예술 트렌드: 이머시브 공연 다양성 & 독창성[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공연예술의 다양성 지난 6월부터 7월 초순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을 시작으로 경기아트센터와 제주아트센터에서 '디 오브젝트'라는 제목의 공연이 개최되었다. 한문연 ‘2021 방방곡곡 문화공감사업 공연콘텐츠 공동제작 배급프로그램 공모사업’에 선정작품으로 경기ㆍ대구ㆍ제주를 대표하는 문예회관 3개가 공동제작하고 자체 배급하는 방식이다. 이는 이머시브 실감공연이라는 흔치 않은 매우 창조적인 공연예술 양식으로의 현대무용과 미술, 디지털영상기술과 음악이 융합된 공연이었다. ‘이머시브’(immersive)라는 단어는 (액체에) 빠지다, 몰두하다라는 뜻을 가진 영단어 ‘immerse’에서 유래하듯이 이머시브 공연은 관객이 단순히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와 함께 주체가 되어 작품에 직접적으로 몰두하게 만드는 형식의 극을 총칭하는 것이다. 관객의 몰입을 위하여 연출가들은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물기도 하고, 관객의 참여로 작품의 스토리를 바꾸기도 하고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머시브 공연은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관객참여형 공연’과, 기존의 프로시니움 형태의 무대로부터 탈피하는 ‘장소-특정적 공연’ 등 다양하게 운영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 이머시브 공연 세계의 공연예술계에서 이머시브공연의 흐름을 보면, 1970년대 이후에 출연한 포스트 모더니즘적 경향과 관련이 있다. 포스트모 더니즘은 세계 2차대전 이후 정치, 예술, 사회 분야에서 근대의 이성주의와 모더니즘에 반발하여 권위의 해체를 요구하는 전체적인 흐름으로 포스트 모던 사회에서 개인들은 기존의 구조와 보편성을 거부하고 특수성과 다름을 강조한다. 공연예술 분야 또한 모더니즘 시대의 사실주의와 실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프로시니엄 극장과 극의 서사를 거부하고, 관객과 무대 사이의 경계를 해체하고 극의 내용보다는 형식에 집중하는 흐름이 생기게 되었다. 이후 2000년대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발달한 이머시브 공연은 상업극은 물론 뮤지컬 장르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대표적으로 '슬립 노모어' 는 뉴욕에서 장기공연을 이어가고 있으며, 브로드웨이에서 주목 받는 뮤지컬 '나타샤와 피에르, 그리고 1812년 혜성' 등이 있다. 특히, 영국에서 만들어진 '위대한 캐츠비'는 영국의 이머시브 공연 중에서 최장기간 공연되고 있는 작품으로 객석과 무대의 구분 없이 스탠딩 형태로 배우들과 관객들이 섞여 진행하여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극에서 관객들은 캐츠비가 초대한 파티의 손님이 되어 배우들과 함께 칵테일도 마시고 춤도 추며 파티를 실제로 즐기면서 공연은 진행된다. 문화정책의 방향: 다양성 & 독창성 경기와 대구, 제주아트센터에서 개최한 '디 오브젝트' 공연은 제주의 공연예술 60년 역사에 최초의 포스트모던 이머시브 공연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물론 코로나로 인해 무대 위에서 관객과 출연자가 함께 하지는 못하였지만 현대무용, 미술과 디지털 영상기술, 실제 음악밴드가 융ㆍ복합된 공연을 접해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부여가 충분하다. 국가의 문화정책이 팔길이 원칙을 바탕으로 예술가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공연 장르의 다양성을 조건없이 지원하며, 장르간 융ㆍ복합하는 창의적인 문화예술 활동이 이루어질 때 비로서 제대로운 문화정책의 실현이 가능하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지역 간 네트워크를 통해 보다 다양하고 독창적인 예술작품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고대한다. 그 시작은 오브젝트를 기획 구상한 유재헌 감독과 김성용 감독의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예술적 감성과 천부적인 탤런트, 작품에 대한 열정. 바로 그 것이기에 예술가에 대한 신뢰와 존중은 절대적이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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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리더 스피치 Ⅰ : 진정한 리더의 말! 말! 말![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대표가 리더인가? 리더가 대표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리더’ 하면 기업의 대표를 떠올린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눈으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리더’의 개념을 짚어보자. 리더는 어느 분야든 지휘하고 통솔하는 자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휘자, 통솔자는 어떤 모습을 갖춰야 할까? 크게 아래 3대 요소를 갖춰야 한다. 첫째, 리더는 ‘상식’이다. 이 시대 비상식적인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어쩌면 비상식이 아닌 상식 이하의 일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상식의 기준은 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흔히 얘기하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을 이야기 하고 싶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그러한 마음 말이다. 말도 마찬가지이다. ‘리더의 말’이라고 해서 특별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인간이라면 느끼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그것이 진정한 ‘리더의 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리더의 말은 뭔가 독특하고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일을 그르치고 만다. 예를 들어 리더는 고품격의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며 외래어나 한자어를 남용하는 경우이다. 국격을 높이고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리 것부터 챙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들온말을 마치 고급 언어인 냥 마구 쓴다. 때때로 의문도 생긴다. 과연 그 뜻은 제대로 알고 있는지 말이다. 둘째, 리더는 ‘건강’이다. 육체적인 건강은 물론이고 정신과 마음의 건강까지 챙겨야 한다. 일단 몸이 무너지면 만사가 힘들고 귀찮아진다. 게다가 정신도 함께 무너진다. 그래서 우리는 ‘건강이 최고다’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진리이다. 또한 건강한 말은 건강한 몸과 건강한 정신에서 나온다.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좋은 말, 올바른 말이 나올 리 없다. 셋째, 리더는 ‘어머니’이다.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존재한다. 보통의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을 보면 실로 위대하다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얼마나 희생하고 양보하고 자신을 버리는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은 끝이 없는 바다와 같다. 