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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㊷ 열정 여제자 아우에른함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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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전시

[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㊷ 열정 여제자 아우에른함머 2

임송 문화예술학 박사
여수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표 예술감독

임송 박사 사진제공 -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1999년 7월 30일 부산문화회관.jpg
임송 박사 사진제공 -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1999년 7월 30일 부산문화회관

 

[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이야기㊷ 열정 여제자 아우에른함머 2

 

막시밀리안 슈타들러(Maximilian Johann Karl Dominik Stadler, 1748~1833)

모차르트와 그의 열정 여제자 아우에른함머의 음악에 대한 행보는 오스트리아의 음악가이자 베네딕도 수도회의 사제였던 막시밀리안 슈타들러와 그의 자서전을 통해 알아 볼 수 있다. 슈타들러는 18세기와 19세기 초 빈(Wien) 음악계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슈타들러는 1748년에 멜크(Melk) 시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베네딕도 수도회 멜크 수도원에서 첫 음악교육을 받았다.

 

1758년(10살)부터는 삼촌이 수도자로 있는 시토수도원에 입학하여 클라비코드와 오르간을 배웠다. 오스트리아 최초의 음악저널이었던 ‘빈 음악신문(The Wiener Allgemeine Musical Zeitung)’에는 체코 출신의 작곡가이자 음악교사였던 코제루크(Leopold Anton Koželuch, 1747~1818)에게 피아노를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

 

슈타들러는 1766년(18살)에 멜크 수도원에 들어가 1767년에 서원을 하고 1772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훌륭한 음악가의 자질을 키워가던 슈타들러는 멜크 신학교의 교수로서 신학과장을 역임하고, 1786년부터 수도원장을 맡았지만 요제프2세 황제의 허가 거부로 시토회의 수도원으로 옮겼다가 린츠(Linz)로 갔다.

 

린츠 주교의 배려로 빈으로 간 슈타들러는 모차르트를 비롯한 빈의 음악가들과 함께 음악활동에 전념하며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은 물론 프란츠 슈베르트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의 자서전에는 당신 빈의 음악계에 관한 상황이 자주 묘사되어 있다. 특히 모차르트와 아우에른함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작곡가이며 음악학자로 명성을 떨친 슈타들러는 그의 자서전에서,

 

“모차르트가 빈으로 와 여섯 곡의 클라비어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Sonata for Klavier & Violin K.296, K.376-K380)를 아르타리아 출판사에서 제작하여 그 소나타들을 아우에른함머에게 헌정하였습니다. 그 무렵에 나는 그들의 연습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르타리아는 첫 인쇄본을 가지고 왔고, 아우에른함머는 피아노를 쳤습니다. 모차르트는 바이올린 대신 그 옆에 놓여있는 피아노를 쳤습니다. 나는 스승와 제자인 두 사람의 연주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살아오면서 그와 같은 훌륭한 연주는 처음이었습니다.”

 

라고 적었다. 모차르트가 요제파 아우에른함머에게 여섯 곡의 소나타를 헌정한 시기는 1782년 6월이었다. 슈타들러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와 관련된 수많은 글을 썼다. 특히 모차르트 레퀴엠(진혼곡)의 진위성에 대한 입증과 변호에 큰 역할을 하였다.

 

모차르트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No.17, C Major K.296

Mozart: Violin Sonata No.17, C Major K.296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연주 1999년 7월 30일 부산문화회관

 

https://youtu.be/NtrHF78F4AY?si=MhWCVDROFFR_dQ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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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K.376 1악장

Mozart: Violin Sonata K.376 mvt.1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연주 2020년 1월 31일 서울아트센터 IBK홀  


https://youtu.be/018hsiYMG5s?si=vhkF8G9Ptv4x1Bl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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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리아(Carlo Artaria, 1747~1808)와 아르타리아 출판사(Artaria & Co)

아르타리아 출판사(Artaria & Co)는 이탈리아 사람 아르타리아(Carlo Artaria, 1747~1808)가 1770년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도였던 빈에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미술과 지도(地圖)를 주로 출판하였으나, 1778년부터 음악을 포함하는 사업으로 확장하였다. 역사상 중요한 초기 사업은 요제프 하이든과의 협력으로 하이든의 작품 300여 곡을 출판하여 판매한 일이었다.

 

하이든의 현악 4중주곡(Op.33)으로 시작된 아르타리아 출판사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출판사로 성장하였다. 하이든의 작품 가치는 아르타리아가 최고의 출판사로 발전하여 고전음악 시대의 모든 주요기업들과 연결이 되었고, 루이지 보케리니(Luigi Boccherini, 1743~1805)와 모차르트 같은 매우 중요한 클래식 작곡가들의 작품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1793년부터 아르타리아는 베토벤의 초기작품들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1803년, 아르타리아는 베토벤의 현악 5중주곡의 출판권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법정 소송은 180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에도 아르타리아는 1819년에 베토벤의 함머 클라이버 소나타(Hammer klavier Sonata)를 출판했다.

 

1826년에는 베토벤의 현악4중주곡(No.13 B장조 Op.130)을 편곡하여 대푸가를 위한 네 손을 위한 피아노곡(Grosse Fuge,  Bb Major Op.134)을 출판하였다. 아르타리아와 베토벤의 분쟁은 음악사에서 초기 저작권법의 확립과 불법 복제 문제에 대한 저작권 보호에 대한 구체적 결정에 도움을 준 역할로 평가하고 있다.

 

아우레른함머의 열정적인 활동과 모차르트의 지속적인 지원

1782년, 모차르트가 아우에른함머에게 여섯 곡의 소나타를 헌정하고 함께 귀족들의 집을 방문하며 레슨과 연주회를 열어가던 중에 아우에른함머의 아버지 요한 미햐엘 아우에른함머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요제파 아우에른함머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모차르트는 자신이 하숙하였던 발트슈테텐 남작부인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아우에른함머가 머물며 숙식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졸지에 어려움을 겪게 된 아우에른함머의 심리적ㆍ경제적 곤란은 매우 심각했다. 부풀었던 파리 계획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열정과 집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1782년 11월 3일에 캐른트너토르 극장(Kärntnertortheater)에서 예정된 아카데미 연주회를 스스로 기획하여 준비하는 것을 지켜 본 모차르트는 신부인 콘스탄체와 잘츠부르크를 방문하기로 한 계획을 연기하면서까지 음악회 헙연을 진행하였다.

 

아우에른함머의 추진력은 대단했다. 1784년 10월31일과 1785년 2월 24일의 아카데미 연주회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하였다. 물론 모차르트도 제자를 위해 모든 음악회에 빠짐없이 협연을 도와주며 우정과 음악적 협력을 다했다.

 

1786년 5월 23일, 시대의 편견과 사회의 여성 차별을 넘어 파리로 진출하여 마음껏 공부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음악만을 위해 살기로 굳게 다짐했던 요제파 아우에른함머는 자신보다 일곱 살 연상인 빈의 치안판사 요한 베세니히(Johann Bessenlg, 1752~1834)와 결혼하였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leaderjj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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