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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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북한 땅 금강산 삼일포에 심은 감나무[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가을은 감과 함께 온다. 나는 해마다 지금은 갈 수 없는 금강산 삼일포 협동농장이 궁금해진다. “사름율을 높여야디요.” 구덩이 감나무 뿌리에 흙을 덮고 다지며 심각하게 말하던 삼일포협동농장의 지도위원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남쪽에서 가져간 천 그루 대봉 감나무의 '사름률'은 지금 몇 프로일까? 밥그릇만한 대봉감이 주렁주렁 열려 그 지도위원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을까? 2007년은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였다. 그해 4월 23일 각도별 대표조합장들과 직원들 160여명은 북으로 향했다. 금강산 온정리 삼일포 협동농장에 감나무를 심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남북교류가 활발해서 금강산 관광과 남북협력 사업도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북한 땅에 발을 딛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반공웅변 대회에 나가 공산당을 때려잡자고 열변을 토하던 학창 시절의 기억을 생각하며 휴전선을 넘었다. 그러나 군사분계선을 넘자마자 북한에 왔다는 실감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 준 것은 총을 들고 검문하던 군인보다도 오히려 산이었다. 휴전선을 향해 달려오던 내내 차창 밖으로 빽빽하던 나무가 순식간에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북한의 민둥산이 준 충격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작은 웅성거림과 함께 간 일행들은 창에 바짝 얼굴을 대고 손으로 산을 가리키며 한숨같은 탄성을 질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말로만 듣던 북한의 산림 실태가 온몸으로 실감이 났다. 산꼭대기 아래까지 화전민들이 일군 뙤기밭 소토지와 다락밭 비탈밭을 농지로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배고픈 사람들은 산 위 높은 곳까지 불을 질러 화전을 일궈 감자와 옥수수를 심었다. 게다가 아직도 나무를 땔감으로 쓰기 때문에 동네 주위 산들은 푸른빛이 없는 붉은 산으로 헐벗고 있었다. “나무가 채 성장하기도 전에 땔감으로 써버리기 때문에 나무가 남아나지 않습니다. 북한에서 산이 푸른 곳은 김일성 주석이 '민족의 명산'이라며 교시를 내린 금강산과 보호구역뿐입니다. 앞으로는 나무, 식량, 에너지 관련 부서가 같이 협력해 지원해야 해요. 북한도 경제발전하려면 우리와 마찬가지로 '녹색인프라'와 '경제인프라'를 같이 해야 하는 거죠.”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60년대는 남쪽인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동네 사람들도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팔아서 먹고 사는 이들이 여럿이었다. 시골까지 연탄이 쉽게 들어오면서 지게지고 산에 나무하러 가는 일이 점차 사라졌다. 강원도 무연탄이 철도를 타고 전국으로 공급되지 않았다면 민둥산을 오늘날처럼 푸른 산으로 바꾸는데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뭇가지 하나도 꺽지 마라는 자연보호 표어와 포스터를 부지런히 그리던 추억도 남아있다. 황폐한 북녘의 산림을 바라보며 묘목과 비료를 지원할 필요성을 몸으로 느꼈다. 무엇보다 북녘땅에 나무를 심는 일은 바로 우리의 정성과 애정을 심는 일이자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북한의 홍수는 곧바로 남한에 타격을 준다. 북한의 생태계가 파괴되면 그 피해가 즉각 남쪽으로 연결된다. 북한의 헐벗은 임야를 복구함으로써 방치된 산지를 자원화하고 홍수조절 공기정화 등의 다양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금강산 관광객들이 북한에 나무 한 그루 헌수하기 운동에 나서고 산림청 후원을 받아 민간단체들이 적극 동참한다면 북한 나무심기 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통일운동보다 나무 심기는 남북을 하나로 만드는 데 큰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분단 50년이 넘었지만 우리는 통역없이 대화를 하며 천 그루의 감나무를 힘을 합해 심었다.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감나무 밭고랑에 배추도 심고 무도 심어 김장도 하며 주렁주렁 감들이 열리기를 기도하며 심었다. 달디달게 익어갈 감처럼 남북관계가 따뜻하게 발전되고 남북이 서로 가진 것으로 돕게 되길 희망하며 통일의 꿈을 담은 감나무를 심었다. '사름률'을 높여야디요. 이래 심었는데 죽으면 어이 되겠음메?” 처음에 나는 사름률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시름률은 북한말로 ‘산에 심은 나무가 사는 비율’을 뜻하는 말이었다. 우리가 말하는 '활착률'과 같은 말이다. 북한은 기술과 물자가 부족해 닥풀 우림액을 개발해서 묘목 뿌리를 담갔다 심는다고 했다. 북한도 나무 살리기에 최선의 공력을 쏟고 있었다. 나무를 심고 돌아오는 길 나는 북한과 우리가 나무를 통해 서로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금은 비록 남북이 오고 가지 못해도 감나무는 잘 자라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다시 휴전선 너머 삼일포 농장에서 그 지도위원을 다시 만날 때는 그 달콤한 홍시를 쪼개 서로 권하며 사름율을 기뻐하리라. 6.25와 그 이후의 비극과 분단의 휴전선 너머 금강산 밑자락에 과실나무가 열매를 맺기를 그리고 서로 부족한 점을 도우며 한민족으로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나무를 심고 싶다. 우리 정읍시민들도 다 함께 북한에 희망의 나무를 심는 날이 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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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장애인 등록절차 소개[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나와 다르다고 하여 한 쪽으로 치우친 의견이나 견해를 가지는 태도가 편견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편견을 가지게 되면 부정적인 정서와 평가를 동반한다고 학자들은 판단합니다. 최근 메스컴을 통해서도 정치적 이념이 다르다고 하여 특정된 상대집단에 대해 끌어내리기식 언론보도가 계속되는 것도 편견에 따른 일이라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편견을 가지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가 장애인에 대한 인식입니다. 