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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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문화도시 방향: 예술과 지역, 그리고 관용 정신[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전주영 기자= 제주포럼; 문화도시 제주 서귀포 지난달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는 '공존, 공진화를 위한 플랫폼으로서 문화도시: 갈등을 넘어 평화로, 공존과 협력'이라는 주제로 유네스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문화정책자문관인 Pier Luigi Sacco(피에르루이지 사코)교수, BELOCAL 김혁주 대표의 발표와 신용식 문화체육관광부 한류지원협력과장, 필자(김태관 제주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 이광준 서귀포시문화도시센터장이 참여하였고, 좌장에는 제주대학교 김정훈 교수(경영대학원장)가 참여하면서 국제사회와 지역에서 보는 문화도시에 관한 내용의 토론회가 진행되었다. 주제발표를 한 피에르 루이지 사코 교수의 의하면, 문화도시의 선정은 단순히 도시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도시를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시민들에게 큰 자부심을 주며,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문화 활동에 참여하고, 도시의 잠재력을 향상하고 지속 가능한 문화관광 콘텐츠를 개발해 도시 브랜드 향상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지역문화의 창의성, 지방 거버넌스의 우수함, 매력적인 외부역량, 내외부 네트워킹 등 12개의 핵심요소를 강조하였다. 또한 김혁주 대표는 로컬의 의미와 인천, 부산, 강릉 등의 도시로 문화가 확산하고 있음을 이야기면서, 가치와 개인 취향이 담긴 로컬 브랜드 소비가 확대되고, 트렌드를 넘어서는 MZ 세대로 성장중임을 강조하였다. 다양성의 섬 제주의 문화예술활동 변화 문화체육관광부 2018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인구 10만 명당 문화예술 활동 건수를 지역별로 조사하였는데 광주, 대구, 부산 등 대도시는 평균 약 70회였고 전남, 세종, 충남 등의 중소도시는 약 55회로 나타났다. 반면 서울은 124회로 월등하게 앞서고, 제주는 서울보다 높은 133회로 전국 1위를 차지하였다. 그 이유는 제주도민의 인구수가 적은 것도 있지만, 제주 정착 이주민 대부분이 문화예술 활동을 하는 청년과 중장년들이 많은 이유도 있다. 또한, 제주의 문화예술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는 방증이다. 한편 최근 제주로 이주했던 이주민들이 제주를 떠나고 있는 상황을 보면, 그들에 대한 준비는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 정착 이주민을 확대하고 머무르게 하는 가장 효과 좋은 방안 중에 하나는, 보다 다양하고 자유로운 문화예술 활동이다. 제주와 대도시의 가장 큰 차이점이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에 대한 직접 참여와 인프라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화도시의 핵심: 고유한 문화와 다양한 예술의 접목 문화도시의 핵심은 지역민과 예술가들의 상호부조와 협력을 통해 '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다양한 예술을 접목하여 지역브랜드 문화상품 개발 육성'이다. 그리고 피에르 루이지 사코 교수가 강조한 '지역 문화 관광 콘텐츠를 활용한 도시 브랜드 향상'이다. 필자는 2022 제주포럼에서 문화도시 서귀포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의견을 3가지로 요약하여 제안하였다. ▲첫째, 예술가와 지역주민이 함께 할수 있는 행정재정적 지원과 지속적 지원에 관한 사항을 행정에서 제도화 해야한다. ▲둘째, 글로벌 공감대 형성을 위한 고유한 지역 문화와 예술가와 주민이 함께 참여하여 다양한 전시, 공연예술 작품을 제작하여 예술공간에서 '지역브랜드 문화예술상품'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셋째, 이를 위해 이를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실행할 전문적인 별도의 조직을 구성해야한다. 문화도시의 방향과 예술이 추구하는 목표는 같다. 그 목표는 보편적 가치인 공동체(나눔=쉐어링), 화합(하모니)과 협력(콜라보레이션)이다. 제주가 문화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예술을 다양하게 접목하고 활용해야한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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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이해관계사실확인서[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전주영 기자= 나라경제가 점점 힘들어지는 가운데, 소액의 금전을 융통하거나, 차용해줘 곤란한 상황을 겪는 분들이 있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옛말에 '앉아서 빌려주고 서서 받는다'라는 말처럼 경제상황의 어려움으로 인해 소액의 금전도 정말로 받기 힘든 경우가 많은데, 오늘은 상대방의 주소가 불명확하거나, 주소 변경으로 인해 내용증명 또는 소제기가 어려워 지는 분들을 위해 이해관계사실확인서 제도에 대해 짧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이해관계사실확인서는 반드시 채권ㆍ채무 관계에서만 활용하는 것이 아닌 이혼으로 인해 전 부인의 주소를 모를 때, 토지 등 부동산의 거래시 공동명의 지분 중 일부를 구입하였거나 공동명의의 지분권자에게 연락을 하여 나머지 지분의 구입을 위해 상대방의 주소를 모를 때 등 다채롭게 활용될 수 있습니다. 채권ㆍ채무관계에서 활용되는 이해관계사실확인서는 채권ㆍ채무 관계자의 주민등록표 초본의 열람 또는 교부 신청서라는 지정된 명칭이 있으며, 채권ㆍ채무 관계에서 이해관계사실확인서 발급요건은 최소 50만 원 이상의 채권가액이 존재해야 하며, 구두로 성립된 채권ㆍ채무 관계는 이체된 증빙자료도 포함되어야 이해관계 사실 확인서를 발급하는 전문가가 발급할 수 있습니다. 