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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손암 정약전④ 정약전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섬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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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손암 정약전④ 정약전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섬사람들

임 송 문화예술학 박사
여수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표 예술감독

손암 정약전2.jpg
임 송 박사 자료제공 - 손암 정약전

 

[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흑산도와 우이도

 

현재 전라남도 행정구역상 흑산도(黑山島)는 전남 신안군 흑산면에 속하고 우이도(牛耳島)는 전남 신안군 도초면에 속한다. 손암 정약전이 유배생활을 하던 1800년경의 흑산도 지역은 흑산도와 우이도를 합쳐서 흑산도라 통칭 하였고, 흑산도를 대흑산, 우이도를 소흑산이라고 불렀다. 조선 영조 이후에는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없는 섬은 원칙적으로 사람이 살지 않도록 공도(空島) 정책을 유지했으며 유배 죄인은 반드시 관리의 통제권 내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흑산도의 경우는 진(鎭)이 설치되어 별장(別將)이 파견되어 있는 소흑산도(우이도)가 유배지였다.


당시 조선은 유배자들에 대한 지원이나 공급 정책 자체가 애매했기 때문에 비록 양반이라 하더라도 살림이 넉넉하지 못하면 유배지에서 학동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는 생계를 유지하는 방도를 찾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그래서 여건이 열악하고 땅이 좁은 우이도 보다는 먹고 살기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대흑산도로 깊이 들어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사는 경우가 많았다. 우이도의 관리들도 유배자들이 대흑산도로 이주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묵인했다. 손암 정약전도 소흑산에서 5년, 대흑산에서 8년, 다시 소흑산에서 3년을 살았다. 대흑산도 사리마을에는 손암이 살았던 집(복성재)과 서당(사촌서실)이 복원돼 있고 우이도 진리에도 구전으로 전해오는 집터와 서당터가 남아있다.

 

손암정약전 3.jpg
임 송박사 자료 제공 - 당시 서당 모습

 

다음 글은 손암이 1816년에 죽은 뒤 2년 후에 다산이 기록한 ‘선중씨(先仲氏 돌아가신 둘째형님)의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 중 일부이다.

 

*우리 형제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귀양길을 떠나 나주(羅州)의 성 북쪽 율정점(栗亭店)에 이르러 손을 놓고 서로 헤어져 각기 배소(配所)로 갔다. 이때가 신유년 11월 하순이었다. 그렇게 떨어진지 16년 뒤인 병자년 6월6일에 내흑산(內黑山) 우이보(牛耳堡)에서 공께서는 5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치셨다. 아! 슬프다. 공은 우이보에서 흑산도로 들어간 뒤부터 더욱 술을 많이 마시고 어부들과 친구를 하고 교만스럽게 대하지 않아 섬사람들이 매우 좋아하여 서로 다투어 주인으로 섬겼다. 간간이 흑산도로 흘러간 소문에, 내가 방면의 은혜를 입었으나 대계(臺啓)로 인하여 해배가 정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나의 아우로 하여금 나를 보기 위해 험한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으니 내가 우이보에 가서 기다릴 것이다” 하고 우이보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러나 흑산도의 호걸들이 들고 일어나 공을 꼼짝도 못하게 붙잡으므로 공께서는 은밀히 우이보 사람에게 배를 가지고 오게 하여 안개 낀 밤을 틈 타 첩과 두 아들을 싣고 우이보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흑산도 사람들이 급히 뒤 쫒아와 공을 빼앗아 어찌할 수 없이 다시 돌아갔다. 1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야 흑산도 사람들에게 형제간의 정의(情誼)로 애걸하여 겨우 우이보로 돌아왔다.