필자가 한 때 고국을 떠나 타향인 미국에서 유학을 짧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을 떠나기전부터 친구로 지내던 미국인 친구와 같이 유학 중 인근 소도시를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인근 소도시로 가기위해 버스정류장에서 보이지 않던 줄을 선 상태(미국은 한국처럼 나란히 줄을 서는 문화가 아니며, 기다리는 순서에 따라 정류장과 거리별로 배회하는 문화)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중 휠체어를 타고 오시는 노인분이 담당하게 정류장앞으로 가시것을 보고 의문이 든 저는 현지친구에게 “왜 저분은 양해를 구하시지 않고, 맨앞으로 가시냐?”고 질문을 하였지만, 돌아오는 답변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현지 친구의 답변은 “저분은 그럴만한 대우를 받으셔야하고, 우리처럼 비장애인과 같이 처음부터 같이 출발하기 위해서는 어렵지 않겠냐? 저분이 타시고 우리는 늦게 타야만 버스가 출발할 것이다.”라고 답변을 하였습니다. 필자 또한 말로는 형평성을 주장하였지만, 실제 타국에서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구분하는 문화가 없다는 현실에 다시 한 번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출발점이 다르지 않다는 문화를 기초로 한국에서도 많은 정책과 지침을 실현하고 있으며, 오늘 소개할 내용은 쉽다면 쉽다고 할 수 있고, 어렵다면 어렵다고 할 수 있는 장애인 등록 신청에 대해 소개를 하겠습니다. 먼저 장애인 등록을 신청하여 복지해택을 받으시려면 장애인 구분표(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령 별표 2)에 따라 자신의 장애가 어느 부분에 해당한는지를 확인하시고, 진행하셔야 합니다. 통상적으로 병원 진료 시 자신의 장애가 어느 부분인지를 확인할 수 있으며, 특정된 장애에 따라 장애인 등록 절차를 진행하시는게 합당합니다. 병원 진단서에 장애로 특정되지 않았음에도 진행하셔서 반려가 되는 경우가 많아 병원의 진단서를 기준으로 판단하는게 좋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병원에서 장애진단을 받은 경우 ①관할소재지의 읍ㆍ면ㆍ동사무소를 방문하셔서 장애인 등록 상담 및 구비서률 안내 받은 후 ②진단서를 제외한 구비서류를 진단병원에서 청구 발급 ③병원에서 발급된 구비서류를 충족하여 다시 관할 읍ㆍ면ㆍ동사무소 접수 ④국민연금공단 장애등급심사 요청, ⑤장애심사 결과 수신, ⑥심사결과에 따라 관할 읍ㆍ면ㆍ동사무소 장애인 등록, ⑦장애인 등록 통지, ⑧관할 읍ㆍ면ㆍ동사무소에서 추가민원 상담 및 사후관리 등 순으로 진행됩니다. 여기서 장애인 등록 신청자는 본인 또는 법정대리인(보호자 포함)이 업무를 대행할 수 있으며, 기타 법률에 의해 업무를 대행할 수 있는 변호사, 행정사도 가능하오니 이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상기의 전체 절차 중 장애인 등급 신청자가 직접 해야 하는 일은 ①내지 ③까지의 사항으로 구비서류를 충족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판단됩니다. 가끔 장애진단을 받고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고 찾아오셔서 도움을 받는 분들이 있지만, 자신의 장애는 자신만이 잘 아는 사항으로 결국은 자신의 의사와 행동에 따라 장애인 등록 신청이 가능하므로, 가까운 변호사 또는 행정사를 찾아 상담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부 병원에서는 장애 진단자를 발급 대상자를 상대로 제2의 영업을 하여 장애인에게 제2차의 피해를 주고 있는 것으로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해당업무를 대리 및 대행할 수 있는 적법한 자를 찾아가시는 것을 추천 드리고 싶습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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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손암 정약전⑦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에 헌정[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조선 실학자 손암 정약전은 ‘2012년도 과학기술인명예의전당 헌정자’로 최종 선정되어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바 있다.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은 어떤 건물이나 시설물이 아니라 2008년에 이전하여 개관한 국립 과천 과학관 내에 설치되어 있는 제도적 전당이다. 과학기술인들의 업적과 정신을 계속 이어 나가자는 차원에서 그들의 발자취를 소개하고 이것을 항구적으로 전시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2003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과 미래창조과학부에서는 조선시대의 과학자 이순지(1406~1465), 최무선(1325~1395), 이 천(1376~1451) 등 14인의 과학기술인을 선정한 이후로 매년 1~4인씩 탁월한 과학 기술 업적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훌륭한 인품을 갖춘 인물을 선정하여 명예의 전당에 헌정하여 왔다. 2017년부터는 제도를 개선하여 2015년에 세계 최초로 독립 법안으로 제정된 ‘과학기술 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과학기술 유공자 지원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이 제도는 국가 과학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이 큰 과학기술인을 ‘과학기술 유공자’로 지정해 우수한 과학인들이 자긍심을 갖고 연구에 몰입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 과학기술인의 명예와 긍지를 높이고 과학기술인이 존중받는 문화를 조성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자격루를 개발한 조선시대의 대표적 기계기술자 장영실, 15세기 전반 우리 과학기술을 세계최고 수준으로 발전시킨 세종대왕, 한의학의 전통을 우뚝 세운 의학자 허 준, 전통 지도학을 집대성한 조선후기 지리학자 김정호, 세계 정상급의 소립자 이론물리학자 이휘소 등에 이어 29번째로 우리나라 수산학 및 해양생물학을 창도한 정약전이 과학기술인으로 선정되었다. 당시에 명예의 전당 헌정 대상자 공적심사에서는 자산어보가 탁월한 과학사적 성과로 우리나라 해양 생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보았다. 국내 최초의 수산학 서적으로 한반도 남서해안 흑산도 근해의 각종 수산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각 종류의 명칭, 분포, 형태, 습성 및 그 활용법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조선 후기 실용성을 지닌 실학 고전 중 탁월한 자연과학 업적이며 현재에도 수산 자원과 해양 생태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수산물 관련 고전 백과사전으로 평가하였다. 손암은 우리나라 최초로 해양생물학을 태동 시킨 대학자이다. 