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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㊳ 빈 (Wien) 에서 재회한 아버지와 아들

입력 2024.02.12 19:46
수정 2024.02.12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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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송 문화예술학 박사
    여수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표 예술감독
    임송 박사 사진제공 - 빈.jpg
    임송 박사 사진제공 - 빈 모차르트 피가로하우스(Wien Museum Mozartwohnung) 모차르트가 3년 동안 살았던 곳으로 사용하던 생활 집기와 악보가 보존되어있다.

     

    [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이야기㊳ 빈(Wien)에서 재회한 아버지와 아들

     
    모차르트의 누나 마리아 안나(난네를)

    모차르트에게는 누나 마리아 안나(Maria Anna Walburrk Ignatia Mozart, 1751~1829)가 있었다. 난네를(Nannerl)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누나는 모차르트보다 5살 위였다.

     

    난네를은 7살 때부터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하프시코드를 배우고, 모차르트와 함께 유럽의 여러 도시로 연주여행을 다녔다. 초반에는 뛰어난 연주솜씨로 가족 중에서 가장 높은 소득을 얻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어가자 집안 살림을 도맡으면서 연주여행에 동행할 수 없어 예술적 재능을 나타낼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결혼문제에 있어서도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삶과 배우자를 스스로 선택하였지만, 난네를은 아버지에게 순종하였다. 본인의 성품을 논하기 전에 사회적 환경을 극복하기 어려웠던 여성에 대한 당시의 야만적 시대 배경은 난네를로 하여금 스스로 종속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도록 하였는지도 모른다.

     

    난네를은 육군 대위이며 가정교사인 프란츠 디폴트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아버지의 강요에 맞서 누나의 의지를 관철해야한다는 모차르트의 간절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의 청혼을 거절하였다. 난네를은 1784년 8월 23일 지방 치안판사 요한 폰 조넨부르크(Johann Baptist Franz von Berchtold zu Sonnenburg, 1736~1801)와 결혼하였다. 조넨부르크는 두 명의 전처와 사별하고 이미 다섯 명의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난네를은 결혼식을 마치고 잘츠부르크에서 동쪽으로 29km 떨어져있는 장크트길겐에서 거주하였다.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지만 남편과의 사이에 세 자녀를 두었다. 조넨부르크는 1801년에 사망했다. 난네를은 50세에 미망인이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20년 간 피아노 교사로 지냈다. 그 뒤 앞을 못보는 장님이 되어 9년을 더 살다가 1829년 78세로 잘츠부르크에서 생을 마쳤다.

     

    누나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모차르트

    평생 동안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던 모차르트는 자신의 결혼식에 불참했던 아버지 레오폴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다음 해인 1783년에 아내 콘스탄체와 같이 고향 잘츠부르크를 방문했지만 소원해진 아버지 그리고 누나와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성공적인 빈 생활 가운데에도 항상 마음이 무거웠다.

     

    모차르트는 174명의 예약자 명단을 꼼꼼히 기록하여 보냈던 1784년 3월 20일의 편지 이후에도 계속하여 서신을 보내(4월 10일, 4월 24일, 4월 28일, 5월 26일) 현재 빈에서 전개되는 자신의 근황을 알리며 지속적으로 아버지 레오폴트를 빈으로 초대했다.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사정이 호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마음은 빈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궁정악단에서의 위치가 자유롭지 않아 선뜻 잘츠부르크를 떠날 수가 없는데다가 나이가 들어가는 난네를의 결혼식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차일피일 빈 방문을 미루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1784년 후반기부터 오페라 ‘후궁탈출’의 상설공연과 예약연주회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작곡 주문과 렛슨이 늘어나고 바쁜 일정으로 난네를의 결혼식에 도저히 참석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콘스탄체가 둘째 아이를 임신하여 9월경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결혼을 앞둔 누나 난네를에게 보낸 모차르트의 편지

     

    모차르트가 누나 난네를에게

    - 빈에서, 1784년 8월 18일

     

    자, 큰일났네! 누나가 아직 베스타의 무녀(순결한 처녀를 뜻함)인 동안에 내 편지가 도착하려면 지금 바로 써야겠네요! 2, 3일 뒤면 늦을 테니까.

    아내하고 나는 누나의 신분이 바뀐 다음으로는 온갖 행복과 즐거움이 있길 바라고 있어요.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형편상 누나의 결혼식에 갈 수 없다는 거예요. 하지만 내년 봄에는 틀림없이 잘츠부르크나 장크트길겐에서, 폰 존넨부르크 부인이 된 누나와 그 남편을 포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이제는 우두커니 혼자 지내시게 된 아버지가 가장 안됐네요! 물론 누나는 아버지 계신 곳에서 그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당시 마차로 6시간 정도인 거리) 때때로 누나 있는 곳으로 마차를 타고 놀러 갈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아버지는 아직도 그 지긋지긋한 음악당에 매여 계시죠! 그런데, 내가 아버지의 입장이었더라면, 그렇죠, 그렇게 오래도록 근무했으니 대주교에게 은퇴 신청을 해서 연금을 받으며, 장크트길겐에 있는 딸에게 가서 조용히 살 텐데 말예요. 대주교가 그 신청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해고를 청구해서 빈의 자식(모차르트 자신)에게 가는 거예요.