그리고 그 희생을 보면 참으로 숭고하고 고개가 숙여진다. 어미를 통하지 않은 새끼는 없다. 동물도 자기 새끼는 필요한 시기만큼은 돌본다, 본능인 것이다, 리더 역시 작게는 ‘나의 조직’에서부터 크게는 ‘시대를 이끄는 존재’인 만큼 희생과 봉사정신 그리고 배려심이 없이는 안 된다. 리더의 말도 그러하다. 양보하지 않고 얻으려고만 하는 내용의 말은 그를 외면하게 만들 것이다. 희생하듯, 양보하듯 버리고 줄여라. 말의 수효 즉, 말수를 말이다. 넘치면 오히려 독이 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리더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일선에서 최선을 다한다. 또한 리더를 바라고 동경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으로 스스로 리더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리더는 ‘내가 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이 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끌어 가는 길이 순탄하고 매끄러워서 모두가 행복한 길이 될 것이다. 당신은 지금 어떤 리더의 길을 가고 있는가?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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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다시 찾은 캄보디아 북부 태국-캄보디아 국경 마을 ‘오롬돌’[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필자는 지난 6월 21일 캄보디아 북부에 있는 바탐방 주, 프놈쁘럭 군, 오롬돌 태국-캄보디아 국경마을에 다녀온 적이 있다. 한국의 (사)내부장애인협회에서 코로나19로 고통 받고 있는 캄보디아의 방역 취약 지역 주민들에게 KF-94 마스크를 지원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지난 5월부터 준비하여 이 날 KF-94 마스크를 마을 주민들에게 전달하였다.-한국복지신문 6월 21일 자 화보 기사 참조】 ‘오롬돌’ 국경 마을은 수도 ‘프놈펜’에서 북쪽으로 약 536km 떨어진 태국-캄보디아 국경에 있다. 마을 한 쪽이 태국과 작은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이루고 있다. 수도 프놈펜에서 이곳을 가려면 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승용차로 약 8시간에서 9시간이 소요된다. 북부 지역에 있는 여러 개의 태국-캄보디아 국경 검문소 중 하나인 ‘오롬돌’ 국경 검문소는 일반 국경 검문소와 달리 화물 수송을 위한 국경 검문소로써 활발한 국경 무역의 전초기지다. 그러나 지금은 생필품 위주의 물품 이동만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으며 보통 때는 굳게 닫혀 있다. 코로나 펜더믹 이전에는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국경을 통해 태국으로 건너가 국경 인근에 있는 태국 농장이나 내수면 양어장 등에서 주로 단순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갔다. 그런데 태국의 현 코로나 상황이 동남아 국가 중 심각한 수준에 있으며 연일 수 천 명대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 거기에 더해 변이 바이러스까지 창궐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이런 위험한 상태를 피해 많은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귀국하면서 태국발 변이 바이러스가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지난 7월 19일 현재 델타 바이러스가 79건이 보고되었고 급기야 캄보디아 정부는 국경을 지키는 군대를 동원해 자국민 귀국 상황을 관리하고 있다. 말이 관리지 통제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롬돌’마을도 태국발 변이 바이러스 유입을 피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지금은 위험한 상황을 넘기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긴장하는 모습이 느껴졌다. 필자가 이 마을을 다시 찾은 지난 7월 9일, 낮선 이방인의 모습에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던 주민들이 많았는데 다행히 나를 아는 주민들의 인사 덕분에 분위기는 나아졌지만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최대한 빨리 마을을 빠져 나왔다. 마을 어귀에 자리한 시장은 썰렁함을 넘어 적막한 분위기였고 누가 뭐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코로나로 인한 주민들의 삶이 피폐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캄보디아는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와 고통스러운 전쟁을 치루고 있다. 2020년 3월부터 락다운, 휴교령, 주와 주 이동 차단, 야간 통행금지, 음식점 주류 영업 제한 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호전되지 않고 있다. 7월 20일 현재 825 명의 확진자가 발생하였으며 이와 비슷한 수준의 확진자가 매일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가끔은 1000명 이상의 확진자도 나오고 있다. 거기에 더해 태국발 변이 바이러스까지 유입되고 있어 WHO(세계보건기구)에서는 국가 의료 시스템 붕괴 위기를 경고하였으며 이미 레드라인 수준으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확진자 규모는 인구 1600만 명의 캄보디아 규모로는 엄청난 숫자이며 열악한 의료 수준에도 감당하기 벅찬 규모이다. 친중 국가인 캄보디아는 백신 접종을 거의 중국산 백신에 의존하고 있다. 효능이 약해 ‘물백신’이라고 불리는 중국산 ‘시노팜’과 ‘시노백’으로 연일 백신 접종 총력전에 나서고 있다. 보건 관련 종사자가 부족하여 군대까지 동원하였으니 말 그대로 전쟁을 치르는 것과 다름없다. 7월 16일 현재 캄보디아의 백신 접종자는 총 5,417,348명(2차 접종 완료자 4,036,510명)으로 목표 접종자 1천만 명 대비 54.17% 접종을 마쳤으니 나름 백신 접종에 성과를 거둔 듯하다. 캄보디아 정부는 캄보디아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외국인에게 중국산 백신 접종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으며 한국인 교민들도 지난 6월부터 수도 프놈펜에서 접종을 시작하여 지금은 시엠립 주에서 백신을 맞고 있다. 이미 많은 교민들은 진즉에 한국으로 귀국하였으며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남은 교민들은 불안감에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중국산 물백신이라도 맞게 되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백신 접종 현장은 여느 시장 풍경 같은 붐비는 모습이 한 눈에 봐도 염려스러울 정도로 개인 간 거리두기 같은 방역 수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어 또 다른 확산세로 작용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코로나 펜더믹의 끝이 언젠가는 오리라고 믿는 희망이 있기에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방역 물품을 지원해 주신 (사)내부장애인협회에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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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불법건축물 이해와 양성화 방안[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가끔 여행이나 출장을 가다보면 심신산골이나 농로 한가운데 주택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반인들이라면 ‘쾌적하게 살 수 있겠다.’