대표적 저술인 '자산어보'는 흑산도 근해에 서식하는 해양생물들을 비늘이 있는 고기(인류 鱗類), 비늘이 없는 고기(무인류 無鱗類), 겉이 딱딱한 고기(개류 介類), 기타의 고기(잡류 雜類)로 분류하여 설명과 함께 기록해 나간 체계적 저작이다. 어류를 총망라 하여 55류 226종의 어족을 자세히 분류했고, 바다에 사는 벌레(해충海蟲), 고래나 물개(해수海獸), 바다말(해초海草)과 바다 새(해금海禽)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으로 삼았다. 어보의 형식으로 쓰인 책 중에 1803년에 담정(藫庭) 김 려(金鑢 1766~1822)가 지은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가 있으나 이 책은 우해(지금의 진해) 근해의 55종의 어류를 포함한 70여종의 어패류와 39수의 시문을 기준 없이 나열식으로 기록하여 학문적 백과사전으로 볼 수가 없다. 자산어보 연구의 권위자인 임원경제연구소장 정명현 박사는 자산어보의 특징에 대해 “첫째, 수산학 및 해양생물학의 새로운 분류방식 창안이다. 손암은 해양 어족 분류 체계를 상위 범주와 하위 범주로 나누어 이들의 유관성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하였다. 생물 종(種)의 이름에 독특한 명칭을 부여하여 어떤 류(類)에 속하는지 명료하게 보여 주었다. 둘째, 체계적인 분류를 위해 이름이 없는 생물이나 이름을 수정해야 하는 생물에 대해 창명(創名 작명)을 시도했다. 전체 226종 중 반이 넘는 131종의 고기에 이름을 붙였다. 창명은 이름만 알려지던 어족뿐 아니라 잘 알려진 어족에도 새로운 지식을 추가할 수 있었다. 창명은 해양생물 지식을 학문적 차원으로 체계화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고 정리하였다. 특히 이 창명 작업에 대해 정명현 박사는 이명법(二名法)의 제창자 칼 폰 린네(1707~1778)에 비견될 만한 시도였다고 판단했다. 린네는 약 4,000종의 동물과 5,000종의 식물의 속명(屬名) 다음에 종명(種名) 형용사를 붙여서 두 말로 된 라틴어 학명 이명법을 확립한 스웨덴의 식물학자이다. 인류에 대해 호모 사피엔스라는 라틴어 이름을 고안한 사람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꽃들을 분류하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체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린네 덕분이다. 그는 생물의 종과 속을 정의하는 원리를 만들었으며, 생물의 이름을 붙일 때 필요한 일정한 체계를 만들었다. 실학자 정약전은 천주학을 신봉했다는 죄목으로 흑산도에 유배되어 고통의 나날을 보내면서도 양반 중심의 신분 계급사회를 뛰어 넘는 평등사상을 실천하며 살았다. 그리고 희망을 잃지 않고 '자산어보'를 비롯한 소중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과학에 대한 탐구정신을 불태우며 살다가 쓸쓸히 죽어간 손암 정약전이 2012년에 이르러 늦게나마 과학기술인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정 되면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게 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계속해서 그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평가가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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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전통과 모던의 창의적 콜라보 '제주도립무용단'[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제주도립무용단 기획공연 P.A.D.O 여름의 끝자락인 지난달 8월 21일 제주도문예회관에서는 제주도립무용단의 기획공연이 개최되었다. 지난 6월에 이은 두 번째 공연으로 ‘P.A.D.O(Play Art Dance On)’ 라는 타이틀로 무용단 단원 4인이 직접 안무를 맡고 김혜림 예술감독이 총연출로 진행되었다. 지난 6월에 있었던 공연이 전통과 제주문화콘텐츠 중심의 무대였다면 이번 8월 공연은 전통과 현대, 제주와 그 이상의 콜라보로 전통속에 모던함이 묻어 나온 공연이었다. 물론, 단원이 안무를 하였기에 전문 안무자의 연출보다는 모자람이 있었으나, 무대 위 단원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의 시선으로 기획된 프로젝트로 그 의미가 남달랐다. 제주도립무용단의 P.A.D.O 기획공연은 1990년 제주도립무용단 창단 이래 최초로 단원을 무용수로만 머무는 걸 넘어 예비 안무가로 성장시키고자 기획된 매우 의미있는 기획 프로젝트이다. 6월 공연에는 김혜령, 이승현, 김제인, 현혜연이 참여하였고, 8월 공연에는 강현정, 김화영, 남기홍, 고범성이 참여하면서 단원이기도 하면서 안무자의 시선으로 만들어 낸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제주의 무용현안 및 과제 제주도립무용단은 1990년에 창단되어 지난해 창단 30주년을 맞으며 전ㆍ현직 안무자들이 독무와 군무 및 연출무대로 기획한 '명불허전' 공연 등을 비롯하여 다양한 기획공연으로 제주도민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물론, 코로나19라는 예상치 못했던 상황으로 작년과 올해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립무용단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다양한 기획공연들은 무용 애호가와 시민들에게 무용단이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왔다. 제주도립무용단의 단원들 또한 새로운 시도와 연출 및 안무자들과 혼열일체가 되어 일신우일신하는 그들의 모습 그 자체로 박수 받아 충분하였다. 그 중심에는 김혜림 예술감독의 보이지 않는 무한한 노력과 스태프들의 열정에 기인한 것은 틀림이 없다. 한편, 제주에서 본격적인 예술활동은 1962년 한국예총제주도지회가 발족되면서 시작되고 그 뒤를 이어 문인협회, 음악협회, 미술협회 등이 창립되면서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무용분야 또한 1960~70년대 당시 제주무용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송근우(1930~1980, 표선 출생, 제주여중ㆍ고 교사) 선생의 노력과 80~90년대 제주무용 2세대라고 하는 이창훈, 김희숙, 이연심 등을 거치며 발전하였고, 1990년대는 제주도립무용단(당시 제주도립민속예술단)이 창단되면서 현재까지 오고 있다. 그러나 지역 무용을 선도하고있는 도립무용단이 창단된지 30년이 지나가고 있으나 전문 무용수를 양성할 대학의 무용학과 하나 없고, 전통에 국한된 한정된 무용 장르활동, 민간 무용단 활동이 빈약한 것은 제주 무용계의 가장 큰 문제이다. 제주에서 무용을 하려면 제주를 떠나야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은 제주의 관련 예술가들과 협회, 예술행정가 및 위정자들의 복기(復棋)가 필요한 부분이다. 문화예술분야에서 행정의 역할 전국 대부분의 예술단과 문예회관의 제1의 현안과 과제는 소속 예술단의 효율적인 운영과 기획 및 제작공연의 활성화를 통한 문예회관의 발전이다. 전국 대부분의 공립예술단은 공연장 소속으로 운영되고 있기에 문예회관 관장과의 유기적인 소통과 협업은 필수조건이다. 