혹시 아는 분이 동사무소 또는 면사무소 근무한다고 하여 지인을 통해 상대방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경우는 '개인정보보호법' 및 '주민등록법'을 위반하여 당사자 및 당사자에게 협조한 모두가 처벌되므로, 가능한 '주민등록법' 상 이해관계사설확인서를 통해 파악하는 것을 권장드리며, 이해관계사실확인서를 발급할 수 있는 전문가는 변호사, 행정사, 법무사, 세무사가 발급할 수 있으며, 개인 간의 다툼 및 분쟁 건에 대해서는 입증이 되면 발급이 가능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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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손암 정약전⑳ ‘학초(學樵)’를 잃고 입후(立後)를 논하다[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전주영 기자= 기대했던 조카를 잃은 다산의 비통함 정묘년(1807년) 7월 19일 학초(學樵, 1791~1807)가 세상을 떠났다. ‘가을이 되면 학초를 강진으로 불러다가 겨울을 지내며 글을 가르쳐서 봄이 오면 둘째 아들 학유와 함께 형님이 계신 흑산도로 보내려고 하는데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라며 손암 정약전에게 편지를 보냈었고, 일찍이 조카 학초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그에게 모든 것을 전수코자 했던 다산은 몹시 비통해 하였다. 다산은 신유박해(1801년) 때 경상도 장기현(長鬐縣)으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帛書事件)으로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고초를 겪고 강진으로 유배되어 강진 읍내 주막 뒷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당호를 짓고 빈한하게 살고 있던 차에 학초의 죽음을 맞아 학문을 중단하고 다산초당으로 주거를 바꿀 때까지 오랫동안 실의에 빠져 안타까운 시간을 보냈다. 죽은 학초에 대한 입후의 문제 손암의 아픔은 아버지로서 더욱 말할 것이 없었다. 학초가 자식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그의 후사를 정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그리하여 3년 후에 손암과 다산 간에 이른바 ‘학초의 후사에 대한 입후(立後)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입후는 대를 이을 아들을 세우는 일을 말한다. 학초는 죽기 전까지 아버지의 외가 쪽 친척인 정학기(鄭學箕)의 두 아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손암의 부인 김씨는 정학기의 아들이 마음에 끌려 학초의 후사로 삼아 아들로 입적시키고자 했다. 다산의 아들 학연과 학유도 그를 조카사위로 삼는 것에 동의하고 큰어머니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손암과 다산의 이복형인 정약현도 동조했다. 학연과 학유가 즉각 이 문제를 정학기에게 건의하자 기꺼이 손암과 다산의 뜻을 따르겠다고 답했다. 두 아들은 기쁜 마음으로 강진의 아버지 다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다산은 일(事)로 볼 때는 매우 좋을지 모르지만 예(禮)로 보아서는 매우 옳지 않다며 이를 반대했다. 흑산도에서 출생한 손암의 서자(庶子) 학소(學蘇, 1805~?) 손암에게는 학초가 죽기 전에 두 살이 된 흑산도에서 낳은 서자(庶子) 학소(學蘇, 1805~?)가 있었다. 다산은 예학을 따르는 자신의 집안에서 예에 어긋나는 일이 일어나자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다산은 손암의 서자 학소가 비록 서출이지만 그가 아들 낳기를 기다려 학초의 후사를 삼아야 예에 맞다고 했다. 두 아들은 다시 입후의 계획을 취하하기로 했다. 입후의 문제는 없던 일이 되는 듯 했다. 그러나 손암의 부인 김씨가 다산에게 편지를 보내 하소연하였다. “서방님, 나를 살려주시오. 서방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오. 비록 나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찌하여 내게 차마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손암은 아들이 있으나 나는 아들이 없습니다. 나야 비록 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청상과부인 며느리는 아들이 없으니, 청상의 애절한 슬픔에 예가 무슨 소용이겠소. 예에는 없더라도 나는 그를 데려오겠소.” 다산은 당혹스러운 노릇이라 손암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다산이 손암에게 보낸 서간 – 형수의 하소연에 입후에 대한 결단을 권함 - 학기(學箕 다산의 족질(族姪) 자는 희열(希說)임) 가 그의 아들을 집 아이들에게 의탁하여 글을 배우도록 하였는데, 그 아이들의 얼굴 모습이 준수하여 형수씨가 보고서는 학초(學樵)의 후사로 세우고 싶어하였습니다. 무장(武牂 다산의 큰아들)과 문장(文牂 둘째 아들) 두 아이들도 큰 욕심이 생겨 그를 끌어다가 당질(堂姪)로 삼고 싶어서 학기와 서로 의논하였더니, 학기가 말하기를, “자산(玆山 정약전을 가르킴)과 다산(茶山)의 뜻이 데려가고 싶으시다면 나는 당연히 바치겠다.” 고 하였답니다. 두 아이들이 다산으로 편지를 보내왔기에 답하기를, “일로 보아서는 매우 좋으나 예(禮)로 보아서는 매우 어긋난다. 예를 어길 수는 없다.” 라고 하니, 두 아이들은, “예의 뜻이 이미 그러하다면 마땅히 계획을 파하렵니다.” 라고 했었습니다. 백씨(伯氏 정약현(丁若鉉))께서는 편지를 주시어, “내가 이런 말을 듣고 마음으로 무척 그르게 여겼는데, 그대의 말이 이와 같으니 정말로 나의 뜻과 합치된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형수께서 편지를 보내어, “아주버니여, 저를 살려주시오. 아주버니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오. 저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찌하여 저에게 차마 그렇게 하십니까. 자산(玆山)은 아들이 있으나 저는 아들이 없습니다. 저야 비록 아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청상과부인 며느리는 아들이 없으니, 청상의 애절한 슬픔에 예가 무슨 소용이겠소. 예에는 없다 하더라도 저는 그를 데려오겠소.” 라고 하여,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우는 듯 호소하는 듯하여 읽자니 눈물이 흘러내리고 답변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답하기를, “예에 비록 어긋난다 하더라도 일로 보면 매우 좋습니다. 저는 차마 저지하지 못하겠으니 그냥 누워 있겠습니다. 