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㉚ 모차르트의 결혼3

입력 2023.10.09 14:17
수정 2023.10.09 14:18

SNS 공유하기

fa tw
  • ba
  • ka ks url
    임송 문화예술학 박사
    여수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표 예술감독
    임송 박사 자료제공 - 오스트리아 빈(Wien)의 상징으로 불리는 슈테판 대성당은 137m 첨탑을 갖고 있다.jpg
    임송 박사 자료제공 - 오스트리아 빈(Wien)의 상징으로 불리는 슈테판 대성당은 137m 첨탑을 갖고 있다

     

    [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이야기㉚ 모차르트의 결혼3

     

    순탄치 않은 콘스탄체와의 결혼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결혼은 지난했다. 두 사람의 결합은 양쪽 집안 모두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1782년 1월 1일, 모차르트와 발트슈테텐 남작부인은 콘스탄체가 집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모차르트 손에 이끌려 돌아 온 콘스탄체를 본 베버 부인은 딸을 껴안고 기뻐했지만 ‘아버지가 허락하시는 대로 바로 결혼식을 올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모차르트에게는 가난한 음악가에게 내 딸을 보낼 수 없으니 돈이나 열심히 모으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모차르트는 당장에 발트슈테텐 남작부인이 주선해 준 폰 트라트너 부인과 치히 백작부인 등 세 명에게 한 달에 6두카트(120만 원 상당)씩을 받기로 하고 끔찍이도 싫었던 피아노 교습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기위해서는 반드시 요제프 2세 황제의 궁정음악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막시밀리안 프란츠 대공(요제프 2세 황제의 막내동생)의 궁전을 방문하기도 했다.

     

    아울러, 아버지와 누나에게는 계속해서 설득의 편지를 보냈다. 그즈음 잘츠부르크의 가족들은 모차르트가 체칠리아 부인의 꾐에 빠졌다는 소문을 듣고 빈에서의 모든 사건을 베버가족의 음모라고 믿는 편지를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빈에서, 1782년 1월 30일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

    아주 급하게 씁니다. 지금은 밤 10시 반입니다. 토요일까지는 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걸 부탁드려야 하기 때문에 아주 조금밖에 쓸 수가 없으니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이도메네오, K 366’의 오페라 대본을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 발표회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발표회는 사순절의 제3일요일에 열립니다. 그래서 즉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오페라 ‘후궁탈출, K 384’는 잠자고 있는 게 아닙니다. 글루크의 큰 오페라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 와 ‘알체스테’를 위한 것 가사 중 꼭 고쳐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에 늦어지는 겁니다. 하지만 부활절이 지나면 곧 상연될 겁니다.

     

    이제는 펜을 놓아야 합니다.

    다만, 이 말씀은 드리겠습니다(이걸 쓰지 않았다가는 안심하고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까요). 제가 사랑하는 콘스탄체가 그런 심한 생각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그런 나쁜 마음의 여자를 사랑하는 짓은 할 수 없다는 걸 꼭 믿어주시겠죠. .....

     

    우리는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최고인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그 사람을 만나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속히 그곳에 갈 일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마음씨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분이라는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

     

    든든한 지지자 슈비텐 남작을 만나다

    바쁘고 힘든 일상이 이어지던 중 모차르트는 요제프 2세 황제의 영향력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인 소중한 지지자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 남작(G. F. Van. Swieten, 1733~1803)을 만나게 되었다. 네덜란드 출신인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주치의가 된 아버지를 따라 빈으로 와서 예수회가 운영하는 테레지움이라 불리는 엘리트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평생을 오스트리아의 황제들에게 발탁되어 외교관, 도서관제도 혁신가 등 정부 관료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슈비텐 남작은 외교관 시절부터 시간의 대부분을 쏟아 부어 매우 열정적인 음악에 대한 그의 취향을 발전시켰다. 바흐와 헨델의 음악을 흠모하여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제자들과 함께 음악을 연구하였다.

     

    특히,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트비히 반 베토벤에 대한 후원자로서 음악역사에 기록될만한 헌신을 하였다.

     

    1782년 1월 27일, 26살이 된 모차르트는 황실 도서관장 슈비텐 남작이 기거하는 공관에서 바흐의 작품을 연주하며 무아지경을 경험했다. 슈비텐 남작은 요제프 2세 황제의 개혁팀을 주도하는 실력자로서 모차르트에게 “이곳을 매주 일요일 정오에 음악가들에게 개방하겠다. 당신의 작품들과 바흐, 헨델의 음악을 연주하자”라고 제안하였다. 모차르트는 음악의 정수에 도달했던 바흐 음악과의 교감을 통해 커다란 음악적 영감을 얻게 되었다.

     

    슈비텐 남작에 의해 황실 도서관에 고용된 모차르트는 바흐와 헨델의 작품을 정리하는 일을 맡아 하면서 수십만 권의 모든 도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빈에서 얻은 이 기간 동안에 모차르트는 대위법을 활용하여 소나타 형식의 작곡을 능숙하게 익혀 자신만의 음악 색채를 만들어냈다. 슈비텐의 일요음악회에는 빈의 많은 음악가들이 참여했는데 요제프 하이든도 그 중의 일원이었다.