예술의 특성상 한 사람의 지휘자(안무자, 예술감독)로 인해 좁게는 예술단과 문화예술공간, 넓게는 그 지역과 국가의 문화수준이 활성화되고 또는 퇴보된다. 제주도립무용단의 최근의 변화들은 활성화되고 있는 쪽에 매우 가깝기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를 바란다. 예술과 행정의 불가분의 관계는 어느것이 먼저라고 하기에는 우리나라 지역주의 사정상 공론화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막론하고 전 세계의 문화정책의 핵심이자 근간은 '팔길이 문화정책(arm’s length principle)'으로, 행정의 역할은 문화예술을 최대로 지원하되, 간섭은 최소화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현재의 정부, 또는 그 이전의 모든 정부의 문화정책은 바로 그것이었다. 예술가를 사랑하고 예술을 흔들임 없이 지속적으로 지원, 후원해야하는 것이 행정의 책임이자 역할이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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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캄보디아 프로 축구 발전에 한국인이 있다.[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며칠 전 지인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이동하는 중 앞에 가는 화려하고 멋진 버스를 발견하였다. 캄보디아 도로에서 보게 되는 대부분의 버스는 한국에서 수입된 중고 버스이기에 대개는 눈에 익은 한국의 디자인인데 이 버스는 한 눈에 확 들어오는 화려함과 역동적인 모습으로 단장하여 나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잠깐 사이에 사라진 이 버스는 캄보디아 프로 축구단 중 하나인 ‘앙코르 FC’팀의 버스였다. 차량의 상태로 보아 그리 오래된 연식이 아닌 비교적 새 차에 가까운 상태로 보아 구단 사정이 괜찮은가보다 라는 생각을 했었다. 축구 이야기가 나올 때면 많은 지인들은 ‘캄보디아에 프로 축구단이 있나?’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 최빈국에서 개도국으로 진입하려는 정도의 경제 규모인 캄보디아에 무슨 프로 축구단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겠지만 캄보디아는 16년의 역사를 가진 프로 축구 리그를 운영하고 있다. 사실 동남아시아 국가의 국민들이 갖고 있는 축구 사랑은 한국의 ‘K 리그’,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나 ‘독일 분데스리가’, ‘스페인 프리메라 리그’ 등 내 놓으라하는 유명 리그의 팬들만은 못해도 그에 못지않은 축구 사랑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베트남이 그렇고 태국이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나라들이 모두 비슷한 경우이다. 특히 베트남의 광적인 축구 열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잖아도 축구에 대한 열기가 대단한데 박항서 감독 부임 이후 비약적인 축구 발전을 이룬 베트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축구 사랑이 있는 나라이다. 베트남은 A매치 빅게임이라도 열리는 날에는 거리가 한산할 정도로 많은 국민들이 TV 앞에 모여 있을 정도이고 일손을 놓은 택시 기사들 때문에 택시 잡기가 힘들 때도 있다. 태국 역시 베트남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나라이다. 이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 사이에 끼여 있는 캄보디아도 축구 열풍이 불게 되었나보다. 캄보디아에는 의외로 13개의 꽤 많은 프로 축구단이 있다. 경제 규모로 보아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는 규모이다. 1982년부터 리그가 시작되었으니 역사도 16년이나 됐다. 1부와 2부로 나누어진 리그는 성적에 따라 상위 리그로 승급할 수 있고 반면에 하위 리그로 강등될 수 있는 제도가 있으니 구색도 제법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유소년 축구 유망주를 육성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나라 사람들의 축구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캄보디아 프로 축구 리그는 2월부터 10월까지 주말에 경기가 열린다. 각 팀별로 총 24번의 경기를 치러서 리그 우승자를 가린다. 특이한 것은 정규 리그전 외에도 외국 용병들을 제외한 순수 캄보디아 선수들만 참가하는 ‘훈센 수상 컵’ 대회가 따로 열린다. 외국 용병들만 못한 기량을 가진 자국 선수들을 배려한 그들만의 잔치를 한 번 더 여는 셈이다. 그리고 구단 중에는 한국인 감독과 한국인 선수도 있다. 그밖에 외국 용병 선수들도 제법 있는데 특이한 것은 북한 선수들도 외화 벌이를 위해서 뛰었던 때가 있었다. 남북한 선수들이 함께 경기장에서 활약했던 모습은 캄보디아 리그 아니면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용병 선수들 중에는 주로 아프리카 출신이 많은데 그 이유가 후하게 지급할 수 없는 구단의 재정 여력 때문이지 않나 생각된다. 지난 2018년에는 한국 선수들이 무려 10명이나 리그에서 활약했는데 지금은 한국 선수 대부분이 팀을 떠났다. 아마도 경기 중 입은 부상이나 코로나 영향, 아니면 연봉이 충분치 않은 이유 때문일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한국 선수들이 활약했는데 지금은 그러지 못함이 아쉽기만 하다. 그리고 한국 기업이 후원하는 구단도 있다. 1부 리그팀 ‘스와이 리엥 FC’팀은 한국계 은행 ‘KB Bank’에서 후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이나 교민 기업에서도 많은 한국 선수들이 캄보디아 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있으며 크고 작은 후원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캄보디아 1부 리그 명문 ‘티피 아미 FC’구단에서는 한국인 이태훈 감독을 영입하였고 나아가 축구 유망주 ‘하찬영’ 선수를 스카웃하여 구단 전력을 강화시켰다. 사실 이태훈 감독은 캄보디아 축구계에서 대단히 유명한 한국인이다. 그는 이미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캄보디아 국가대표 팀 사령탑을 맡았다가 잠시 팀을 떠난 후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다시 대표 팀 감독으로 복귀하였는데 재임 중이던 2014년에는 월드컵 아시아 지역 1차 예선전에서 라오스를 이겼고 그 뒤 마카오와의 경기에서 승리하여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지역 2차 예선에 캄보디아 국가 대표 팀을 진출시키는 쾌거를 이루기도 한 유명한 축구 지도자이다. 캄보디아에서 이태훈 감독은 베트남의 박항서 감독만큼 유명한 축구 지도자이다. 그런 그가 캄보디아 프로 축구 1부 리그 명문 팀 ‘티피 아미 FC’ 사령탑으로 왔으니 그것만으로도 캄보디아 프로 축구 발전과 인기 몰이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서 경기 수도 줄었고 그나마 50명 이내의 관중이거나 아니면 아예 무관중으로 치러지는 경기가 태반이다. 