라는 생각만 하겠지만, 행정법률을 서비스하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여기서도 ‘직업병’을 버리지 못하고 ‘이런 곳도 건축허가가 나올 수 있나?’라는 의문을 가진다. 살펴보면 현재 적용 중인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 또는 건축법 상에서는 허가가 상당히 제한되지만, 과거 6.25 전쟁을 치른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난개발과 무허가 건축을 눈 감아 줄 수 밖에 없는 실정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볼 때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일이지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6. 25 전쟁으로 경제 및 사회적으로 상당하게 피해를 보았다. 만3년 이상(1945.08.15. ~ 1953.07.27.)의 전쟁으로 전 국토의 70% 이상이 폐허가 되었으며, 특히 일반서민이 주거하고 있는 주택의 손실율이 당시 서울시를 기준으로 90% 이상이었다는 것이 연구 및 학술자료에 의해서 발표되었다. 전후 이후 피난민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인구 또한 증가 됨에 따라 거주할 수 있는 건물이 필요되었으나, 당시 ‘이승만 정부’에서는 강력히 단속하여 난개발을 막느냐?, 서민의 잠자리를 만들어 주냐?의 양자택일의 상태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후 수많은 난 개발과 1970년대 ~ 1980년대의 산업화ㆍ도시화 시대를 거치면서 법률기준상의 무허가 건축물을 발생되어 이 사항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음이 현실이며, 이에 1989년 '공공용지의 취득 및 손실보상에 관한 특례법 시행규칙' 시행으로 인해 1989년 1월 25일 이전에 건축된 건축물은 무허가 건축물이 아닌 것으로 특정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은 무허가 건축물이 포함된 불법건축물의 양성화 방안에서 설명하겠다. 불법건축물이란 실질적 불법과 형식적 불법 요건을 충족하는 건축물로 즉 쉽게 말하면 건축법에 따라 건축허가 발급 여부를 불문하고 건축허가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증축 등을 실질적 불법이라고 정의하며, 건축법사의 허가 또는 신고를 안하고 증축, 개축, 신축, 재축하는 경우를 형식적 불법이라고 정의한다. 최근에 들어 규제의 강화로 인해 무허가 상태로 건축물은 신축, 재축, 개축하는 경우는 전무하다 싶을 정도로 감소하였지만, 불법건축물 확산에 주 작용하고 있는 분야가 증축 행위를 통해서 많이 발생되고 있다. 건축법상 건축물을 신축하기 위해서는 ‘200㎡ 이하냐? 초과냐? ’에 따라 건축신고 및 건축허가로 구분된다. 건축신고는 건축허가와 달리 적은 비용 및 서류 제출을 통해 손쉽게 건축승인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건축신고 적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불법을 양상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200㎡라면 약 60평규모로 전원주택이나 일반주택을 신축시 4인 가족이 생활하기에는 아파트와 달리 협소하다고 판단되는 면적으로 보통의 경우는 건축신고를 통해 건물을 신축한 후 불법 증축(일명 : 달아내기)을 통해 확장하여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이러한 사례로 인해 허가 관청으로부터 계고장 및 행정처분을 받아 본인을 찾아 주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찾아 주신 대부분의 의뢰인 경우는 ‘당장 내일 집을 부셔야 해야 하냐?’는 등의 질문부터 하시면서 불안해 하신다. 이런한 사례가 많아 오늘은 자신이 불법건축물 소유주로 특정되었다면 구제할 수 있는 부분에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먼저, 허가관청 및 읍ㆍ면ㆍ동 사무소로 행정처분 유형의 공문을 통지 받았을 경우 정확한 자신의 위반사항을 식별을 해야 한다. 행정처분을 주관하는 지방자치 단체의 주무관 경우도 법령과 조례를 잘못 해석하여 발부하는 경우도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에 정확한 위반사항을 식별한 후 위반사항을 손쉽게 해결 할 수 있는 경우 즉, 부착물 분리 등의 경우는 토지와 부착물의 분리를 통해 얼마든지 위반사항을 시정할 수 있을 것이며, 건폐율 및 용적률 위반의 경우는 주변의 토지 등을 ‘합필목적으로 분할하여’ 매수함으로써 불법건축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다고 판단된다. 여기서 간과하면 안되는 사항으로 기타의 법령 건축법을 제외 한 도로법 등의 법령은 조정을 통해서 수정이 가능하지만, 건축법에서 정한 기준을 위반한 경우는 주변의 토지를 추가 매입하지 않으면 절대로 담당자가 추인을 해주지 않는다. 앞서 말한 추인제도란 ‘발생된 무허가 건축물에 대하여는 무조건 철거하거나 행정대집행을 하는 것은 국가적 낭비와 개인적으로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가져오므로, 이러한 경제적 손실을 없애고자 행정적으로 적법한 건축무로 사후에 허가’하는 제도이다. 추인제도를 통해 허가받기 위해서는 ▲1회 이상의 이행강제금 납부, ▲건축법 기준 적용 검토, ▲서류보안 등의 절차를 통해 진행되며, 여기서 건축법 기준 적용 검토는 절차 중에 대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인으로서 상당하게 접근이 쉽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신경을 약간만 쓰신다면 어렵지 않게 무허가 건축물을 양성화할 수 있다고 판단되며 정말로 어렵다고 판단되면 건축법 전문으로하는 행정사 등의 전문가를 찾아가 상담을 하시는 것을 추천한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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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손암 정약전④ 정약전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섬사람들[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흑산도와 우이도 현재 전라남도 행정구역상 흑산도(黑山島)는 전남 신안군 흑산면에 속하고 우이도(牛耳島)는 전남 신안군 도초면에 속한다. 손암 정약전이 유배생활을 하던 1800년경의 흑산도 지역은 흑산도와 우이도를 합쳐서 흑산도라 통칭 하였고, 흑산도를 대흑산, 우이도를 소흑산이라고 불렀다. 조선 영조 이후에는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없는 섬은 원칙적으로 사람이 살지 않도록 공도(空島) 정책을 유지했으며 유배 죄인은 반드시 관리의 통제권 내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흑산도의 경우는 진(鎭)이 설치되어 별장(別將)이 파견되어 있는 소흑산도(우이도)가 유배지였다. 당시 조선은 유배자들에 대한 지원이나 공급 정책 자체가 애매했기 때문에 비록 양반이라 하더라도 살림이 넉넉하지 못하면 유배지에서 학동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는 생계를 유지하는 방도를 찾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그래서 여건이 열악하고 땅이 좁은 우이도 보다는 먹고 살기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대흑산도로 깊이 들어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사는 경우가 많았다. 