    그래서 누나에게 가장 바라는 건, 그런 식으로 처신하시라고 아버지를 설득해달라는 거예요. 나도 오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런 이야기를 썼어요. 누나를 위해 빈에서 잘츠부르크로 또다시 1,000번의 축하를 보낼게요. 특히 두 사람이 우리 두 사람처럼 사이좋게 살아가길!

    그럼 이만.

     

    이때의 편지에는 아직도 오누이 간의 따뜻한 사랑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난네를 결혼식 불참과 아버지 레오폴트의 죽음 이후에는 두 사람 사이의 우애가 점점 스러져갔다.

     

    레오폴트의 빈 방문

    레오폴트는 난네를의 결혼식을 마치고 나서야 빈 방문계획을 세웠다. 다음해 1785년 1월 모차르트가 있는 빈을 방문하기 위해 장크트길렌에 살고있는 난네를에게 편지를 보내 모차르트가 보낸 편지내용을 설명하며 빈으로 떠나겠다는 뜻을 알렸다.

     

    아버지 레오폴트가 딸 난네를에게

     - 잘츠부르크에서, 1785년 1월 22일

    .....

    바로 지금, 네 동생(모차르트)에게서 10줄 가량의 편지를 받았다. 그 안에는 최초의 예약 음악회가 2월 11일에 시작, 매주 금요일에 계속된다는 것, 사순절 제3주째의 무슨 요일인가에는 틀림없이 극장에서 하인리히(마르샹, 오스트리아 주재, 프랑스계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를 위한 음악회가 있으니 나에게도 빨리 오라고 하는구나. 지난 토요일에 6개의 현악 4중주곡(이른바 하이든 헌정 곡)을 아르타리아(빈의 음악 출판사)에 팔아, 100두카텐을 벌고 그 곡을 사랑하는 친구 요제프 하이든과 그 밖의 친한 친구들에게 들려줬다고 쓰여 있더라, ‘마지막으로 작곡하기 시작한 협주곡(피아노협주곡, K 466)에 다시 매달려야 합니다. 안녕히!’라고 되어 있다.

    ……

     

    1785년 2월 11일(모차르트 29살), 아들을 만나기 위해 잘츠부르크를 떠난 레오폴트는 빈의 ‘피가로 하우스’ 입구에 멈춰 선 마차에서 서서히 발을 내디뎠다. 집 앞에서 아버지의 마차를 기다리던 모차르트는 2년 만에 만나는 레오폴트를 뜨겁게 안았다. 레오폴트는 아들의 집을 보고 눈이 크게 떠졌다. 잘 꾸며진 거실과 당구대까지 놓여 진 건물 내부에서 아버지는 미소를 머금었다. 레오폴트가 놀랄만한 이 집은 모차르트가 지난 해에 새로 이사 온 저택이었다.

     

    작년 9월 21일, 둘째 아들 카를 토마스가 태어나고 며칠 후 모차르트 부부는 슈테판대성당 뒤편 돔가세(Domgasse) 5번가로 세 번째 이사를 했었다. 이 집은 빈에서 가장 유명한 로코코풍의 건물로, 집세도 지난번에 살았던 그라벤(Graben) 29번지 아파트보다 세 배가 넘었다. 그라벤의 아파트는 3개월에 65플로린(18세기 환율로 약 325만원)이고, 돔가세의 카메시나하우스(Camesina Haus)는 3개월에 230플로린(18세기 환율로 약 1100만원)이었다.

     

    카메시나하우스는 나중에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하였다고 하여 ‘피가로하우스’로 불리게 된다.

     

    임송 박사 사진제공 - 2022년.jpg
    임송 박사 사진제공 - 2022년 6월 반 클라이번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임윤찬과 함께 참가하여 3위를 차지한 우크라이나의 드미트로 초니(Dmytro Choni)의 Semifinal Raund 연주 실황이다. (https://youtu.be/CHSXCQ3jjws?si=CwLpEcGJQYQXwMAt)

     

    그날 저녁 빈(Wien) 음악가협회(Tonkünstler-Societät)에서 주최하는 음악회에서 레오폴트는 피아노협주곡 20번(K.466)을 연주하는 모차르트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음날 2월 12일 레오폴트는 드디어 요제프 하이든을 만났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와 함께 연주한 현악4중주 세 곡을 마치고 나서 레오폴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신에게 맹세하고 나의 명예를 걸고 말합니다. 당신의 아들은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레오폴트는 2월 14일에 잘츠부르크의 난네를에게 하이든이 모차르트에 대해 말한 칭찬과 모차르트가 빈에서 귀족들과 교유하며 자랑스럽게 지내고 있다는 내용을 편지에 써서 보냈다. 그리고 4월 25일까지 약 2개월 정도를 지내는 동안 모차르트에 대한 걱정과 불만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