하루 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 캄보디아 프로 축구리그에서 훌륭한 한국인 지도자와 많은 한국 선수들이 활약하여 축구를 통한 민간 외교에서 또 다른 국격을 과시해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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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대한민국에서 예술은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개인적으로 고단한 일(3개월간 직접 녹음실을 공사하는 중입니다.)을 진행하다보니 글을 쓸 여력이 되지 못해 정말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되었다. 한 달 넘게 기고를 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앞으로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면 좋겠다. 최근 필자가 가입한 단체가 있다. ‘예술인 연대’라는 곳으로 ‘예술인 당사자주의’를 표방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정부의 예술 정책과 관련된 사업, 사안들을 예술인이 관리, 실행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고 주창하는 모임이다. 최근 홈페이지가 만들어졌다. https://artistsolidarity.modoo.at/ 여러 전문단체 들이 있다. 학교부터 병원, 검찰, 법원 등등 모두 전문적이기 때문에 그 분야의 전문가가 수장을 맡는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다. 학교의 수장은 교사가 교장이라는 자리를 맡아서 책임을 진다. 병원의 가장 높은 자리인 병원장 또한 의사가 맡는다. 검찰의 수장인 총장 또한 검사가 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 이렇게 강조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예술단체, 기관들의 수장은 지금까지 그렇지 않았다. 바로 검색해보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세종문화회관의 수장은 현재 회계법인 대표가 맡고 있다. 올해 초까지 이런저런 문제가 많았던 서울문화재단의 대표는 전대표가 현재 직무정지되는 사태를 겪고 나서 서울시 문화본부장(공무원)이 직무대행을 하고 있다. 각 지역의 세종문화회관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문화회관, 문화재단들 역시 이와 별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예술인 연대에서 주창하는 ‘당사자주의’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예술인들이 단체와 기관을 운영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는 이야기를 한다. 친 정부인사의 보은 인사로 앉게 되는 문화단체장의 자리를 예술인들에게 돌려달라는 이야기다. 더불어 예술인은 직업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취미, 아마추어가 아닌 생업으로 삼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예술가의 일자리를 직접 만들 수 있는 단체, 기관을 원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런 현재 상황을 연구한 논문이 예술인 연대의 자료로 올라와 있다. 예술인들이 미취업 대상자로 인식되는 사회 (현재 국내 대학 교육에서 대부분의 예술 전공자들은 4대보험이 적용되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 미취업 상태로 인식이 되며 집계되고 있고 이런 현상은 대학 평가에서 마이너스로 작용하기 때문에 입학 경쟁률은 가장 높게 나오지만 대학 평가에서는 언제나 죄인으로 취급받고 있다.) 이런 고질적ㆍ구조적인 문제를 직접 해결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에 대한 응답을 보고 싶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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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정보미공개 불복절차[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각종의 항고쟁송을 진행하다보면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없어 때로는 힘든 쟁송을 이어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그 상대방이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또는 유사한 공공기관일 경우에는 본인은 정보가 상당하게 부족한데도 상대방의 경우는 수십년 간에 축척된 데이터를 통해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였던 자료를 소송이나 심판 중에 제시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시대를 소이 '정보화 시대'라고 하여 많은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확보할 수 있지만, 인터넷으로 확보 못하는 정보 또한 상당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아실 겁니다. 이에 지난번 칼럼에서 정보공개에 대한 필요성을 논하였다면 오늘은 정보공개청구에도 불구하고 미공개로 확보 못하는 정보미공개에 따른 불복절차를 설명드리겠습니다.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또는 이와 유사한 공공기관일 경우에는 공개청된 정보에 대한 공개여부를 결정한 때에는 공개일시, 공개장소 등을 명시하여 청구인에게 통지를 해야 함이 의무이며, 공개를 결정한 날로부터 10일 이내(제3자의 비공개요청에 불구하고 공개결정한 때는 제외)의 범위 내에서 공개일시를 정하게 되며, 청구인이 요청한 때에는 공개일시를 달리 정할 수 있습니다. 단, 청구인이 공개일시로부터 10일이 경과할 때까지 정당한 사유없이 그 정보의 공개에 응하지 아니한 때에는 이를 내부적으로 종결처리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경우 청구인에게 가장하여 정보공개 통지를 한 것처럼 하여 이를 청구인 모르게 종결처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행정절차상 현재에는 불가능함에 따라 거의 이런 경우는 없는 것으로 확인이 됩니다. 공개를 하지 않는 비공개결정 통지는 그 사실을 청구인에게 지체없이 문서로 통지하여야 하며, 여기서 구두, 문자로 통보시에는 효력이 없습니다. 반드시 문서로 통지를 받은 경우 비공개 결정에 대한 정당성을 공개청에서 확보 할 수 있으니, 추후 비공개 결정을 문자로만 통보받은 경우에는 정보공개에 대한 지연으로 담당 공개청을 고소 및 진정할 수 있으니 이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통상적으로 공개대상이 되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비공개결정의 사유로 앞선 칼럼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1. 