우이도의 관리들도 유배자들이 대흑산도로 이주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묵인했다. 손암 정약전도 소흑산에서 5년, 대흑산에서 8년, 다시 소흑산에서 3년을 살았다. 대흑산도 사리마을에는 손암이 살았던 집(복성재)과 서당(사촌서실)이 복원돼 있고 우이도 진리에도 구전으로 전해오는 집터와 서당터가 남아있다. 다음 글은 손암이 1816년에 죽은 뒤 2년 후에 다산이 기록한 ‘선중씨(先仲氏 돌아가신 둘째형님)의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 중 일부이다. *우리 형제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귀양길을 떠나 나주(羅州)의 성 북쪽 율정점(栗亭店)에 이르러 손을 놓고 서로 헤어져 각기 배소(配所)로 갔다. 이때가 신유년 11월 하순이었다. 그렇게 떨어진지 16년 뒤인 병자년 6월6일에 내흑산(內黑山) 우이보(牛耳堡)에서 공께서는 5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치셨다. 아! 슬프다. 공은 우이보에서 흑산도로 들어간 뒤부터 더욱 술을 많이 마시고 어부들과 친구를 하고 교만스럽게 대하지 않아 섬사람들이 매우 좋아하여 서로 다투어 주인으로 섬겼다. 간간이 흑산도로 흘러간 소문에, 내가 방면의 은혜를 입었으나 대계(臺啓)로 인하여 해배가 정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나의 아우로 하여금 나를 보기 위해 험한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으니 내가 우이보에 가서 기다릴 것이다” 하고 우이보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러나 흑산도의 호걸들이 들고 일어나 공을 꼼짝도 못하게 붙잡으므로 공께서는 은밀히 우이보 사람에게 배를 가지고 오게 하여 안개 낀 밤을 틈 타 첩과 두 아들을 싣고 우이보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흑산도 사람들이 급히 뒤 쫒아와 공을 빼앗아 어찌할 수 없이 다시 돌아갔다. 1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야 흑산도 사람들에게 형제간의 정의(情誼)로 애걸하여 겨우 우이보로 돌아왔다. 위 묘지명에는 손암이 술을 많이 마시고 섬사람들과 대단히 친하게 지냈다거나, 형님이 다산 자신을 위해 대흑산도에서 우이도로 나오려 했다는 것, 대흑산도 섬주민들이 손암을 보내주지 않으려 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손암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44세의 실학자였던 그는 수학ㆍ천문학 등 서양의 놀라운 문물을 접하고 신학문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큰 결심으로 서학을 통해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살리는 길을 모색하던 중에 졸지에 모든 것을 잃고 타의에 의해 먼 바다 한가운데로 유배를 당했으니 현실에 대한 허무와 미래에 대한 절망 앞에서 참담했을 것이다. 이러한 형님의 처참한 처지에 대해 걱정하고 안타까워한 아우 다산의 마음이 깊이 스며있다. 손암이 아우를 그리워하고 위해 주는 심정도 매우 잘 나타나 있다. 다산이 해배되면 흑산도로 자신을 만나러 오리라는 소식을 듣고, 아우가 한 번도 큰 바다를 건너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형으로서는 본인이 흑산도로 유배 올 때 경험한 높은 파도와 바람으로 겪은 그 어려움을 아우가 견딜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자신이 우이도로 나가서 맞으려고 하는 애틋한 마음도 잘 표현 되어 있다. 실제로 1810년 이후부터 서울에서는 정약용을 석방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학연과 학유 두 아들의 줄기찬 상소도 있었다. 이러한 조정의 분위기를 알고 있던 다산이 1814년 경 풀려나리라는 생각을 갖고 형을 만나러 가겠다는 소식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은 반대파 노론의 방해로 석방되지 못하고 1816년에 손암이 죽고 난 뒤인 1818년에야 다산 정약용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섬사람들의 생활은 궁핍했고 귀양살이 하는 사람들은 그곳 주민들에게 대단히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유배인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 달라는 간절한 청원이 담긴 관문서가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흑산도 사리마을 주민들이 손암을 소흑산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 집단행동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당시 유배자들의 대부분은 비록 유배는 왔으나 언젠가는 해배되어 본래의 벼슬과 그에 상응하는 권력도 다시 회복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신분들이기도 했으므로 양반으로서의 자존심과 거만한 권위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살았고 그러한 행태가 당연시되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손암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다. 다른 유배자들과는 달리 그는 섬사람들과의 친밀함이 독특하다. 섬주민들의 태도는 그의 인간적인 품위와 유배 중에 주민들과 격의 없는 생활을 했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천주교 신봉자로서 양반 상민을 구분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그들과 친하게 지냈고 자신의 학식을 공유하며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 주민들이 정약전을 소흑산도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진기하고 인정이 넘치는 풍경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후 86년 후에 프랑스에 보고 된 정약전 이야기 1990년대 말에 천주교 ‘호남교회사연구소’ 김진소 신부에 의해 귀중한 보고서 자료가 발견되었다. 1902년 6월 6일자로 목포지역 주임신부였던 드예(Deshalyes Albert,1871~1910) 신부가 조선교구 뮈텔 주교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흑산도에 사목방문을 다녀온 결과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저는 정약전이 흑산도에 있는 박인수네 집에 귀양 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박인수도 교우가 되었습니다. 정약전은 한국어 성가의 가사를 만들었는데 제가 그것을 받게 되면 곧 주교님께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최초의 교우에 대한 평판은 존경에 가득찬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겸손과 정결함의 모범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이 보고서는 손암이 세상을 떠난 지 86년이 지난 시점에 흑산도에 사는 사람들이 전하는 말을 천주교 주교에게 보고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글에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유배자 정약전이 어떤 인품을 가지고 유배지에서 살다가 갔는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어디에선가 갑자기 세상에 드러나곤 하는 역사적 자료들은 신기하게 우리에게 생생한 과거를 보여준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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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예술사회학 : 관점과 역할[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고대시대의 예술은 신(神, God)을 영접하는 주술에 가까운 의식으로, 토템이즘에서 출발하였다. 