자산(玆山)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그 처분에 전적으로 따르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몸져 누운 제 아내의 편지에, “한마디 말이 떨어지자마자 환희가 우레처럼 울리고 비참한 구름과 처연한 서리가 변하여 따뜻한 봄이 될 것입니다. 다시는 예를 말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인정을 살피십시오. 만약 다시 금지시킨다면 시어머니와 며느리 두 사람이 한 노끈에 같이 목을 맬 것입니다. 어떻게 다시 예를 언급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일에 있어서 감히 흑백(黑白)을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급히 두 통의 편지를 쓰셔서 하나는 무(武 다산의 큰아들)에게 보내고 하나는 형수께 보내어 속히 완정(完定)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박석무 역 1986년 손암은 마음이 참담한 가운데에도 다산에게 답서를 썼다. 손암의 걱정은 오로지 학초로 인해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였다. 다산에게는 학연과 학유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학연에게는 학초가 죽기 두 달 전에 낳은 아들 대림(大林)이가 있었다. 손암은 다산에게 학연이 둘째 아들을 낳게 되면 학초에게 입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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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비즈니스 모델 이란 무엇인가?[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전주영 기자= 비즈니스 모델 이란 무엇인가?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어떻게 소비자에게 제공하고, 어떻게 마케팅하며,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 하는 계획 또는 아이디어, 즉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어떠한 방법으로 소비자에게 편리하게 제공할 것이며, 어떠한 마케팅방법을 이용해 얼마만큼의 돈을 벌어들이겠다는 일력의 계획을 비즈니스 모델 이라고 할 수 있다. 창업가들은 비즈니스 모델 설계에 시간을 너무 적게 쓴다. 제품, 가치제안 등 고객을 위한 가치 창출에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정착 가치를 수익으로 전환하는 방법은 소홀이 한다. 제품을 시장에 내놓는 데 집중하고 시장에서 유행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다. 비즈니스 모델의 혁신의 대표적인 사례가 구글이다. 구글이 등장하기 이전에 검색엔진은 한 페이지에 가능한 많은 배너광고를 싣고 가급적 높은 광고비를 부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글은 인터넷 사용자가 입력한 키워드에 따른 검색광고 방식을 채택했고, 광고주들은 방문자와 광고 실적 데이터에 근거해 효과적인 광고운영이 가능한 구글의 방식을 선호했다. 구글의 성공은 알고리즘의 기술적 우위가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의 혁신이라고 볼 수 있다. 비즈니스 모델을 결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핵심요소는 4가지로 볼 수 있다. ▲ 고객이다. 고객의 욕구와 의도를 알아야 한다. ▲ 가치창출과 획득이다. 고객이 어느 단계에서 얼마만큼의 가치를 얻는지 알아야 한다. ▲ 경경자이다. 경쟁자의 가치 창출과 획득방식을 알아야 한다. ▲ 유통이다. 최종고객에 이르는 유통 경로가 제품 판매에 적합하게 설계되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사업은 시장에 선보인 재화나 서비스에 누군가가 돈을 지불하는 날 시작된다. 사람들을 쉽게 끌어당기는 공짜는 고객 획득비용을 줄이는 전략의 일부로 채택 하고 있다. 고객이 제품에 돈을 지불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공짜 고객이 제품을 사용하는 동안 비용은 계속 발생하고 그 비용을 충당하려면 자금원, 즉 ‘실고객’이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비즈니스 모델은 다음과 같다. ▲ 요금 및 유지보수비 일시불 선지불 : 고객이 사용, 유지보수, 업그레이드 서비스를 포함한 모든 비용을 선불로 지급한다. ▲ 원가기준 : 고객에게 제품 생산 비용에 일정 비율을 더한 가격을 받는다. ▲ 투입시간 : 변화가능성이 클 때 선호한다. 서비스업에서 흔히 채택하며 비용이 아니라 시장 수요가 가격을 결정하는 주요 변수다. ▲ 사용료 : 일정 시간을 기준으로 비용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지속적인 매출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매력적인 모델이다. ▲ 기술이전 : 특허를 이전하고 사용료를 받는 모델로 높은 이익을 가져다 준다. ▲ 소모품이전 : 고객과 기업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모델이다. 고객은 낮은 초기비용과 사용량에 따라 비용을 지불 한다는 혜택을 얻는다. 기업은 신규 고객 획득 과정의 걸림돌을 제거해 판매비를 줄이고, 한 고객에게 발생 가능한 매출을 장기간에 걸쳐 극대화할 수 있다. ▲ 고수익 제품으로 업셀링 : 소모품에 의존하는 모델처럼 주요 제품의 이익률은 매우 낮지만 추가로 판매하는 고수익 제품으로 높은 총이익을 달성하는 모델이다. ▲ 광고 : 신문, 잡지, 웹사이트는 독자나 방문자에게 접근하고자 하는 제3자로부터 수입을 얻는다. ▲ 정보 제공 또는 한시적 접근 : 공짜 제품으로 사용자를 확보한 다음 사용자 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하고 수입을 얻는다. ▲ 거래 수수료 : 온라인 유통업은 판매로 이어지는 소개 고객에 대해 수수료를 받는다. ▲ 종량제 : 전기요금처럼 사용량에 따라 비용을 부과하는 모델이다. ▲ 정액요금제 : 사용량과 가격을 정한 후 반복적으로 부과하므로 예측 가능성이 큰 방식이다. ▲ 주차요금 또는 범칙금 : 신용카드회사, 주차 등 서비스업체들은 연체료로 돈을 벌고 있다. ▲ 소액결재 : 온라인 서비스산업인 게임, 소설 등에서 주목받고있는 성공 모델이다. ▲ 비용절감 공유 : 고객이 제품을 통해 비용을 절감하거나 혜택을 얻을 때만 비용을 지불하는 모델이다. 실행이 복잡해 좀처럼 도입하기 어렵다. ▲ 프랜차이즈 : 브랜드 인지도가 높은 제품의 효과적인 유통 채널로써 이 모델을 이용하고 있다. ▲ 유지보수 : 제품을 만들지 않고 공장이나 다른 시설물을 관리하는 대가로 사업을 영위하는 모델이다. 