다른법률 등에서 비공개 사유로 정한 경우, 2. 국방통일외교 등에 이익저하, 3.국민 생명 재산 보호에 지장, 4.진행중인 재판에 영향, 5.연구개발에 지장, 6.지극히 개인적 정보, 7.기타 사유 등의 7가지에 해당되는 경우 비공개 결정을 하지만, 실제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지극히 개인적 정보에 해당되어 비공개를 하려는 경우가 상당합니다. 여러가지 사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인 국민이 정보공개를 요청하는데 합당한 비공개결정 사유는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지극히 개인적 정보에 해당되어 공개해줄 수 없다는 경우가 대부분의 사유인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비공개결정 사유에 대해 면밀한 판단을 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이웃집에서 건축공사를 진행하는데 그 건축공사로 인해 피해가 발생중이라면 이웃집에서 허가를 받은 사항이 적법한지 불법인지를 먼저 판단하셔야 할 것인데, 이와 관련된 정보공개를 관할관청에 요청한 경우 해당 관할관청은 앞서 말씀드린 지극히 개인적 정보 사유로 공개해 줄 수 없다고 할 것임이 분명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건축법의 경우는 관할관청에서 건축허가와 관련된 경우 이해관계인에게 피해가 가는지 안가는지도 허가시 검토해야할 사항으로 건축법에 명시되어 있어 개인정보 중 민감정보를 제외한 공적조서상의 공개된 개인정보를 기준으로 하여 공개할 수 있음을 불복절차 중 따져야 하며, 이의신청에도 불구하고 비공개를 허가관청이 유지하는 경우는 행정심판법에 따라 행정심판을 통하여 공개여부를 재결받아 정보를 획득할 수 있으니 이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개념이 시대 상황에 맞춰 변화하는 현재에서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재정된 법률이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입니다. 이 법률은 재정 초기부터 많은 불협화음이 발생되었지만, 현재에는 어느정도 정착으로 인해 활성화가 된 법률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법률을 충분히 활용하여 고충 및 의문이 발생되던 부분을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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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암 정약전⑥ 손암을 만나기 위해 흑산도에 간 다산의 둘째 아들[전문가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2020년 9월에 반가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한국한문학회 79집’을 통해 정민 교수(한양대학교)가 학계에 최초로 전문을 공개한 "새자료 정학유의 흑산도 기행문 '부해기(浮海記)'와 기행시"다. 이 글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운포(耘逋) 정학유(丁學游, 1786~1855)의 기행문과 기행시에 대한 논문이다. 학유는 다산 정약용의 둘째 아들로 ‘농가월령가’, ‘시명다식(詩名多識)’ 등을 지었다. '부해기'는 학유가 24살 때에 아버지 다산의 뜻을 받들어 흑산도에 유배 중인 중부(仲父 둘째 큰아버지) 손암 정약전을 뵙고 돌아온 51일(1809년 2월 3일~3월 24일)간의 기행일기다. 이 일기에는 조선후기 흑산도 주민들의 생활모습과 지명이나 풍물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들어 있다. 특히 손암의 적거지 이동과 불분명했던 연대기에 관련된 중요한 기록들이 담겨있다. 이 자료는 손암 정약전 연구에 커다란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강진을 출발해 영암에서 배에 올라 고초 끝에 흑산도에서 중부와 눈물의 상봉을 한 후, 공부를 점검 받으며 여러 지역을 유람하고 3월 1일에는 소사미(小沙尾) 마을 냇가 바위 위에서 술과 안주에 꽃지짐을 마련한 손암의 생신 잔치를 했다는 얘기 등 많은 부분들이 학술자료의 소중함을 넘어 놀랍고, 안타깝고 흥미진진한 내용이다. 그동안 학유의 흑산도 기행 내용은 다산과 손암이 쓴 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더구나 유배기간 중에 손암이 조카와 조우했다는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정 민 교수는 이것을 국가의 죄를 입은 죄수 간에 중간에 자식을 두어 왕래 했다는 혐의를 피하려는 의도였던 듯하다고 보았다. 손암은 유배 전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잃고 하나 남은 아들 학초(學樵)가 있었다. 학유가 흑산도로 가기 전인 1806년경에 다산이 강진에서 형님 손암에게 편지를 보냈다. -학초가 지난 경신년 겨울에 독서하는 걸 보니 이미 그애가 큰 그릇의 사람이 될 줄 알았습니다. 지난 해에 큰애(다산의 장남 학연)의 말을 들으니 앞서의 견해에 더욱 믿음이 섭니다. 올봄에 그애가 물어온 몇가지 조목을 보고서 놀라고 놀랐습니다. (중략) 제 생각으로는 금년 가을에 이곳 강진으로 데려와서 겨울 동안 가르치고 내년 봄에는 형님 곁으로 들어가서 모시고 있다가 4월이나 5월 사이에 돌아간다면 그애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잘 개발되고 방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아이 학유도 함께 와서 공부하고 가게 하려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정해렴 역) 학초의 독서를 보니 큰 그릇의 사람이 될 줄 알았고 믿음이 간다. 가을에 학유와 학초를 강진으로 불러 가르쳐서 내년 봄에 흑산도로 보내 몇 달 형님의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다고 다산은 손암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글을 받은 손암은 이렇게 답장했다. -이와 같다면 내가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내가 기뻐서 잠이 오질 않네. 올 가을 데려오는 논의는 내가 권하지도 막지도 않으려네. 다만 모자의 뜻대로 하게 한다면 용기를 내더라도 여러 의논들이 많이들 말려 반드시 이루어지지는 못할 걸세. 만약 남쪽으로 온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정 민 교수는 이 대목에서 “이 말에 따라 학유와 함께 강진으로 내려올 준비를 하던 학초가 짐을 싸던 중 홀연 병을 얻어 세상을 뜨자 아들의 남행을 기다리던 손암은 절망에 빠졌다. 결국 1808년 4월에 학유 혼자 강진으로 내려왔고, 해를 넘긴 1809년 봄에 다산은 둘째 아들 학유에게 학초를 대신해서 중부가 계신 흑산도로 찾아가 뵐 것을 부탁했던 듯하다”고 밝혔다. 학유는 '부해기'에서 2월 3일에 흑산도 방문 이유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임금 원년 신유년(1801) 겨울 가경 6년에 중부(仲父)이신 손암 선생께서 흑산도로 귀양 가셨다. 섬은 나주 바다 가운데 있으니 큰 바다를 천 리나 건너야 한다. 바람과 파도가 몹시 거세서 집안사람이나 부자간이라도 감히 직접 가서 뵙지는 못하였다. 