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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㉜ 모차르트의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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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㉜ 모차르트의 자녀들

임송 문화예술학 박사
여수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표 예술감독

일괄편집_임송 박사 1.jpg
임송 박사 자료제공 - 모차르트의 아들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Franz Xaver Wolfgang Mozart, 1791~1844)

 

[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의 음악은 오늘날에도 천상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보여주지만 그의 인생은 이와 반대로 반목과 어려움이 반복되었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와의 관계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사랑과 노력은 누구보다도 컸지만 오히려 갈등은 계속 깊어갔다.

 

결혼식이 끝나고 늦게나마 아버지의 허락 편지가 도착하자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와 함께 잘츠부르크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으나 너무나 바쁜 일정으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11월 11일에 취소하였다.

 

1782년에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모차르트의 바쁜 일상이 들어있다. 오전 6시에 일어나 머리를 다듬고 아침식사를 한 다음 7시에는 의복을 차려입고 9시까지 작곡을 했다. 9시부터 오후 1시까지는 레슨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 후에는 오후 6시까지 손님을 만났다. 연주회가 있거나 저녁에 공연이 없는 날은 바깥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작곡을 했다. 어떤 날은 새벽까지 작곡에 매달렸다. ‘저는 배가 고플 때가지 곡을 씁니다’라는 표현도 있다.

 

1783년 1월 5일, 임신부 콘스탄체는 21살이 되었다. 4월 24일, 모차르트 부부는 출산을 위해 유덴플라츠 3번지에 있는 넓은 아파트 2층집으로 이사했다. 1783년(27살) 6월 17일, 첫 번째 아기가 태어났다. 이름은 할아버지 이름 레오폴트(Leopold)를 넣어 라이문트 레오폴트 모차르트(Reimund Leopold Mozart)로 지었다. ‘후궁탈출’의 호평과 연주가 이어지고 작곡의뢰가 늘어나자 상황이 호전되는 현실을 느낀 모차르트는 다시 잘츠부르크 방문 계획을 세웠다. 아버지와 누나에게 확실한 허락을 받기 위해서는 성공이 시작되는 지금이 가장 좋은 때라고 판단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바로 아버지에게 달려가지 못했던 이유는 2년 전에 잘츠부르크로 돌아가라고 명한 콜로레도 대주교에 대한 곤란한 입장과 아버지에게 붙들려 빈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수입도 늘고 빈에서의 미래가 밝아지고 있었다. 가족이 다시 모여 빈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도 생겼다. 1783년 7월 25일, 모차르트 부부는 갓난아기를 믿을만한 유모에게 맡기고 서둘러 잘츠부르크로 향했다.

 

이번 귀향은 1781년 1월에 뮌헨에서 모차르트와 함께 5주 동안 지내다가 모차르트가 빈으로 떠난 이후 2년 반 만에 가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이었다. 콘스탄체로서는 처음으로 시아버지를 만나는 상견례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콘스탄체와의 만남을 계기로 가족과의 화해를 이루고자했던 모차르트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문제는 아버지가 아니라 오히려 난네를이었다. 그녀는 콘스탄체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완강히 거부하였다. 콘스탄체는 결혼 전에 난네를에게 ‘우정의 편지’를 보내 간곡히 배려를 청했던 터라 은근히 호의적인 태도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난네를이 냉정한 거부의 태도를 바꾸지 않자 크게 실망했다.

 

잘츠부르크를 떠나기 전날, 10월 26일에는 잘츠부르크의 변방에 있는 상트페터 수도원에서 모차르트의 대미사 C단조가 초연되었다. 이 곡은 주문자의 의도나 전례의 필요에 의해 작곡된 다른 종교음악과는 달리 자신의 결혼을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작곡한 작품으로 대규모의 악기편성으로 되어 있었다. 미사통상문 중 ‘크레도(거룩하시도다)’를 아직 작곡하지 않은 상태여서 상트루퍼트 주교좌성당에서는 연주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10월 27일 모차르트 부부는 아버지와 누나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3개월 동안 함께 지냈지만 난네를은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 이날 헤어진 모차르트와 난네를 남매는 살아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빈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유모에게 아들을 찾으러 갔다. 유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말을 전했다. “라이문트는 8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답니다. 여행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일부러 연락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첫 아들 라이문트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죽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평생의 큰 상처로 남았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모두 여섯 자녀를 두었지만 둘째 아들과 막내아들 2명만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였다. 삼남 요한 토마스 레오폴트는 1개월 만에 사망하고, 장녀 테레지아는 6개월 만에 사망했다. 차녀 안나 마리아는 사산되었다. 18세기에도 유럽의 유아 생존율은 여전히 낮았다.

 

차남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Karl Thomas Mozart, 1784년 9월 21일~1858년 10월 31일)는 빈에서 태어나 7살 때인 1791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 동생 프란츠와 함께 당시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프라하의 음악학교에서 공부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지만 음악가의 길을 싫어했다.

 

카를은 1810년에 밀라노의 나폴리 총독궁의 공무원으로 생활하면서 이탈리아에서 아버지 모차르트의 음악적 업적을 널리 알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파리에서 ‘피가로의 결혼’을 세 번 공연하는 대가로 밀라노 북부의 농장을 구입하였고, 부유하게 살다가 1858년에 밀라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남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Franz Xaver Wolfgang Mozart, 1791~1844)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 콘스탄체에 의해 훌륭한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와 요한 네포무크 훔멜(Johann Nepomuk Hummel, 1778~1837)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요한 게오르그 알브레헤츠버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 1736~1809)에게 작곡을 배웠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음악가와 음악 교사로 살았다.

 

아버지가 사망하기 4달 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고, 음악적으로도 당대의 음악적 조류였던 낭만파를 받아들이지 않고 빈 고전파 풍으로 작곡을 했기 때문에 큰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다. 내성적이고 겸손하여 자기를 나타내지 않았고 자신의 작품이 아버지와 비교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1820년대에는 50인 작곡가에 포함되기도 하고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음악감독과 지휘자로 초빙되어 음악활동을 하였다.

 

프란츠는 1844년에 53세로 칼스바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번역하면, 'May the name of his father be his epitaph, as his veneration for him was the essence of his life(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그의 비명이 될지어다.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삶의 근간이었다)'

 

다음은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가 남긴 작품 중 ‘하이든의 73회 생일 축하 칸타타 (Cantate to Joseph Haydn’s 73rd birthday)’이다.

 

일괄편집_임송박사2.jpg
임송 박사 자료제공 - https://youtu.be/eQ1R_XBv8pY?si=9la3buYPAtraViu5

 

어머니 콘스탄체는 아들들에게 죽은 아버지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면 훌륭한 음악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두 아들은 모두 훌륭하지 못한 음악가가 되었고 그나마 차남 카를은 그마저 포기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두 아들은 필요 이상으로 조용하게 살았고 아버지의 명성을 누리면서도 능력과 재능은 그 자리에 미치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 아들들은 모두 독신으로 살아서 모차르트의 직계는 여기서 다 끊겼다. 따라서 모차르트의 남은 후손들은 모두 직계가 아닌 방계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leaderjj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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