비즈니스 모델은 여러 모델을 혼합하거나 새로운 모델을 창조할 수 있다. 가능하면 여러 가지 대안을 실험하여 가장 효과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찾는 것이 좋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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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임대차 신고제 소개[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전주영 기자= 임대차 신고제가 2021년 6월 1일부터 시행이 되었으며, 2022년 5월 30일 계도기간을 가졌음에도 아직도 많은 분들이 모르는 임대차 신고제에 대해서 소개를 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정부의 임대차 계도기간은 일반 국민의 부담완화, 지자체의 행정여건 보장을 위해 2023년 5월까지 연장된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임대차 신고제가 생소할 수도 있는 제도이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잘 모르고 무시하고 있다가 수백만 원의 과태료 처분을 받을 수 있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제도의 기준금액은 현재 보증금 6000만 원 이상 또는 월차임 35만 원 이상일 경우는 무조건 대상이 되고 있으며, 기존에 매매를 위주로만 신고해야 하는 부동산 신고제에서 전ㆍ월세 분야를 포함시킴으로써 임차인의 권리보호를 위해 시행하고 있는 제도입니다. 절차와 처분만을 볼 경우 이 제도는 단편적으로 임대인에게 부담을 주고 임차인에게는 번거로움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볼 수 있지만, 현재 전체적 국지적으로 거래되는 임대차 시장의 실거래 정보를 투명하게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2의 주택임대차보호법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2023년 5월 30일까지 계도기간이 종료된 후 이 제도를 위반한 자(임대인)에게는 최대 100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되며, 일정 기간이 경과 된 후 위반사항을 반복할 경우 또 다시 부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민에게 상당한 기속력을 가진 제도라도 설명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임대차계약 신고제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현재 임대차계약 신고제의 시행을 위한 관련 법률은 '부동산거래신고 등에 관한 법률'(이하, ‘부동산신고법’이라 한다.)이며, 부동산신고법 제6조의2 제1항에 따라 주택임대차 계약 당사자(임대인과 임차인)가 임대차 계약 체결일로부터 30일 이내 임대기간, 임대료 등의 계약내용을 주택 소재지 관할 신고관청에 신고해야 하는 것으로, 특정된 바와 같이 상가임대차의 경우는 제외가 되는 사항입니다. 주택임대차의 경우 구체적으로 신고대상 주택이 궁금할 수도 있어 설명 드리겠습니다. 신고 대상이 되는 주택은 아파트, 다세대 등 ‘주택 외 준주택(고시원, 기숙사 등)’, ‘비주택(공장상가 내 주택, 판잣집 등)’ 등에 해당합니다. 임대차 계약체결 당시의 실제용도, 임대차 목적, 전체 건물과 임대차 목절물의 구조와 형태 등 구첵적인 상황 즉, 주거용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신고대상이 됩니다. 신고방법은 직접방문과 인터넷으로 신고가 가능하며, 신고는 임대인ㆍ임차인 공동신고와 임대인 또는 임차인 일방에 의한 단독신고로 구분이 됩니다. 실제 확정일자를 위해 방문한 한 임차인의 경우는 동 주민센터에 확정일자를 확정 받으러 갔다가 단독신고를 병행할 정도로 그 절차 또한 어려운 점이 없으며, 신고 시 필요사항은 확정일자를 받기 위해 가져가는 임대차 계약서만 필요하여 어려움 없이 단독신고를 하고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이점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임대차 신고제의 경우 임대인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겠지만, 누구든지 임차인 등이 사회적ㆍ경제적 약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볼 때는 현재에 매우 필요한 제도라고 평가를 받고 있으니, 혹시 제도의 미시행으로 고충이 발생되지 않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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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손암 정약전⑲ 총명했던 손암의 아들 ‘학초(學樵)’[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전주영 기자= 17세에 죽은 손암의 아들 손암 정약전은 해남 현감과 정5품 사간원 헌납(獻納),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를 지낸 김서구(金敍九, 1725~?)의 딸 풍산 김씨와 혼인하여 여러 번 아들을 낳았지만 모두 일찍 여의고 만년에 아들 학초(學樵, 1791~1807)를 얻어 극진히 사랑하였다. 다산 정약용이 쓴 여유당전서 다산시문집 제16권에 들어있는 ‘형님의 아들 학초(學樵)의 묘지명(墓誌銘)’에 기록되어 있는 학초에 대한 글을 보면, 학초의 자는 어옹(漁翁), 소명(小名)은 봉륙(封六)이었다. 어려서 말이 조금 서툴렀으나 7살이 되기 전에 이미 서사(書史)를 읽고 통달하여 일찍이 그 득실을 의논할 줄 알아 이를 보는 모든 이는 감탄하였고, 바둑을 신묘하게 알아내어 7~8세에 이미 어른들과 대국하여 모두 강적으로 여겼다. - 학초는 10세에 이르러 학업이 날로 진취하여 지구(知舊)들 사이에 이름이 드날렸다. 다만 천성이 경전(經典)을 좋아하여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를 읽을 적마다 그가 질문한 의의(擬議)는 갑자기 대답할 수 없는 것이 많았고, 반드시 그가 스스로 해석하는 것을 들은 뒤에야 사리에 합당하였다. 가경(嘉慶)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화가 일어나서 손암 선생은 신지도(薪知島)로 귀양 가고 나는 장기(長鬐)로 귀양 갔다. 겨울에 다시 잡혀왔다가 다시 살아나 중씨(仲氏)는 흑산도(黑山島)로 정배(定配)되고 나는 강진(康津)으로 정배되어 형제가 같은 길로 길을 뜨게 되었다. 