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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㉞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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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㉞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우정

임송 문화예술학 박사
여수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표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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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송 박사 자료제공 -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과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천재와 거장(巨匠)의 만남

하이든은 젊은 시절부터 30여 년을 헝가리의 귀족인 니콜라우스 1세 에스테르하지 공작(NikolausⅠ, Prince Esterhazy, 1714~1790)의 가문에서 악장으로 지내며 작곡에 전념하며 살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만날 수가 없는 처지였다. 두 사람은 세상의 소문과 도처에서 만나게 되는 작품들을 통해서만 상대의 천재성과 능력을 짐작하며 기억 속에서 상대의 존재를 알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만난 것은 1784년으로 하이든은 52살, 모차르트는 28살이 되었을 때였다.

 

하이든은 그의 고용주이자 후원자인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공작이 겨울 동안에는 오스트리아의 아이젠슈타트(Eisenstadt)에서 머물다가 헝가리로 돌아갔기 때문에 가끔씩 40km 떨어진 빈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이때 모차르트는 3년 전부터 빈에 머물며 음악적 성공을 거두고 콘스탄체와 결혼하여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부터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였다.

 

모차르트가 17살이 되던 1773년에 아버지 레오폴트와 함께 빈에 왔을 동안에 작곡한 초기 현악 4중주곡(K.168~173)에 이미 하이든의 작품 ‘태양 4중주’(Op. 20, 1772년 발표)에서 받은 영감이 영향을 끼쳤다. 이 태양 4중주곡은 하이든에게 ‘현악 4중주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갖게 해 준 작품 중 하나로 향후 200년 동안 세상의 모든 현악 4중주곡을 정의하는 작곡 기법으로 이어졌다.

 

'모차르트가 하이든에게 헌정한 6개의 현악 4중주곡'모차르트가 헌정한 6개의 모차르트 현악4중주곡(K. 387, 421, 428, 458, 464, 465)은 그들의 우정 초기에 작곡되었고 1785년에 출판되었다.

 

모차르트가 이 여섯 곡을 하이든에게 헌정한 것은 헌납자가 대개 귀족이었던 당시로서는 다소 이례적인 일이었다. 모차르트의 삶에서 작곡에 관한 한 힘들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작곡은 머릿속에서 이미 이루어져 있었으며 악보로 옮기는 일은 거의 수정 없이 작업하였다.

 

그런데, 하이든에게 헌정한 곡에 대한 헌사에는 ‘참으로 오랜 노력의 결실’이라는 말이 들어있다.

 

음악 역사가들은 이 표현을 하이든에 대해 인간적 관계보다 예술적 존경이 훨씬 많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한다.

출판 악보는 당연히 깨끗하지만 원본 악보를 세밀히 살펴보면 다른 악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많은 수정 흔적이 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존경하는 하이든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엄격한 양식에 맞추어 힘들게 작곡을 진행했던 것이다.

 

일괄편집_임송박사2.jpg
임송 박사 사진제공 - 보로딘 현악 4중주단 (Borodin String Quartet)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세대를 초월한 우정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와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의 만남은 서양음악의 역사에서 세대를 초월한 진정한 벗으로서 끝없는 신뢰와 애정을 나눈 가장 아름다운 우정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나이어린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높이 인정한 하이든의 넓은 도량과 모차르트가 일생동안 파파 하이든으로 부르며 그에게 바친 존경이 깔려 있다.

 

하이든은 계속되는 모차르트와의 만남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당시 그는 헨델과 글루크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음악가였고, 스스로 자신의 명성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스스로 보편성을 찾아내는 모차르트의 우월한 음악적 재능을 직감했다. 그리고 숨기지 않고 바로 주변의 모든 이에게 공개했다. 친구들에게 모차르트를 아낌없이 칭찬했다.

 

1787년 12월에 그의 친구이자 프라하의 고위 지방관리였던 프란츠 로트(Franz Rott)에게 보낸 편지에는 "모차르트가 가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작품이 모든 음악 애호가의 영혼, 특히 고위 인사의 영혼에 동일한 음악적 이해와 동일한 방식으로 깊이 감동시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모든 국가들은 그러한 보석을 가지기 위해 끝임 없이 경쟁할 것이다”라고 썼다.

 

이어서 말미에는 “그리고 대우도 잘해 주어야 한다. 돈이 없는 천재의 생활은 슬플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후대에도 그런 노력을 하라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희망에 찬 천재들이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천재 작곡가가 아직 한 번도 황궁이나 왕궁에서 직책을 맡은 일이 없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났다. 내가 지나친 말을 했다면 용서를 바란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요제프 하이든이다”라고 마무리했다.

 

하이든은 영국의 음악 역사가이자 음악가인 찰스 버니(Charles Burney, 1726~1814)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천재적이라고 친구들로부터 종종 칭찬을 받았지만, 그는 나보다 훨씬 뛰어났다”

 

훗날 1790년 5월 30일, 여섯 자녀의 어머니였던 친구이자 음악가인 마리안느 폰 겐칭거(Marianne von Genzinger, 1754~1793)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이든은 음악적 재능을 펼치는 모차르트의 꿈을 꾸었다고 고백했다.

 

헤어지는 두 사람

1790년 12월, 하이든은 바이올리니스트 잘로몬(J. P. Salomon, 1745~1815)의 초청으로 영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영국에서 6곡의 새로운 교향곡을 만들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빈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영국으로 들어가 6곡의 교향곡을 추가하여 오늘날 '잘로몬 교향곡'이라고 불리는 12곡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두 사람이 헤어지던 날 모차르트는 파도가 높은 도버해협을 건너야 하는 나이든 하이든의 위험한 일정이 걱정되어 하이든의 영국행을 만류했다.

 

하이든은 ‘음악이야말로 만인 통용의 언어’라는 믿음을 보이며 ‘내 언어는 세계에서 이해된다’는 자신감에 넘치는 명언으로 답변을 했다.

 

모차르트는 마지막 작별이 될지도 모르겠다며 울면서 하이든을 배웅했다. 그러나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는 사람은 모차르트였다.

 

1년 후 영국 런던에서 모차르트의 죽음을 전해들은 하이든은 “후세 100년 이내에는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는 깊은 탄식과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leaderjj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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