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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㉘ 모차르트의 결혼 (1)

입력 2023.09.11 13:34
수정 2023.09.11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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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송 문화예술학 박사
    여수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표 예술감독
    임송 박사 자료제공 - 모차르트의 ‘후궁탈출’을 초연한 오스트리아 빈(Wien)에 있는 국립극장 부르크테아터(Burgtheater).jpg
    임송 박사 자료제공 - 모차르트의 ‘후궁탈출’을 초연한 오스트리아 빈(Wien)에 있는 국립극장 부르크테아터(Burgtheater) 1741년 마리아 테레지아가 설립하였다

     

    [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이야기㉘ 모차르트의 결혼 (1)

     

    또 하나의 삶의 과제 ‘결혼’

    1782년(26살) 7월 16일에 모차르트가 자유음악가로서 빈 생활을 시작하고, 빈(Wien) 궁정극장 부르크테아터(Burgtheater)에서 3막 희극 징슈필 ‘후궁 탈출(K.384)’ 초연을 마친 뒤, 결혼이라는 반드시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커다란 삶의 과제가 앞으로 다가왔다.

     

    잘츠부르크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부터 이미 불화가 깊어진 아버지와의 관계는 ‘후궁 탈출’의 성공으로 화해의 끈이 아직은 이어져 있었지만 콘스탄체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와 반드시 허락을 받고자하는 아들의 관계는 여전히 팽팽한 평행선이었다.

     

    작년(1781년) 5월, 궁에서 쫓겨났지만 빈에 남기로 한 모차르트는 갈 곳이 없었고, 프리돌린 베버가 사망한 후 빈으로 이사 온 베버 가족의 집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체칠리아(베버의 미망인, 콘스탄체의 어머니) 부인은 빈에서 숙박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 때 사랑했던 알로이지아는 이미 출세하여 큰 부자가 된 요제프 랑게(희극 배우)의 아내가 되었지만, 그녀의 가족들은 모차르트의 뇌리에 항상 따뜻한 보금자리로 남아있었다.

     

    모차르트는 베버 가족의 집 2층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잠시만 머무를 예정이었지만 7월 13일에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보낸 편지에 장기적으로 기거하기로 작정한 뜻을 전한 것을 보면, 이때부터 알로이지아의 동생 콘스탄체에 대한 사랑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체칠리아 부인에게는 네 명의 딸이 있었다. 콘스탄체는 외모와 가창력이 다른 자매들보다 뛰어나지 않았지만 모차르트에게 매우 다정했다.

     

    평범한 결혼을 반대하는 가족들

    베버 가족에 대한 여러 얘기와 그 집 셋째 딸 콘스탄체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잘츠부르크까지 전해졌다.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반대는 레오폴트에 이어 모차르트의 누이 난네를까지 태도를 굳히면서 점차 격렬해졌다.

     

    최고의 음악가로 성공해야할 모차르트가 평범한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아들에게 모든 기대와 희망 그리고 자신의 미래까지도 포함시키고 싶어 했던 아버지는 빈에서 잘츠부르크로 들려오는 여러 소문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과 걱정으로 가득 찬 조언을 보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숙집만큼은 꼭 바꾸라고 했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근심을 덜기 위해 7월 25일자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모차르트의 변명

    “설령 지금 결혼해서 운이 트인다 하더라도 제 머리는 다른 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도저히 여자에게 봉사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제게 내리신 재능은 한 여자 때문에 망쳐버린다거나 젊은 날을 하는 일 없이 지낸다거나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 생활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이 마당에 스스로를 비참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현재로서는 그런 것은 제게 재앙입니다.....

     

    소문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물론 깨끗한 방은 쉽게 찾아낼 수 있겠지만, 이처럼 편리한 곳, 이처럼 인정 많고 친절한 사람들은 그리 쉽사리.....

     

    하지만 그뿐, 그밖에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제가 농담을 나눈 사람과 모두 결혼해야 한다면, 바로 200명의 아내를 갖게 되겠죠”

     

    그리고는 항상 편지의 말미에 작곡과 연주 등 음악에 관한 구상과 아버지의 조언을 구하는 내용으로 글을 마쳤다.

     

    콘스타체에게 청혼

    1782년 12월 5일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의 어머니 체칠리아 부인에게 콘스탄체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체칠리아 부인은 생활의 협상에 노련한 사람이었다. 가난한 모차르트의 재능은 높이 샀지만 수입이 없는 것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던 터였다.