이후 중세시대는 종교의 범위 안에서 노래와 그림, 의식 등을 통해 예술 활동으로 이루어졌고 이후 17~18세기에는 종교의 범위를 넘어서 일반대중으로까지 전파되어 예술 분야가 사회학과 정치학의 관점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현대사회에서는 지역문화와 음악ㆍ미술ㆍ문학 등 순수예술의 중요성이 사회, 경제적으로 확대되면서 국가와 지방정부는 다양한 문화현안과 정책을 사회현상과 접목시키고 있고 이러한 분야는 '예술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구되고 있다. 예술사회학 관점 헝가리의 아놀드 하우저, 프랑스 피에르 부르디외, 베라L.졸버그 등의 사회학자들은 예술을 사회적 과정과 조건의 결과로서 외재적 관점으로 접근한 반면, 미학자와 인문학자들은 순수예술에 중점을 두고 좁은 의미의 내재적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특히, 미술평론가이자 예술사학자인 아놀드 하우저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951, 개정판 2016)’, 예술의 사회학(1974) 등에서 예술을 사회의 환경변화 분야와 경제활동의 일환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진정한 예술민주화로 나가려면 예술을 특정 분야로 제약하기보다 더욱 많은 대중으로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반면 부르디외는 '학자가 아니면 지휘자가 됐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고, 졸버그는 예술사회학(1999, 현택수 역)에서 '예술사회학은 인문학과 사회과학 사이의 가교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We are the world : USA for Africa 지난 1984년 아프리카는 불안정한 정치체제와 유례없는 가뭄과 식량부족으로 인해 심각한 고통과 빈곤을 겪고 있었다. 이즈음 음악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음직한 팝송이 발표되었는데, 1985년 미국에서 제작되어 전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간 'We are the world'이다. 이 앨범은 아프리카 난민을 돕기 위한 프로젝트로 기획되면서 팝스타 마이클잭슨과 라이오넬리치가 함께 노래를 만들고 스티비원더, 케니로저스, 신디로퍼, 빌리조엘, 밥딜런, 레이찰스 등 세계 대중음악 시장을 흔들었던 대스타들이 참여하여 만들어진 자선 앨범이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현실화시킨 사람이 살아있는 팝의 전설로 알려진 퀸시 존스(Quincy Jones, 1933~)로 그는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재즈 음악가이자 음악 프로듀서로 타임지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 음반은 발표 당시 빌보드 차트 R&B, 컨츄리, 팝 싱글 부문에서 모두 1위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우면서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싱글 기록을 세웠다. 판매 수익금은 모두 에티오피아와 수단의 기근을 돕는 단체들에 기부되었다. 예술&기획자의 역할 고유한 지역문화와 예술의 중요성이 어느때 보다 회자되는 시기에, 예술사회학에 대한 논의는 문화예술 이외에도 사회, 정치, 경제 분야에서도 논의되고 있다. 문화경제학은 문화예술을 경제학적 측면으로 확장하고 있고, 예술사회학은 음악ㆍ미술ㆍ문학ㆍ영화 등의 예술 분야에 대해 사회학적 관점으로 확장하고 있다. 200여년 전 세계의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낭만 음악시대를 열었던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그랬듯이,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공유하고자 하였던 35년 전의 미국 팝 음악 이야기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 필요한 현실이다. 2020년 코로나19의 전파확산으로 세계가 긴장하고 고통받는 시기에 예술의 역할은 무엇이고 시민으로, 공연기획자로서의 책무는 무엇인지 되돌아면서 또한 희망을 찾아본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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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정치스피치[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정치(政治)는 정치인만의 특권인가? 나도 정치(政治)를 할 수 있을까? 말 뿐인 스피치가 아닌 말 덕분인, 말도 잘하는 스피치로 앞장서야 한다. 현재 우리 정치 스피치를 보라. 정치는 생물(生物)이어서 우선 말을 잘해야 한다. 말로 설득하고 말로 공감하는 것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보통 어떤 말로 아침을 열고, 온종일 무슨 말을 하며, 어떤 말로 하루를 마무리 하는가? 또 당신 인생에서 어떤 말을 남기고 싶은가? 혹시 내가 선택한 정치인이라서 막연한 칭찬을 늘어놓지는 않는지... 혹시 내가 선택한 정치인이 아니라서 험담을 하지는 않는지... 그렇다면 정치는 누가 해야 하는가? 아마도 정의롭고 현명하며 지혜로운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이구동성 외칠 것이다. 또한 도덕적이고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덧붙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 과연 이 모든 것들을 다 갖춘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정치인들을 만나 보면 일단 똑똑하다. 그러나 때때로 정치인의 모습은 우리에게 실망감을 안겨준다. 정치와 부당한 권력은 그 어떤 무기보다도 파괴력이 커서 사람의 생명까지 빼앗을 수 있다. 따라서 국민 눈높이에 앉아서 공감하고 강자에 맞서 싸워주는 모습은 감동을 선사하며 그 어떤 치료제 보다 월등히 높은 치료 효과를 보인다. 그렇다면 정치 스피치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첫 째, ‘말의 절약’이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말의 양이 많다. 물론 정치를 함에 있어 말의 힘은 가히 생명력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일단 자신의 말을 들어주길 원한다. ‘Hearing’ 이 아닌 ‘Listening’ 말이다. 그러므로 정치 스피치에서는 ‘나의 말’은 줄이고 ‘남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작업이 우선이다. 둘 째, ‘말의 질문’이다. 질문을 귀찮아 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과 같다. 질문은 국민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자 애정의 표현이다. 따라서 자문자답(自問自答) 하지 말고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겸허하게 들어야 한다. 셋 째, 성의 있게 말하고 답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성의 있게 정성껏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어렵다. 필자가 스피치 교육을 20 여 년 진행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다음과 같다. ‘저는 왜 발음이 안 좋을까요?’ 