     

    모차르트는 황실 도서관 이외에도 갈리친 후작(Prince Nikolai Borisovich GalitzinGolitsyn, 1794~1866)의 후원으로 그의 살롱에서 매주 두 번씩 연주를 했다. 갈리친 후작은 러시아 귀족 가문으로 아마추어 음악가이며, 특히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게 3개의 현악 4중주(Op. 127, 130, 132)를 의뢰한 음악 후원자로 유명해졌다.

     

    -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빈에서, 1782년 4월 10일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

    이달 2일의 편지에 따르면 모든 걸 무사히 받으셨다죠. 아버지는 시곗줄과 담뱃갑, 누나는 2개의 모자를 모두 마음에 들어 하셨다니 기쁘게 생각합니다. 담뱃갑도 시곗줄도 제가 산 게 아니라, 모두 사파리 백작이 보내주신 겁니다. 사랑하는 콘스탄체에게는 두 분의 안부 말씀을 전했습니다. 콘스탄체는 그 답례로 아버지 손에 키스를, 누나에게는 마음으로부터의 포옹을 보내며, 두 분의 친근한 벗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2개의 모자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 사람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 사람의 소망이었으니까요. .....

     

    제가 분명 황제 밑에서 일하게 되리라는 소문에 대해 쓰셨는데, 그런 일을 제가 알려드리지 않았던 이유는 저도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온 거리에 그런 소문이 파다하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제게 축하의 말을 건넨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황제께서 계신 곳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돌고, 황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걸 저는 기꺼이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저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습니다. 황제께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다는 데까지 와 있다는 이야기니까, 제가 그 때문에 한 발짝이라도 내디딘 것도 아닙니다. ……

     

    저는 일요일마다 12시에 슈비텐 남작에게 가는데, 그곳에서는 헨델과 바흐 이외의 것은 전혀 연주하지 않습니다. 저는 바흐의 푸가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세바스티안의 것만이 아니라 에마누엘과 프리데만 바흐, 그리고 헨델의 것도요. 그리고 저는 남작에게 에벌린(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잘츠부르크의 악장)의 것도 들려주고 싶습니다. 영국의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대 바흐의 아들)가 별세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죠. 음악계로서는 아쉬운 일입니다!

     

    슈비텐 남작과 일을 하며 바흐의 음악을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은 아버지 레오폴트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미 서로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진 서신이 수차례 오고간 터에 상대적 소외를 깊이 느끼고 있는 두 사람의 불화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자신의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는 듯한 아버지의 침묵에 조급해진 모차르트는 결혼식 날이 임박해 오자 거듭 결혼 허락을 애걸하는 글을 보냈다. 1782년 7월 16일, 오페라 ‘후궁탈출’이 개막 공연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드디어 레오폴트의 답신이 모차르트에게 도착했다. 그러나 결혼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빈에서, 1782년 7월 31일

     

    26일자 편지를 오늘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 오페라 ‘후궁탈출, K 384’가 호평이었다고 알려드린 편지에 대한 답장이라곤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이 담기지 않은 쌀쌀한 편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빈에서 누구나 더는 다른 걸 들으려 하지 않겠다는 듯 대소동이 벌어지고, 극장을 언제나 가득 채워놓은 아들의 작품을 빨리 보고 싶은 나머지 보퉁이를 여는 손도 들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제 4번째 공연이 열렸고 금요일에도 또다시 열립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그럴 틈이 없으셨던 거겠죠……


    그동안 저의 지난번 편지를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음 편지에서는 제 결혼에 동의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아버지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아니, 실제로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편지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콘스탄체 베버)은 훌륭한 부모에게서 난 정직하고 착실한 딸입니다. 저는 그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지금까지 저에게 써 보내신 일, 물론 앞으로 쓰시는 내용이 모두 호의에서 나온 조언일 뿐 그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게 얼마나 훌륭하고 친절한 것이든 한 여자하고 여기까지 와버린 인간에게는 도무지 합당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더는 미루어놓을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반듯하게 정비하고 성실한 남자가 되어야죠!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보답해주시겠죠. 저는 자신을 비난할 만한 일은 일절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 

     

    임송 박사 자료제공 - 슈테판 대성당의 내부 모습,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절차가 이곳에서 열렸다.jpg
    임송 박사 자료제공 - 슈테판 대성당의 내부 모습,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절차가 이곳에서 열렸다

     

    마침내 결혼

    1782년(모차르트 26살, 콘스탄체 20살) 8월 2일, 모차르트는 결혼 예고 절차를 면제해달라는 청원서를 교구에 제출하고, 콘스탄체와 함께 호엔 브뤼케의 테아티너 수도원으로 가서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마쳤다. 그리고 다음날 결혼서약서에 서명했다. 8월 4일,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아버지 레오폴트의 허락과 축복을 받지 못한 채 성 슈테판 대성당 엘리기우스 소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은 콘스탄체의 어머니 체칠리아 부인, 두 사람의 후견인이자 증인인 토르바르트, 모차르트의 어릴 적 친구인 빈의 외과의사 프란츠 길로프스키, 막내 처제 조피, 콘스탄체의 손을 잡고 모차르트에게 인도한 지역 참사관 헤르 폰 체토, 그리고 몇 명의 신랑 들러리가 전부였다. 아버지 레오폴트의 결혼 허락 소식은 결혼식을 마치고 발트슈테텐 남작부인의 저택에서 피로연을 가질 때 도착했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