     

    만24살이 넘어야 성년이 되는데 콘스탄체는 아직 19살이라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아 걱정이라며 콘스탄체의 집안 후견인인 요한 폰 토르바르트를 불렀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궁정 관료로 궁정극장에서 재정을 담당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의논하여 작성한 문서를 모차르트에게 보였다. 3년 안에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며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해마다 300플로린(약 1500만원: 18세기 통화환산 기준)을 위약금으로 물어야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러한 계약조건은 당시 빈에서 성행하는 일이었다. 18세기 말의 유럽사회는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이상과 지성을 중시하고 사회적 합리를 추구하는 듯 한 냉정함이 세련된 행동으로 치부되는 현상이 만연해 있었다.

     

    체칠리아 부인은 이미 알로이지아를 요제프 랑게에게 시집보낼 때 연간 900플로린이라는 거금을 받는 계약을 체결한 경험이 있었다. 후견인과 체칠리아 부인은 증서를 쓰지 않으면 딸과 절대 교제를 할 수 없으니 문서로 확증해야 한다며 모차르트에게 서명을 종용했다.

     

    이를 보고 있던 콘스탄체는 화가나 울면서 문서를 빼앗아 찢어버리고는 어머니에게 이별을 통보하며 모차르트와 함께 집을 나와 버렸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후원자인 발트슈테텐 남작부인에게 콘스탄체를 데리고 가서 숙식을 부탁했다.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계산되지 않은 어수룩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랑과 철없는 듯 한 행동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것은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오늘날의 청춘들에게도 분명히 존재하는 에너지이다. 비록 노년이 되어도 남아있는 열정이다. 1774년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출간되었다.

     

    단테, 셰익스피어와 함께 세계 3대 시성(詩聖)으로 불리게 되는 무명작가 시절의 청년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06)가 12주 동안 몰입하여 써내려간 서간체 소설이다.

     

    이 소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유럽 전역에 번역되어 베르테르는 젊은이의 열병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젊은 남자들이 푸른 연미복에다 노란조끼를 입는 것이 유행했다.

     

    연기처럼 퍼져나간 주인공의 좌절과 고독은 실연당한 남자들에게 전염되어 권총으로 자살하는 사례가 급격히 늘어났다. 한 때는 책 판매가 금지되기도 했던 이 현상은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 라는 학술용어까지 만들어지며 현대에 까지 이어져 온다.

     

    18세기 말, 유럽의 젊은이들은 왜 그토록 베르테르에게 열광했던 것일까? 당시 유럽에 번져나간 계몽주의는 신분 상승과 물질과 명예에 대한 감추어져 있던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부추기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이 모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이해타산에 가치를 크게 두는 사람도 있지만 실익이 없어 보이는 측은지심이나 보이지 않는 내면적 평안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이 더 많다.

     

    임송 박사 자료제공 - 영화 '괴테'의 한 장면 푸른 연미복고 노란 조끼를 입은 18세기의 청년 복장.jpg
    임송 박사 자료제공 - 영화 '괴테'의 한 장면 푸른 연미복과 노란 조끼를 입은 18세기의 청년 복장

     

    베르테르 효과는 부정적 측면도 있었지만 젊은이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본질적인 비물질 비욕망을 통한 마음의 평화도 자극했을 것이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도 세상의 흐름과 무관하진 않지만 이 베르테르 효과의 영향으로 두 사람이 공유한 순수한 마음의 공감이 있었을 것이다.

     

    괴테와 모차르트는 서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동 시대에 같은 유럽 내에서 살았다. 모차르트가 7살 쯤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공연을 할 때 14살의 괴테가 모차르트를 보았고, 훗날 그의 제자 요한 페터에커만에게 당시 어린 모차르트는 작은 칼을 차고 머리는 길게 땋아 내리고 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이탈리아를 동경한 공통점이 있었다.

     

    괴테보다 일곱 살이 적은 모차르트는 괴테보다 17년 먼저 1769년(13살)에 이탈리아를 1년 4개월 동안 방문했고, 괴테는 37살이 되던 해인 1786년(모차르트 30살)에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괴테는 모차르트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바이마르의 궁정 예술 감독 시절에는 모차르트의 작품을 자주 공연했다. 파우스트가 완간되기 전에 1790년에 단편 파우스트를 발간하면서, 파우스트가 모두 완성되어 오페라를 만든다면 오직 모차르트만이 작곡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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