그 답은 거울만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입술이 한 자리에 있고 입 모양의 변화는 전혀 없다. 심지어 혀도 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부정확한 발음의 원인은 ‘대충대충’ 하는 ‘성의 부족’이다. 다시말해 ‘정성껏’ 발음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음 기관을 제대로 활용해야만 한다. 그래야 정확한 발음으로 전달력을 높일 수 있다. 일단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를 하다 보면 실현 가능한 꿈만 꾸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상이나 바람이 될 수 있다. 정치인도 인간이기에 막연한 꿈을 좇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만의 욕심이나 욕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상처를 남겨서는 안 된다. 그러니 자기의 이익 보다 오히려 불이익을 감당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이의 불행에는 관대하면서 자신의 행복에는 엄격한 잣대를 내세운다. 그 행복의 기준에 동참하는 정치를 넣어보자. 그리고 그 엄격한 잣대로 행복지수를 높여보자.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국민 특히, 유권자들은 그들을 평가하기 바쁘다. 그러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비판하기에 앞서 ‘나도 정치를 한다.’는 마인드가 필요하다. 또한 스스로 정치를 한다는 느낌을 받으려면 정치인이나 정당에 요구하고 질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창구를 다양하게 마련해야 한다. 그러기에 딱 좋은 지금 시대! 미디어 플랫폼이 다양하다. 활용해 보자. 말의 무게는 특성 상 이 세상에서 가장 가벼울 수도 있고, 가장 무거울 수도 있다. 경(輕), 중(重)을 따지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 인품인 것이다. 의견 대립으로 싸울 수 있지만 화해는 서두르자. 현재의 정치가 왜 국민들의 불신을 불러 오는 지 생각해 보면 말만 앞세우는 즉, 약속 이행이 없는 정치인이 많기 때문이다. 정치 스피치는 언행일치(言行一致)가 필수 요건이다. 정치인 스스로 내뱉은 말은 반드시 실천에 옮겨야 함을 잊지 말자. 국민이 평안한 정치 스피치를 바라본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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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캄보디아 국민 영웅-캄보디아 댁 당구 여신 ‘스롱 피아비’[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지난 칼럼에서 캄보디아 역사상 최초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획득하여 일약 국민 영웅으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던 ‘손 스브메이’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렸다. 그 글을 마무리하고 난 이후에 가만 생각해 보니 또 다른 캄보디아 여성 ‘스롱 피아비 (Sruong Pheavy)’가 한국 여자 당구 1위에 올라 캄보디아에서 당구 여왕 또는 당구 여제의 이름으로 불리며 또 다른 국민 영웅으로 대접 받고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당구 애호가라면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언론 보도를 통해서 많은 독자 분들이 알고 계시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캄보디아 현지에서도 ‘한국에서 성공한 캄보디아 인’이라는 기사로 각종 언론 매체에 소개되어 있다. 그녀의 성공 스토리는 축하와 격려를 아무리 많이 해도 기분 좋은 일이라 생각하여 그 과정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스롱 피아비’는 1990년생으로 올해 만 31세이다. 수도 프놈펜에서 북쪽으로 약 두 시간 떨어진 ‘깜퐁 참’ 주에서 아버지와 함께 감자 농사를 짓던 그녀가 2010년 당시 나이 스무 살에 지금의 한국인 남편과 결혼하여 한국에 왔다. 2011년 어느 날 당구장에 가는 남편을 따라간 ‘스롱 피아비’는 남편과 친구들의 당구 게임을 지켜보기만 하였다. 혼자 즐기는 것이 미안했던 남편이 아내에게 당구 한 번 쳐보라는 말에 난생 처음 당구대를 잡아 본 것이 그녀의 운명을 바꿔 놓게 되었고 오늘날 당구 여제가 된 시작이었다. 그때 ‘스롱 피아비’는 간단한 남편의 지도에도 불구하고 난생 처음 당구대를 잡았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천부적인 당구 실력을 드러내어 주변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아내의 당구 실력에 놀란 남편은 내친 김에 당구 선수로 만들고자 헌신하기 시작하였고 하루 열 두 시간이 넘게 연습을 하여 마침내 2014년 전국 아마추어 당구대회에서 우승하게 된다. 이때부터 ‘스롱 피아비’라는 이름이 당구 애호가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2016년에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그 다음해인 2017년 6월에 국내 랭킹 1위에 오르는 놀라운 일을 벌이게 된다. 이후 ‘스롱 피아비’는 아시아 선수권대회 우승은 물론이고 세계 선수권 대회까지 우승하는 등 세계 랭킹 2위까지 오르게 되면서 한국 당구계는 물론 전 세계 당구인들 사이에도 유명 인사가 되었다. 또한, 그녀는 지난 달 경주에서 열린 LPBA(여자프로당구대회) 월드 챔피언 쉽 대회에서도 우승을 하였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롱 피아비’는 그동안 우승 상금은 물론이고 각종 후원금과 기업체 스폰서까지 말 그대로 돈과 명예를 다 가지게 되었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의사의 꿈도 접었던 그녀가 이제는 당당하게 고국 캄보디아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있으며 특별히 캄보디아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나의 제자들도 그녀의 열성 팬임은 물론이며 어느 땐 그녀의 시합 장면을 수업 시간에 감상하기도 하였다. 당구가 아닌 다른 일로 그녀와 관계된 유명한 일화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문재인 대통령 내외분께서 캄보디아를 국빈 방문하셨을 때 (2019년 3월 14-16일) 한국 측 수행 인사에 뜻밖에도 ‘스롱 피아비’가 초대되어 캄보디아 정부와 교민 사회가 깜짝 놀랐던 일이 있었다. 그만큼 ‘스롱 피아비’는 한국에서 성공한 캄보디아인으로 알려졌고 이 일로 인해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캄보디아 정부와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캄보디아 이주 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국 지도자로 인식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한국과 캄보디아의 우의는 이전보다 훨씬 돈독해졌으며 진정한 마음으로 다가 간 한국의 대통령에게 중국 일변도의 친중 성향인 캄보디아 정부는 국왕을 비롯하여 훈센 수상 등 국가 지도자들이 극진히 대접하였다. 이로 인해서 캄보디아 젊은이들은 한국에 대한 동경이 더욱 커졌으며 한국은 그들에게 꿈을 이루기 위해 기회를 주는 나라라는 인식이 더욱 강해졌다. 이래저래 한ㆍ캄 커플의 힘이 양국 우호는 물론 대한민국 국익 신장에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캄보디아 국민들은 손재주가 아주 뛰어나고 머리 또한 영리하다. 