학초는 땋은 머리로 화성(華城)의 남쪽 유천(柳川)의 점사(店舍)에서 전송하였는데 그때 나이 11세였다. 집에 번국(番國)이 소산인 사안주(蛇眼珠) 1매가 있었는데 곧 큰 구렁이의 눈동자였다. 대체로 이 구슬이 있는 곳에는 뱀ㆍ독사 따위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뱀ㆍ독사를 만날 경우에 곧 이 구슬로 비추면 뱀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죽어 마른 나무가 되어버리니, 기이한 보배였다. 학초가 울며 이 구슬을 바치면서, “흑산도는 초목이 무성하여 뱀ㆍ독사가 많으니 이 구슬로 스스로를 보호하소서.” 하니, 손암선생이 받아서 주머니에 넣는 한편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는 드디어 서로 헤어졌다. 내가 유락(流落)한 이래로 저술한 육경(六經)ㆍ사서(四書)에 관한 학설 2백 40권은 학초에게 전하려 하였더니 이제는 그만이로다. - 이정섭(역) 1985 위 글에는 손암과 늦은 나이에 얻은 그의 아들의 이별이 애절하게 그려져 있다. 손암이 흑산도로 귀양살이를 떠날 때, 학초는 열한 살이었다. 당시에 그의 집에는 중국에서 들여 온 큰 구렁이의 눈으로 만든 사안주라고 하는 구슬이 있었고 그 구슬이 뱀을 쫓는 대단한 효력이 있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것 같다. 다산은 어린 학초가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는 아버지께 유배지에 뱀이 많이 있을 것을 염려하며 그 사안주 구슬을 눈물로 손에 쥐어 드리는 애처로운 모습과 눈물겨운 생이별의 모습을 학초의 묘지명에 묘사했다. 조카의 총명함을 알아 본 다산 애절하게 작별한 아들은 7년 후에 장가를 간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고, 유배지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손암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헤아려 보지만 전해지는 바는 없다. 다산은 조카 학초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이 유배지에서 저술한 240권의 학설을 학초에게 전하려 했다는 것과 학초의 여러 가지 총명함에 대해 기술하였다. 다산에게는 두 아들 학연과 학유가 있었다. 큰 아들 학유는 초의선사를 아버지에게 소개하고 추사 김정희 등과 교우하며 문필을 드높이면서 다산의 유배 다음해부터 아버지의 유배가 억울하다는 상소를 다산이 해배 될 때까지 끊임없이 올린 인물이었다. 둘째 아들 학유는 현재에도 조선시대의 인문학자로 분류될 정도로 많은 문헌을 남기고 있다. 특히 시경에 나오는 모든 생물의 이름을 고증하여 해설한 생물백과사전인 ‘시명다식(詩名多識)’이라는 책과 ‘농가월령가’를 저술했다. 두 아들은 모두 유배 중인 아버지의 학문을 도왔던 뛰어난 학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두 아들이 있음에도 다산 정약용은 형님 손암 정약전의 아들 학초에게 자신의 새로운 학설을 전수코자 했다. 이는 숙부 다산이 알아 본 학초의 뛰어난 재주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 학초는 건륭 신해년(1791, 정조 15) 봄 2월 초 10일에 태어나서 가경 정묘년(1807, 순조 7)가을 7월 19일에 죽으니 그 수가 겨우 17세이다. 파평 윤씨(坡平尹氏)에게 장가드니, 상국(相國) 개(漑)의 후예이다. 광주(廣州) 초부(草阜)의 북쪽, 조곡(鳥谷)의 기슭, 두전(豆田)의 곁에 장사지내니, 그 무덤은 해좌(亥坐)인 듯하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명이 짧아 일찍 죽으니 / 好學而短命死 하늘이 나를 자르고 하늘이 나를 망치었도다 / 天祝予天喪予 세상의 추향(趨向)은 날로 비하되고 / 世趨日以汚 선성의 도는 묵었도다 / 先聖道榛蕪 아! 재주없는 사람은 주색에 빠지고 / 噫下焉者酒淫 재주있는 사람은 날카롭기만 하니 / 上焉者尖碎 슬프다! 뉘라서 내 글 읽을 수 있으랴 / 而誰能讀吾之書噫 - 이정섭(역) 1985 손암은 유배 중에 고향 두물머리(지금의 경기도 남양주 마재)에 두고 온 아들의 부음을 들었다. 실로 통탄할 일이었다. 흑산도에서 살아가는 동안 사랑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절망과 좌절 속에서 그 외로움과 깊은 슬픔이 얼마나 컸을지 우리는 느낌으로만 추측 할 뿐이다. 손암은 당당한 풍채와 준걸한 풍모를 가졌고, 대단히 과묵하고 아주 다감한 사람이었다. 손암 정약전은 유배생활에서의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고 억울함을 항변하는 글을 단 한편도 남기지 않았다. 자신이 지은 서재의 이름인 ‘매심재(每心齋)’의 ‘매심’처럼 자기만의 방법으로 뉘우침의 삶을 살다 간 것이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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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창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윤길 기자= 창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1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이 개발된 후 기차, 배 등 기계의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2차 산업혁명은 전기가 등장함에 따라 전기자동화로 확산되었다. 3차 산업혁명은 컴퓨터와 인터넷기술이 등장하여 글로벌 온라인시장으로 확대 되었다.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과 새로운 기술이 융합되어 확산되고 있다. 현재는 메타버스, 암호화폐, 인공지능, 로봇, 스마트산업 등 기술이 융합되어 혁신제품과 서비스가 많아 나오고 있다.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고 기회를 별견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먼저 사용을 해보고 시장에서 기회를 찾아야 한다. 전자지갑을 만들어 암호화폐를 사용해 보기도 하고, 주식계좌도 개설하여 관심을 두고 있는 기업의 주식도 구매해 봐야 한다.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고 내 일이 아니다 라고 하면 다른 사람보다 더 성장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또한, 금융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은행에 돈을 맡길 때도 달러계좌를 개설하여 달러를 사 보기도 하고 팔기도 해 보아야 한다. 