정묘년(1807) 봄에 학초(學樵)가 조운선을 타려고 행장을 이미 갖추었으나 병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중부께서는 기다리시다가 달을 넘기고서야 궂은 소식을 들었다. 궁하고 외로운 처지를 슬퍼하다가 도리어 병이 되어 해를 넘기도록 앓아누워 아침저녁을 기약할 수 없었다. 무진년(1808) 봄에 내가 강진에 가서 거칠게 아버님을 봉양하였다. 아버님께서 내 손을 붙드시더니 울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래도 뭍에서 살아 주위 환경과 서책이 완연한 인간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 저 구름바다를 바라보노라면 그 형편이 어떠하겠느냐. 네가 한 번 가서 뵙도록 해라’” 학초는 매우 총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다산이 쓴 '형자학초묘지명(兄子學樵墓誌銘 형님의 아들 학초의 묘지명)에 씌어 있는 학초에 대한 글이다. -학초는 형님 손암선생의 아들이다. 손암선생은 여러번 아들을 낳았으나 키우지 못하고 만년에 이 아들을 얻어 지극히 사랑하였다. 학초는 말이 조금 서툴렀다. 그러나 6~7세 때에 이미 서사를 읽고 그 득실을 의논할 줄 알았다. 보는 이는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바둑을 신묘하게 알아 7~8세에 이미 어른들과 대국하였는데 모두 강적으로 여겼다. 신유년(순조1년) 봄에 화가 일어나서 손암선생은 신지도로 귀양가고 나는 장기로 귀양갔다. 겨울에 다시 잡혀왔다가 다시 살아나 형님은 흑산도로 정배되고 나는 강진으로 정배되어 형제가 같은 길로 떠나게 되었다. 학초는 길게 땋은 머리로 화성의 남쪽 유천의 점사(작은점포)에서 우리를 전송하였는데 그 때 나이 11세였다. 집에 번국(중국)에서 가져온 사안주(구렁이눈) 1개가 있었는데 곧 큰 구렁이의 눈동자였다. 대체로 이 구슬이 있는 곳에는 뱀, 독사 따위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이 구슬로 비추면 뱀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죽어 마른 나무가 되어 버리니 기이한 보배였다. 학초가 울며 이 보배를 바치면서 "흑산도는 초목이 무성하여 무서운 뱀들이 많은 곳입니다. 이 구슬로 스스로를 보호하소서." 하니, 손암선생이 받아서 주머니에 넣는 한편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는 드디어 서로 헤어졌다. 내가 유배온 이래로 저술한 육경과 사서에 관한 학설 240권은 학초에게 전하려 하였더니 이제는 그만이로다. 학초는 신해년(정조15년)에 태어나서 정묘년(순조7년) 가을 7월 19일에 죽으니 그 수가 겨우 17세이다.- 손암은 여러 아들들을 두었으나 모두 일찍 잃고 늦게나마 얻게 된 아들을 몹시 사랑했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저술한 240권의 새로운 학설을 학초에게 전하려 했다는 것과, 학초에 대해 기술한 것들을 볼 때 그가 대단히 뛰어난 인재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산의 두 아들 학연과 학유도 보통의 학문이 아니었다. 큰 아들 학유는 초의선사를 아버지에게 소개하고 추사 김정희 등과 교우하며 문필을 드높이면서 다산의 유배 다음해부터 아버지의 유배가 억울하다는 상소를 정약용이 해배 될 때까지 끊임없이 올린 인물이다. 둘째 아들 학유는 오늘날에도 조선시대의 인문학자로 분류될 정도로 많은 문헌을 남기고 있다. 두 아들 모두 유배 중인 아버지의 학문을 도왔던 뛰어난 학자들이었는데 이러한 두 아들이 있음에도 다산은 형님 손암의 아들 학초에게 자신의 새로운 학설을 전수코자 했을 정도로 학초는 총명했다. 손암이 흑산도로 귀양살이를 떠날 때, 학초는 열한 살이었다. 그리고 당시에 그의 집에는 중국에서 들여 온 큰 구렁이의 눈으로 만든 사안주라고 하는 구슬이 있었고 그 구슬이 뱀을 쫓는 대단한 효력이 있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사안주 구슬을 어린 학초가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는 아버지께 유배지에 뱀이 많이 있을 것을 염려하며 눈물로 손에 쥐어 드리는 어린 학초의 애처로운 모습, 그 어린 학초와 아버지의 그 눈물겨운 생이별의 모습을 다산이 학초의 묘지명에 기록하였다. 이렇게 애절한 이별을 나눈 아들이 7년 후에 장가를 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죽고 말았다. 유배지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정약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러나 추측을 할 뿐 전해지는 바는 없었다. 이제 새로 공개된 "새자료 정학유의 흑산도 기행문 '부해기(浮海記)'와 기행시"를 통해 많은 것이 밝혀졌다. 앞으로 흑산도와 손암 정약전의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것을 기대한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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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외도에서 바뀐 인생①[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여름이다. 코로나로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날들이지만 올 여름에 꼭 다녀오고 싶은 곳이 있다. 바로 내가 군대생활을 했던 남해바다 작은 섬 외도다. 그곳에 가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버린 강수일씨다. 거제도와 한려수도의 푸른 바다 무인도 외도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보고싶은 여행지 부동의 1위로 만든 첫 시작은 강수일씨였다. 외도에서 강수일씨를 보며 보낸 1년의 군대 생활이 나를 나무에 눈뜨게 하였고 이후 내 삶의 항로를 결정지었다. 나는 육군으로 입대하여 상병 달고 하사교육을 받아 하사로 전역하였다. 거제도에서 군복무를 하던 나는 누구 앞에서든지 떨지 않고 발표를 잘한 덕분에 특별한 부대배치를 받게 되었다. 거제도에서 중대장을 하다가 장승포에서 10여분 거리 바다 4km 덜어진 섬 외도로 갔다. 해발 100미터가 채 되지않는 무인도 외로운 섬이었다. 하지만 외도에 자생하는 애기동백들은 겨울이면 바닷바람에 볼이 발갛게 어여쁜 꽃망울을 터트렸고 난대성 상록수가 우거져 아름다웠다. 귤나무를 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섬을 빙둘러 심은 향나무는 제멋대로 자라 무성했다. 외도는 5만평 작은 섬이지만 풍광이 수려해서 사단의 고위급 외부손님 방문이 많았다. 그때마다 브리핑을 해야했는데 브리핑을 잘하는 내가 배치된 것이다. 브리핑 특화 해안 분대장이었다. 섬의 구석구석을 사랑바위 진주 해안등 모습과 느낌을 실감나게 스토리텔링하여 소개하고 안내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외도는 지금 같은 관광지가 아니었다. 내가 배치되기 몇 년 전 외도는 6가구 섬주민이 농사를 짓는 작은섬이었고 운동장이 마당만한 초등학교는 학생이 세 명 있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 고등학교는 바다 건너 거제도 장승촌에서 다녀야했다. 그런데 외도에 하나뿐인 초등학교가 폐교되자 주민들 모두가 거제도 장승촌으로 이사를 가고 외도는 개인에게 매매되었다. 