그래서 세계 6대 불가사의라고 일컫는 ‘앙코르 왓’을 만들었고 거기에 새겨진 부조는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게다가 ‘앙코르 왓’건축에 과학적인 건축 기법은 물론이고 천문학까지 동원하였으니 그 시기에 이미 문명 발달 수준이 상당하였던 민족이다. 이렇듯 그들의 손끝과 머리에서 만들어진 ‘앙코르 왓’은 신비롭고 웅장하여 말 그대로 불가사의할 정도이다. 그런 고대 크메르인들의 우수성을 ‘스롱 피아비’가 당구대에서 마음껏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스롱 피아비’는 얼마 전 코비드 19로 고통 받고 있는 고국 캄보디아를 위해 한국산 마스크를 기부하는 선행을 하였다. 이 일로 캄보디아에 한국산 K-마스크의 우수성 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캄보디아에서 한국 마스크 품질은 확실히 인정받고 있다. 엄청나게 밀려들어온 중국산 마스크 보다 인기가 높아 나의 학생들은 모두 한국의 지인들이 보내준 KF-94 마스크를 자랑스럽게 쓰고 다닌다. 심지어는 나의 이웃들도 한국 마스크를 얻기 위해 우리 집에 찾아오기도 한다. (KF-94 마스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회 칼럼에서 다시 전해드리고자 한다). 한국에서 성공한 캄보디아인 ‘스롱 피아비’, 한국에서 성공한 삶을 만든 그녀에게 큰 찬사를 보낸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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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합법과 불법 녹취의 정의[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필자가 지난번 칼럼에서 ‘알아야 산다’라는 말을 어필한 적이 있습니다. 최근 스마트폰과 초소형 녹음장치의 발달로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 중 제3자와의 대화를 녹음하여 약점을 잡거나, 결정적 증거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잘 활용한다면 생활에 윤택한 부분을 더 충족시킬 수 있겠지만, 잘못된 사용으로 인해 법에 접촉되어 실형을 사는 경우도 많아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오늘은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근 필자의 지인 또한 혐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통화 중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사과를 하였는데, 상대방이 이를 빌미로 한 증거 제시를 하여 경제 및 심리적 손해가 발생되는 경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 전화통화 자체만으로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항상 조심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녹취하여 결정적 증거, 인정 증거로 제시하여 오히려 통신비밀 보호법을 위배하여 실형 또는 자격정지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 오늘은 합법적인 녹취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르면 ‘누군든지 법의 지시없이 우편을 검열하거나 전기통신 장치의 감청, 공개되지 않는 타인의 대화나 상대의 동의 없이 녹음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령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자면 상대방의 동의없이 하는 녹취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의제할 수 있겠지만, 실제 현행법 적용에서 녹취 당사자가 직접대화에 참여하면서 녹취하거나 녹음을 하는 행위는 불법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쉽게 다시 한 번 설명 드리자면 '합법적인 녹취 및 녹음 방법은 대화 당사자인 내가 녹음하면 합법', '대화 참여자가 아닌 남이 녹음하면 불법'이 됩니다. 이를 잘 알고 녹취 및 녹음을 하셔야 되며, 본인이 참여한 대화를 녹음했다 하더라도 녹취 및 녹음은 합법이지만 이를 유포하거나 유출하는 것은 또한 통신비밀 보호법에 어긋나는 행위로써 함부로 타인 및 제3자에게 들려주거나 유출하는 행위는 가급적 삼가셔야 됩니다. 아무리 합법적인 녹취 및 녹음이라 할지라도 사용방법에 따라 쟁점을 만들 소지가 충분하오니 이를 간과 하지 마시고 주변에 전문가를 찾아 상담을 통해 사용방법을 선택하시는게 개인의 신상에도 좋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서, 설명드린 내용 중 불법 녹취 및 녹음된 자료라도 소송사건의 경우는 가끔 증거로 인정하는 경우도 있으나,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죄에 해당되어 소송사건외에 처벌을 받을 수 있으며,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죄는 초범이라 할지라도 꼼짝없이 징역형을 살 수 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공증을 받은 녹취록이나 녹음을 한다고 하더라도 소송사건에서 무조건 증거로 인정해 주는 것은 아니며, 그 내용 안에는 사건에 관련된 견련성, 객관성, 적격성이 담겨 있어야만 활용이 가능하니 이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통상의 대화속에서 상대방이 인정을 하지도 않았고, 그에 대한 표현 조차 특정할 수 없는 상태의 녹음 파일을 가지고 오셔서 그에 대한 내용이 맞다고 주장하시는 의뢰인 분들도 많아 진정 또는 청원을 써드리는 저의 입장을 매우 곤란하게 하는 경도 많이 있습니다. 더불어 수년간 배우자의 유책을 잡기 위해서 노력을 하였지만, 취득원인이 불법인 상태로 가져오셔서 증거로 활용할 수 없거나 오히려 상대방에게 역 고소를 당하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를 겪으실 도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녹취 및 녹음을 활용하시기 전에 반드시 전문가를 찾아 면밀한 상담을 하시라고 추전드리고 싶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그 동안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좀 더 파악이 된다면 다음에 이러한 행위를 할 경우 도움을 줄 수 도 있다는 판단에 작성된 글이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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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손암 정약전③ 조선 최초 지동설(태양중심설) 주장[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지동설(태양중심설) 지동설(地動說)은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며,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도는 천체 중 하나라는 이론이다. 폴란드의 가톨릭 주교로서 천체 관측과 궤도 계산을 연구하는 천문가였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태양중심설) 주장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존엄한 존재로서 달 위의 천상계는 영원한 신의 영역이라고 여겼던 중세의 우주관인 천동설(지구중심설)을 뒤엎는 혁명적 결과를 이루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일으킨 지동설의 파급력은 인간중심의 지구중심설에서 객관적 입장인 태양중심설로 발상의 대 전환을 가져왔다. 