 

위 묘지명에는 손암이 술을 많이 마시고 섬사람들과 대단히 친하게 지냈다거나, 형님이 다산 자신을 위해 대흑산도에서 우이도로 나오려 했다는 것, 대흑산도 섬주민들이 손암을 보내주지 않으려 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손암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44세의 실학자였던 그는 수학ㆍ천문학 등 서양의 놀라운 문물을 접하고 신학문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큰 결심으로 서학을 통해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살리는 길을 모색하던 중에 졸지에 모든 것을 잃고 타의에 의해 먼 바다 한가운데로 유배를 당했으니 현실에 대한 허무와 미래에 대한 절망 앞에서 참담했을 것이다. 이러한 형님의 처참한 처지에 대해 걱정하고 안타까워한 아우 다산의 마음이 깊이 스며있다.


손암이 아우를 그리워하고 위해 주는 심정도 매우 잘 나타나 있다. 다산이 해배되면 흑산도로 자신을 만나러 오리라는 소식을 듣고, 아우가 한 번도 큰 바다를 건너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형으로서는 본인이 흑산도로 유배 올 때 경험한 높은 파도와 바람으로 겪은 그 어려움을 아우가 견딜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자신이 우이도로 나가서 맞으려고 하는 애틋한 마음도 잘 표현 되어 있다. 실제로 1810년 이후부터 서울에서는 정약용을 석방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학연과 학유 두 아들의 줄기찬 상소도 있었다. 이러한 조정의 분위기를 알고 있던 다산이 1814년 경 풀려나리라는 생각을 갖고 형을 만나러 가겠다는 소식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은 반대파 노론의 방해로 석방되지 못하고 1816년에 손암이 죽고 난 뒤인 1818년에야 다산 정약용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섬사람들의 생활은 궁핍했고 귀양살이 하는 사람들은 그곳 주민들에게 대단히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유배인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 달라는 간절한 청원이 담긴 관문서가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흑산도 사리마을 주민들이 손암을 소흑산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 집단행동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당시 유배자들의 대부분은 비록 유배는 왔으나 언젠가는 해배되어 본래의 벼슬과 그에 상응하는 권력도 다시 회복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신분들이기도 했으므로 양반으로서의 자존심과 거만한 권위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살았고 그러한 행태가 당연시되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손암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다. 다른 유배자들과는 달리 그는 섬사람들과의 친밀함이 독특하다. 섬주민들의 태도는 그의 인간적인 품위와 유배 중에 주민들과 격의 없는 생활을 했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천주교 신봉자로서 양반 상민을 구분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그들과 친하게 지냈고 자신의 학식을 공유하며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 주민들이 정약전을 소흑산도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진기하고 인정이 넘치는 풍경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후 86년 후에 프랑스에 보고 된 정약전 이야기

1990년대 말에 천주교 ‘호남교회사연구소’ 김진소 신부에 의해 귀중한 보고서 자료가 발견되었다. 1902년 6월 6일자로 목포지역 주임신부였던 드예(Deshalyes Albert,1871~1910) 신부가 조선교구 뮈텔 주교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흑산도에 사목방문을 다녀온 결과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어판 인쇄본4.jpg
임 송 박사 자료제공 - 조선교구 드예 신부가 프랑스외방전 교회에 보낸 사목보고서 (호남교회사연구소 김진소 신부에 의해 발견) 프랑스어판 인쇄본 표지(1896년~1908년)

 

 

··· 저는 정약전이 흑산도에 있는 박인수네 집에 귀양 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박인수도 교우가 되었습니다. 정약전은 한국어 성가의 가사를 만들었는데 제가 그것을 받게 되면 곧 주교님께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최초의 교우에 대한 평판은 존경에 가득찬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겸손과 정결함의 모범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이 보고서는 손암이 세상을 떠난 지 86년이 지난 시점에 흑산도에 사는 사람들이 전하는 말을 천주교 주교에게 보고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글에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유배자 정약전이 어떤 인품을 가지고 유배지에서 살다가 갔는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어디에선가 갑자기 세상에 드러나곤 하는 역사적 자료들은 신기하게 우리에게 생생한 과거를 보여준다.

 

사목보고서5.jpg
임 송 박사 자료제공 - 정약전 관련(프랑스어판 사목보고서 인쇄본) 내용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hwa371111@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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