금을 거래할 수 있는 계좌도 만들어 금저축을 해 보아야 한다. 해 보지 않은 사람보다는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진다. 이제는 융합의 시대이므로 변화되는 시대에 적응하여 살아 남아야 한다. 과거에 하던 것처럼 그냥 하던일 만 하면 경쟁에서 살아 남기가 어려울 수 있다. 아주 고액의 연봉자가 아니라면 직장인들은 직장을 마치고 나면 저녁에는 다른 일을 시도해 봐야 한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축적되어야 한다. 인간은 서로 돕기도 하지만 피해를 주기도 한다. 기업이나 개인이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실패경험이나 작은 성공경험이 쌓여야한다. 처음부터 큰 성공을 이룬 사람은 없다. 창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수조건으로 사업에 필요한 다양한 경험을 해 보아야 한다. 경험은 책으로는 간접경험밖에 쌓을 수 없으므로 직접 사업에 필요한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이 주식으로 성공했다는 말을 듣고, 비트코인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는 말을 듣고, 창업에 성공해서 투자를 많이 받았다는 말을 듣고 창업을 해서는 안 된다. 성공한 사람은 많은 실패와 좌절을 이겨내고 성공했을 것이다. 특히, 대학생이라면 학교 다닐 때 다양한 경험이 꼭 필요하다. 수업을 받고 학점을 잘 받는 것은 기본이라고 볼 수 있다. 아르바이트를 해 보기도 하고, 주식을 사 보기하고, 전자기갑을 만들어 암호화폐를 거래해 보기도 하고, 창업동아리를 만들어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 보기도 하는 등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다양한 경험을 해보아야 한다. 다양한 경험이 쌓이면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역량이 생기게 되고 창업을 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도 알 수 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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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소멸 위기의 제주해녀: 지속가능성 및 보존에 대한 딜레마[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윤길 기자= 제주해녀 정책토론회 국회 의원회관에서 지난 9월 14일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제주해녀의 삶을 통한 위대한 꿈을 품다' 라는 주제로 제주도 국회의원 위성곤, 송재호, 김한규 의원 3인과, 제주도의회 박호형 의원, 이승아 의원 주관의 정책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이번 토론회는 지난 2016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제주해녀문화의 세계식량농업기구(FAO) 세계중요농어업유산(GIAHS) 등재를 위한 과제를 점검하고, 제주 해녀 문화를 인류의 지속가능 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1부 토론회에서는 제주특별자치도의회 박호형 의원이 좌장을 맡아 류정곤 한국수산회 수산정책연구소장의 ‘제주해녀 세계중요농어업유산 등재와 과제’, 김순자 제주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장의 ‘제주해녀 세계 중요 농ㆍ어업유산 보전 및 활용’ 으로 주제발표가 이어졌다. 주제발표 후에는 김영자 제주해녀협회장, 최종욱 해수부 어촌어항과장, 고종석 제주특별자치도 해양수산국장, 고 미 제민일보 선임기자의 지정토론이 이어지면서 열기를 띄었다. 이승아 의원이 좌장을 맡은 2부 토론회에서는 유철인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의 ‘제주해녀문화의 가치 재활성화’, 양종훈 상명대학교 교수의 ‘해녀의 위대함과 지속 가능 방안’ 으로 주제발표가 이어졌다. 주제발표 후에는 이재필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장, 고희송 제주문화예술재단 팀장, 필자 (김태관 제주대학교 겸임교수), 송정희 제주국제화센터 대표의 지정토론이 열렸다. 제주해녀: 강인함의 상징 제주의 아마존 여성 ‘저승에서 벌어서 이승에서 쓴다’ 이 구절은 제주해녀의 이야기이다. 저승만큼이나 위험하고 무서운 바다에서 해산물을 캐어서 이승에서 가족을 부양한다는 의미이다. 제주해녀는 지역 경제를 책임지는 강인한 여성의 상징이고 제주의 어머니나 마찬가지이다. 유네스코는 오랜 세월 이어 온 제주해녀문화의 가치와 보전의 필요성을 인정해 지난 2016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해녀는 기계 장치 없이 맨몸으로 바닷속 10m까지 들어가 전복, 성게, 소라 등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제주의 여성이다. 한 번 잠수 할때 약 1분간 숨을 참으며, 하루에 4~5시간, 1년에 약 90일 정도 물질을 합니다. 물속에 들어갈 때에는 추위를 막아주는 잠수복(고무옷)에 오리발, 모자, 물안경, 장갑 그리고 깊이 잠수할 수 있게 돕는 납덩어리를 착용한다. 문제는 현직 해녀의 수도 급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5년 4,377명이던 해녀는 2021년 3,437명으로 940명이나 줄었다. 매년 평균 150명씩 감소하면서 불과 6년 만에 21%가 줄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 해녀는 1만 4,000명을 넘었다. 하지만 경제 성장과 도시화, 고된 일을 기피하는 사회적 분위기 등이 맞물리며 현재는 76%까지 감소했다. 제주해녀 소멸 및 제주정신 제주해녀문화는 공동체와 상호부조와 협력이 핵심이고 문화예술이 추구하는 가치와 흡사하다. 이것은 문화예술이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인 공동체(나눔=쉐어링), 화합(하모니)과 협력(콜라보레이션)과 같다. 필자는 토론회에서 제주해녀문화의 현안이자 과제인 소멸에 대한 대응과 활성화 방안 및 에 대하여 세계중요농ㆍ어업유산 등재 등의 내용을 문화예술 행정경영 전문가의 시선에서 조명해 보았다. 최근 제주에서는 해녀와 관련된 이벤트가 많아지면서 제주의 역사와 문화예술 등과 접목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특히, 실내공연장에서의 해녀 노래, 실외공연장에서의 해녀상설공연 등이 이루어지면서, 단순 해녀를 조명하는 분야에서 이제는 해녀를 소재로하여 다양한 음악이 만들어지고 뮤지컬, 연극, 심지어 오페라에까지 소개되고 있다. 