이후 인류는 파격적인 인식의 변환이나 획기적인 변혁이 있을 때 이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일컫는다. 18세기 조선의 천문학에 대한 관점 조선시대의 천문에 대한 관심은 세종이 장영실을 천민의 신분을 면하게 하여 중국의 ‘천문기기’를 연구할 수 있도록 하고 ‘천문관측기기’들을 제작하게 한 것이라든지, 영조 때부터 혜성의 출현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연구하게 한 일 등 수많은 과학에 관련된 조선의 노력과 성과가 있었지만 서양의 과학 발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동ㆍ서양의 인식의 차이가 있었다. 실학자들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몰두한 과학과 관련된 사실들도 독자적인 학문의 영역으로서가 아니라 서양의 과학 현실을 접하고 이것을 수용하느냐 마느냐 정도의 실정이었기 때문에 깊이 있는 과학적 성과 보다는 실학자로서 열린 눈으로 수용해서 입증하고 발전시키려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하는 정도의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천문은 제쳐놓고 지구에 대한 것만 보더라도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한 천체가 다른 천제의 둘레를 주기적으로 돈다고 하는 지구공전설(지동설-태양중심설)에는 생각이 이르지 못했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지구 구설(球說)이나, 지구가 그 둘레에서 스스로 돌고 있다는 지구자전설에 관심을 갖는 정도의 상황이었다. * 둘째 형님께 글월 올립니다 혜성의 이치는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만, 형님께서 보내주신 글에서는 이것을 지구가 도는 확실한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혜성은 지난 7, 8월에는 북두칠성 자루 쪽의 두 번째 별에 밀접하게 붙어 있었는데. 8월 그믐쯤에는 점점 높이 떠서 점점 서쪽으로 갔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분명히 별이 도는 것이지 지구가 돌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령 지구가 운행한다 하더라도 별 역시 옮겨가고 있으니, 이것을 보면 별은 한 곳에 붙어 있고, 지구만 왼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붙박이면 붙박이고 떨어지면 떨어질 일이지 어떻게 돌 수가 있고 옮길 수가 있단 말입니까? - ‘1812년 경 유배 중에 다산이 형 손암에게 보낸 편지’ 정혜렴 역주, 2002 * 다산은 실학자들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가는 연구와 학문적 성과를 남긴 석학이지만, 당시 지구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놀랄 정도로 근시안적이었다. 형 손암이 지구가 스스로 돌며 공전한다고 하는 편지에 대해서 답장을 하는 아우 다산은 지구가 둥글고 스스로 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지구가 자전하면서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는 태양중심설은 결코 인정하지 않고 있다. * 동생 다산에게 부친다 요즘 혜성이 서북쪽으로 가로 뻗쳤으니 이는 일찍이 보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그 불띠(火帶)의 변화함을 분명히 알고 보면 그리 놀라울 것도 없네. 혜성이 처음에는 서쪽에 있다가 점점 동쪽으로 향했는데 지금은 북두성 동쪽 5, 6도쯤에 있으니 이는 지구가 운행하는 분명한 증거이네. 그렇지 않다면 불띠를 두른 혜성이 어째서 돌고 있겠는가? 지구가 운행하는 때에 불띠 꼬리가 또한 조금씩 동쪽으로 도니, 이로써 지구로부터 별자리에 이르기 까지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이지 아니함이 없음을 알 수 있네. - ‘1812년 경 유배 중에 손암이 동생 다산에게 보낸 편지’ 정혜렴 역주, 2002 * 아우의 답장에 대해 다시 손암이 지구의 공전에 대해 설명하며 쓴 편지 내용이다. 이렇듯이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는 조선의 선각자들이었던 실학자들도 새로운 서학의 과학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이것을 그대로 수용해서 인정하고 연구하는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두 형제는 서양에서 발전된 천문에 대한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유배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실학자로서 날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기록하고, 편지로 서로 물어보면서 천문을 연구했다. 조선 최초로 지동설(태양중심설)을 주장한 사람은 최한기가 아니라 손암 정약전 * 요컨대 그는(손암 정약전) 지구가 둥글고 자전할 뿐만 아니라 태양의 주위를 공전한다고 확신하고 혜성의 이동을 관찰하여 그것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증명은 그 과정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최한기 보다 앞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확신하고 그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선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성호학파의 양명학과 서학』 서종태, 1995 * 손암과 다산 두 형제가 유배 중에 쓴 편지들에 의하면 손암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비롯한 천체들이 태양의 주위를 공전한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혜성이 움직이는 것은 지구가 공전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고 보고, 혜성의 이동을 자세히 관찰해서 그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성호 이익이나 다산도 지구가 공처럼 둥글다는 이 지구의 구설은 믿었지만, 지구가 스스로 돈다고 하는 자전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했고, 또 중국보다도 먼저 지구가 스스로 자전해서 낮과 밤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던 효종 때의 김석문이나 영조 때의 홍대용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중에서 지구의 자전은 수용했지만,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고 하는 지동설은 믿지 않았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중에 최한기(崔漢綺,1803~1879)라는 학자가 있다. 최한기는 진사시에 급제한 일이 있었지만,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오직 독서와 저술에만 몰두하였다. 지은 책이 1천여 권이 넘는다고 전해지고 있고, 현재 남아있는 저술도 20여 종에 120권이 넘는다. 그는 모든 학문 분야를 섭렵했고,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와 함께 지도제작에 참여한 기록도 남아있다. 손암과 다산이 유배지에서 쓴 편지들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기존의 학설에서 이 최한기가 최초로 지동설을 조선에 소개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한기는 1803년에 태어났고, 두 형제의 천문에 대한 편지는 1805년에서 1812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최한기 보다 손암 정약전이 더 먼저 조선 최초로 지동설을 확신하고 그 입증을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