새 주인은 서울 동대문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거제도 앞바다로 바다낚시를 왔다가 풍랑을 피해 가까운 섬으로 배를 댄 곳이 외도였다. 하룻밤 민박은 사람의 운명과 섬의 운명을 바꾸었다. 북에 두고 온 고향이 그리웠던 그분은 고향과 흡사한 섬의 모습을 잊지 못하다가 몇 년 후 섬을 통째로 사서 내려왔던 것이다. 동대문 부부는 초가집에 살면서 학교마당에 돼지를 길렀는데 사료값이 비싸지고 수지가 맞지않았다. 돼지를 포기하고 고구마를 심던 밭에 3천그루의 귤나무를 심었다. 그렇지만 태풍이 불면 바람을 맞아 귤이 다 떨어졌다. 바람을 막아볼 요량으로 편백나무 8천 그루를 심었으나 추운 날씨로 인해 얼어죽었다. 배를 대는 선착장은 일곱차례나 파도에 쓸려갔다. 큰 손해를 본 부부는 서울로 다시 떠나며 섬사람 강수일씨에게 섬의 관리를 부탁했다. 강수일씨 부부는 딸이 학교를 다니고 있는 거제도에서 배를 타고 고향 외도로 출ㆍ퇴근했다. 강수일씨가 외도를 관리하면서 섬은 놀랍게 변해갔다. 어느 날부터 강수일씨는 영화 가위손의 조니뎁처럼 향나무를 하나 하나 다른 모양으로 아름답게 가다듬어갔다. 여인의 모습 사슴이나 용의 모양으로 향나무 하나 하나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그 모습에 감탄했다. 신이 내린 예술가였다. 가끔 우리 부대원들이 배로 큰 나무를 옮기거나 깊은 구덩이를 파야하는 삽질같은 힘든 일을 도와주면 용돈을 주었는데 우리 부대원들은 그 돈으로 거제도에서 맛있는 것을 사다가 먹어서 좋았다. 강수일씨는 구석구석 꼭 필요한 나무도 심었다. 비싼 나무가 아니었다. 여기저기 섬에서 자라는 나무 그대로를 전지를 해서 섬을 차츰차츰 이국적인 유럽풍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은 내게 감탄과 깨달음을 주었다. 창조가 기적같은 변화를 가져왔다. 외도는 5만평 작은 섬이지만 우리집은 뒷산만해도 10만평이 넘는 산이 있다. 정읍은 빙둘러 칠보산, 내장산, 두승산, 초산이 있다. 옥정호 내장호 큰 호수도 두 개다. 그 산들과 나무가 얼마나 대단한 밑천인지 나는 생각했다. 산으로 둘러쌓인 고향을 절대 떠나지 않으리라. 산이 있는 고향에 살기로 결심하고 나는 제대를 했다. 큰 호수가 두 개 초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정읍을 아름다운 도심정원으로 만드는 상상을 산꼭대기 초소에서 종종 생각했다. 인생이 그렇게 결정되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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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새로운 물결의 시작: 창의적 아이디어와 현실의 부정[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무심한 시선, 그 너머의 감각 지난 5월부터 제주시 원도심 이아갤러리에서는 문창배 작가의 '무심한 시선, 그 너머의 감각' 개인전이 3개월간 진행되었다. 문창배 작가는 ‘몽돌’과 ‘파도’ 시리즈를 통해 꾸준하게 이름을 알려오고 있는 제주를 대표하는 극실주의 회화 작가이다. 이번 전시회는 예리함과 섬세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흑백의 대조를 극명하게 처리하고 전통적인 붓 대신 날카로운 의료용 매스를 사용해 캔버스의 표면을 예리하게 긁어내는 작업 방식을 취했다. 필자와의 만남에서는 작품 작업에서는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기에 극도의 긴장감의 연속이라고 하면서 고충을 털어내기도 하였고, 이경은 미술기획자에 의하면 “문 작가의 작업방식은 디지털 사진이 범접할 수 없는 고도의 감각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감각이 기계보다 우위에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믿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진보다 더 실제 같은 극사실주의 극사실주의(Hyperrealism)는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미술경향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그려내는 기법이다. 래디컬리얼리즘. 슈퍼리얼리즘, 포토리얼리즘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진이나 실물처럼 극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시간과 극도의 집중, 실력을 요구한다. 일부 평론가들은 극사실주의가 철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가상인 그림이 현실보다 더 현실같고 매력적인 현대 사회의 세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하면서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 관객이 이런 현대시대의 아이러니함을 느끼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베껴 그리기'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비판도 회자되고 있다. 극사실주의 회화는 일상생활의 모습을 사진처럼 재현해 보고자 하는 시도로 현실의 모습을 어떤 해석도 없이 기계적으로 냉정하게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클로스(Close, C.), 에스테스(Estes, R.), 우리나라 출신으로 세계 정상의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김창열 작가가 대표적이다. 김창열 작가는 1972년 파리의 '살롱드메 Salon de Mai' 전에서 물방울 그림인 'Event of Night' 으로 본격적으로 데뷔하면서 물방울을 소재로 한 극사실주의 회화작품으로 유명하다. 한국전쟁 당시 애월, 함덕 등에서 1년 6개월 가량 머문 인연을 소중히 여겨 2013년 5월에 시대별 작품 220점을 제주특별자치도에 무상 기증하였고, 이는 2016년 9월 제주 한경면에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을 개관하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물결의 시작: 창조를 위한 현실의 부정 현재의 상황을 넘어선 위대한 예술이나 새로운 예술장르의 창조와 출현은 현실의 부정과 사물을 보는 새로운 시각에서 출발한다. 바로크 음악과 고전주의 음악에 반하여 나온 것이 낭만주의 음악이듯이, 250년전 당시에는 상상 못하였던 형식인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연주를 동시에 하는 파격적인 작품으로 전 세계의 클래식 음악의 방향을 바꾼 베토벤 심포니 또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정형적인 양식을 넘어서 현실의 부정에서 시작하였다. 예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적 발상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새로운 물결의 시작은 창의적 아이디어와 현실의 부정에서 출발하였다. 이것이 문화예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예술은 현실을 넘어선 그 이상을 보는데서 시작해야한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