또한 공연예술에만 그치지 않고 그림, 사진 등의 전시예술의 분야에서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필자의 제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젊은 해녀 부족의 과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방안이 행정적으로 제도화되어야 한다. 둘째, 도민과 국민 공감대 형성을 위한 전국지역에서의 다양한 공연, 전시 예술이 다양한 장소에서 이루어져서 국민공감대를 형성해야한다. 언젠가 세계식량농업기구가 있는 이태리 로마에서 공연장의 로비에서는 해녀 전시회가 열리고 공연장에서는 해녀 오페라가 울려 퍼지기를 고대합니다. 이태리는 세계 오페라의 본고장이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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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청년지원사업 소개[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윤길 기자= 1996년부터 현재까지 약 25년 간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서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던 우리나라도 최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2022년 7월 2일 스위스 제네바 본부에서 열린 제68차 무역개발이사회에서 195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한국의 지위를 기존 ‘개발도상국 그룹’ 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을 했습니다. 당연히 필자도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지위가 변경된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고 있으며, 선진국의 지위도 정치 및 경제적 분야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야 이러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 대해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청년이 곳 미래의 원동력이라는 점에서 대해서 우리나라에는 청년복지 정책 중 무주택 청년 주거지원 사업에 대해서 소개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주택이 없는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들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광의적으로는 중앙정부(국토교통부)에서 하는 사업과 지방자치 단체에서 진행하는 사업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세부적으로 중앙정부에서 하는 사업은 산하기관인 주택토지공사와 진행하는 행복주택, 청년 전세임대, 주거안정 월세대출, 공공기숙사, 보호종료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으로 세부 분류되며, 지방자치 단체에서 하는 사업으로 무주택 청년월세지원(보증금) 사업이 있습니다. 예산의 규모에 비해 지방자치단체의 사업이 매우 작은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무주택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 중 지방자치단체 사업은 일정조건 및 서류만 구비할 경우 지원일 중앙정부지원사업보다 훨씬 수월하니 이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중앙정부의 행복주택사업은 최장 30년 임대를 기준으로 60㎡이하의 주택을 임대받을 수 있는 사업이며, 실제 서울지역 임대 시세보다 60%~ 80%수준으로 임대료가 책정되어 있어 청년부담을 줄이는 사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앙정부의 두 번째 사업인 청년전세 임대사업은 지원신청한 청년대상자 중 선정된 자에게 행복주택 규모와 동일한 60㎡이하에 주택에만 계약하는 방식으로 해당 제도는 2회 연장을 포함하여 6년까지 거주 할 수 있으며, 금액 제한으로 예를 들어 보증금 1억 5천만 원 중 3천만 원만 선정자가 내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사업입니다. 그 외 사항은 국토교통부 홈페이지를 통해 참고 할 수 있으니 이점은 참고하시고, 지방자치단체의 무주택 청년월세지원 사업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지방자치단체 무주택청년 월세지원 사업은 지방자치 단체별로 약간은 상이하나 대출 대상은 만19세 이상에서 만39세 이하의 무주택 세대주를 대상으로 하며, 본인의 연소득이 4천만 원을 초과하지 않으면서, 부부합산 연소득이 5천만 원 이하 인 경우만 해당됩니다. 대출금액은 최대 7천만 원까지 지원하며, 대출금리 시중은행 금리보다 훨씬 낮은 연 2.39% 정도로 이 중 50%는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하는 것으로 거의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가 시행을 하고 있습니다. 대출기간이 문제일 경우도 있고 기본적으로 6개월 이상 2년 이내 이지만, 임대차 계약이 존속될 경우 8년까지 연장이 가능합니다. 단서조항으로 만39세가 넘는 경우는 대출제한이 되오니 이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신청서류는 어렵지 않으며, 주민등록등본, 가족관계증명서, 본인과 배우자의 전년도 소득금액 증명원, 임대차계약서(확정일자 포함)를 구비하여 지방자체단체 신청하시면 지방자치 단체에서는 이 서류에 지방자치단체 추천서를 포함시켜 줄 겁니다. 구비된 서류를 가지고 지방자치단체 무주택청년 월세지원 협업 은행에 가셔서 제출하시면 심사 후 조기에 보증금이 지원 될 것입니다. 한가지 유의사항으로 무주택청년 월세지원금은 금융 대출방식의 하나로 임차임 미지급으로 보증금 차감시 부족금액 및 상환하지 못하는 금액은 그 대출을 받은 신청자의 채무로 귀속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 참고하시고 신청하시면 될 것입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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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손암 정약전⑱ '유클리드의 원론' 과 ‘기하원본 (幾何原本)’[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윤길 기자= 손암 정약전이 심취했던 기하원본 (幾何原本)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과학자로 인정받는 손암 정약전1758~1816)은 남인 실학파의 중심인물로서, 성호 (星湖) 이익 (李瀷, 1681~1763) 이 형성한 성호학파의 거유였던 녹암 (鹿庵) 권철신 (權哲身, 1736~1801) 을 스승으로 모시고 조선에서 천주교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다양한 서양학문을 접하고 있었다. 손암은 특히 수학에 큰 관심을 보여 ‘기하원본 (幾何原本)’ 을 이해하고 깊이 연구하였다. 다산 정약용의 다산시문집 (茶山詩文集) 제15권에 수록된 ‘선중씨(先仲氏)의 묘지명 (墓誌銘)’ 에 보면 “돌아가신 둘째 형님 (손암 정약전) 께서는 계묘년 가을에 경의 (經義) 로 진사가 되었으나 대과 (大科) 에 뜻을 두지 않고, 일찍이 학식과 덕행이 높았던 이벽 (李檗, 1754~1785)을 좇아 함께 지내며 역수 (曆數) 의 설을 듣고는 기하 (幾何) 의 근본을 연구하고 심오한 이치를 분석하였다”고 하는 중요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손암은 1783년 (정조7년) 에 생원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기하학과 서학에 깊이 빠져서 과거에는 관심이 없다가 과거를 통하지 않고는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는 경술년 여름, 나중에 순조가 되는 왕자의 탄생으로 특별시 행해진 증광별시 (增廣別試) 에 대책 (大策) 을 지어 응시하여 1등으로 급제하였다. 기하원본은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 利瑪竇, 1522∼1610) 가 번역한 ‘유클리드의 원론’을 중국 명나라 말기의 학자 서광계 (徐光啓, 1562~1633) 가 편찬한 책이다. 기하원본의 초판은 1607년(만력 35) 북경에서 6권으로 간행되었다. 번역 대본은 마테오 리치가 로마에서 수학할 때의 스승이요 저명한 수학자였던 클라비우스 (Clavius, 1537∼1612) 가 편찬한 라틴어본 (本) 유클리드 기하학이었다. 유클리드의 원론 유클리드의 원론은 지금으로부터 약 2300여 년 전에 그리이스의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수학자 유클리드 (Euclid, B.C. 330 ~ B.C. 275) 가 정리한 책으로 그 이전부터 여러 수학자들에 의해 전해져 왔으나 모든 수학에 대한 원론과 기하학적 사실들을 알렉산드리아의 유클리드가 체계적으로 가장 잘 정리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하학의 교과서’로 불릴 정도로 유명한 책이 되어 유클리드의 원론으로 부르고 있다. 유클리드의 원론은 인류가 오랜 세월동안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는 수학의 초석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배우는 수학에 있어서 지금까지도 모든 내용이 초·중·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다루는 수 (數) 와 도형 영역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유클리드의 원론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으로 천년이 넘도록 손으로 옮겨 적어서 읽어 오다가 1482년에 이르러서야 인쇄술을 이용한 책의 형태로 발행하게 되었다. 유클리드의 원론은 1482년에 출판된 이후에도 1000번 이상을 찍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클리드의 원론은 모두 13권으로 저술하였는데, 마테오 리치는 그중 핵심 부분 6권을 번역하여 ‘기하원본’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후로 기하학 (幾何學) 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이 책은 1607년 ‘기하원본’이라는 이름으로 초간된 이래 여러 차례 중간되면서 중국 기하학의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629년에 이지조 (李之藻, 1565~1630) 가 편찬한 ‘천학초함 (天學初函)’ 과 1787년(건륭 46) 에 완성된 ‘사고전서 (四庫全書)’ 에도 수록되었다. 청나라의 강희제 (姜熙帝, 1654~1722) 는 이를 만주어로 번역하도록 하여 1865년 (동치4년) 에는 증국번 (曾國藩, 1811~1872) 이 이를 남경에서 간행하였다. 책의 내용은 제1권 삼각형, 제2권 선, 제3권 원, 제4권 원의 내외형 (內外形제), 제5권 비례, 제6권 선면 (線面) 의 비례 등으로 되어 있는데, 각 권마다 먼저 계설 (界說, 즉 定理) 과 공론 (公論, 즉 公理) 를 제시한 뒤 설제 (設題, 해설) 에서 그 내용을 풀이하는 순서로 되어 있다. 전체의 계설은 80칙, 공론은 19론, 설계는 182제이다. 다음은 다산의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 에 실려 있는 논설 (論說) “도량형의 (度量衡議)”에 대하여 손암이 1812년경에 다산에게 보낸 논평 내용 중 일부이다. - 자네의 ‘도량형의’를 보니, 16냥 (兩) 으로 1근 (斤) 을 만든 것은 주역의 사상 (四象) 과 팔괘(八卦) 의 제곱하는 법에서 나왔으나 아무래도 타당치 않은 것 같다. 요컨대 상고시대 (上古時代) 의 법도 아니요, 그 말의 됨됨이가 점술가의 괘를 구하는 법에 불과하니 어찌 수학 (數學) 의 종주로 받들겠는가. 주례의 주를 살펴보니 구장산술의 계산법과 주비산경 (周髀算經, 고대 중국의 천문수학서), 직각삼각형의 법은 세상에서 기하학자들이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스스로 수학이라고 하는 것은 ‘기하원본 (幾何原本)’ 의 기하원본이다. 수학에는 두 가지 법이 있으니 하나는 십진법이요 또 하나는 늘 일배를 더하는 것이다. 16냥으로 1근을 만든 것은 다만 1배를 더하는 법이라면 맞겠으나 사상과 팔괘에 근본하여 일컫는다면 허황한 것이니 어떻게 생각하는가 - 기하원본은 성호 이익과 손암 정약전이 일찍부터 이를 접하고 그 내용에 대해 연구와 토론을 진행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북학파의 홍대용 (洪大容 1731~1783)이나 당시의 실학자들의 행적이나 저술에서로 볼 때 이 책을 보았을 것으로 추측은 되지만 깊이 있는 연구나 이해에 대한 흔적은 나온 바가 없다. 1784년 이후에는 이승훈 (李承薰) 이 북경 선교사들로부터 다시 이를 얻어 와 널리 전해졌다. 현재 3권 2책의 필사본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