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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㉕ 해방된 자유 음악가의 첫 작품

입력 2023.07.17 08:13
수정 2023.07.17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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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송 문화예술학 박사
    여수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표 예술감독
    일괄편집_임송1.jpg
    임송 박사 자료제공 -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주 요제프 2세 황제 (Joseph BenediktAnton Michael Adam, 1741~1790)

     

    [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시대의 빈(Wien)

    모차르트가 머물던 1781년(25살)의 빈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본거지로서 문화와 경제가 전성기를 이루며 예술의 수요와 공급이 왕성하였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1754년부터 빈의 인구를 조사하여 오늘날까지 자료가 남아있다. 최초 조사의 빈 인구는 17만 5천 명이었고, 모차르트 활동 당시에는 20만 6천 명이었다. 유럽에서 파리와 런던 다음으로 많은 인구가 사는 도시였다.

     

    부(富)와 권력은 100여명의 제후와 세습 작위의 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숫자상 분포는 귀족 2천 6백 명, 성직자 2천 명, 부르주아 계급 5천 9백 명, 공직자 3천 명으로 1만 3천 5백 명이었다.

     

    나머지는 군인 12만 5천 명, 하인 3만 명, 유대인 5백 명, 기타 순이었다. 권력층은 부유했지만 나머지 백성들은 대부분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나, 계몽 군주의 대표 주자의 한 사람이었던 요제프 2세 황제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사망으로 섭정에서 벗어나자 산업의 발전과 사회 개혁을 촉진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자유와 평등을 선언함으로써 시민계급의 지위가 힘을 얻어가고 있었다.

     

    황제는 예술을 사랑했고, 권력 귀족층과 신분이 상승한 시민계급의 확산은 빈의 음악가들에게 큰 기회가 되었다. 궁정에서만 이루어지던 연주회가 개별적 악단을 소유한 개인 저택에서도 수시로 열리게 되었다. 음악가들의 수요가 늘어나고 처우도 점차 나아가고 있었다.

     

    13년 전에 모차르트에게 베풀었던 관심과 선처

    요제프 2세는 13년 전인 1768년 1월 19일(12살이 되기 며칠 전)에 모차르트 부자(父子)를 쇤부른 궁으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황제는 유럽 전역에 소문이 난 천재 소년을 맞이하려고 친히 대기실까지 나왔다.

     

    직접 두 사람을 쇤부른 궁으로 안내하여 환대한 후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모차르트가 간단한 오페라를 작곡했다고 들었는데 과연 이 소년이 오페라를 작곡한 것이 사실인가’를 물었다.

     

    그리고, 당시 54세인 황실의 궁정악장인 글루크(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 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를 시켜 오페라 부파(Opera buffa) '바보 아가씨' 작곡을 의뢰하도록 했다.

     

    작곡료는 100두카트(약 2천만 원, 18세기 유럽 통화환산 기준)로 책정하였다. 12세 천재소년에 대한 황제의 배려는 엄청난 것이었다. 4월에 대본을 받은 모차르트는 당대 최고 작곡가들의 오페라를 구경하고 배우며 작곡하여 7월에는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이탈리아계 음악가들이 지배하고 있던 빈의 음악계는 발칵 뒤집혔다. 레오폴트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여러 가지 사유와 거부에 부딪쳐 극장을 구하지 못하고 어린 지휘자가 작곡한 곡이라는 이유로 성악가를 구성하기도 힘들었다. 아버지가 대신 곡을 썼다거나 나이를 속였다거나 하는 소문도 나돌았다.

     

    결국에는 이탈리아 음악가들의 농간이라고 판단한 레오폴트의 불만이 폭발하여 558쪽까지 진행된 작업이 중단되고 말았지만 모차르트에게는 잊지 못할 은혜였다. 모차르트는 다시금 황제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자유음악가 모차르트의 첫 작품

    모차르트가 극장까지 폐쇄한 열악한 잘츠부르크를 벗어나 넓은 세상에서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펼치고자하는 욕망이 아무리 컸을지라도 궁정음악가의 안전한 둥지를 버린 결단은 당시의 사회 상황에서는 누구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마도 빈의 변화된 긍정적 상황이 모차르트에게 스스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여 자유음악가를 선택하는 결단에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은 분명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자유의 몸이 된 모차르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빈(Wien)에 살면서 생애 최고의 작품들을 생산하였다.

     

    비록 자유를 택한 대신 질병과 궁핍이라는 힘든 댓가를 치러야 했지만 인류의 음악사에서 주옥같은 선물을 후대에 남길 수 있었던 고단(孤單)과 행복이 중첩하는 고귀한 기간이었다. 새장을 벗어난 모차르트가 만든 최초의 곡은 과연 어떤 곡이었는지 알아보자. 1781년에 작곡한 곡 중에서 7월 이후에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곡이 있다.

     

    바이올린 소나타 27번 G장조 K.379(Mozart Violin Sonata No.27 in G major, K.379)

     

    1a. Adagio (제1a악장. 아다지오)

    1b. Allegro (제1b악장. 알레그로)

    2. Tema-Variations – Andante Cantabile (제2악장, 주제 변주곡- 안단테 칸타빌레)

     

    일괄편집_임송2.jpg
    임송 박사 자료제공

     

    이 곡은 3악장이 아닌 2악장으로 된 곡이다. 하이든(J. Haydn 1732~1800)의 곡에서는 여러 번 등장하지만 모차르트의 빈 소나타로서는 유일하다. 제1a악장 아다지오는 서정적인 분산화음으로 시작하는 긴 피아노 서주가 특징적이다.

     

    심각한 표정의 이 선율은 노래하듯 한 부드러움 속에 긴장감을 예고하고 바이올린이 이를 받아 테마를 반복한다. 전형적인 소나타의 형식을 벗어나 제1b악장이 끝날 때까지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주선율이 두 개의 주제를 분명하게 대비하며 조성과 박자와 셈여림을 변화시킨다.

     

    제2악장 안단티노 칸타빌레 주제 변주곡은 명랑하고 부드러운 선율의 주제를 5개의 변주로 아름답고 우아하게 이어간다. 제1변주는 피아노가 16분음표로 음형을 변주하고, 제2변주는 바이올린이 3연음부 변주를 시작하여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서로 넘기며 변주한다.

     

    제3변주는 피아노가 변주하는 빠른 페시지의 32연음표 주제를 바이올린이 따라가다 피아노와 함께 첫 선율로 돌아온다. 제4변주는 단조로 변조하여 4연부 음형반복으로 애잔함을 표현한다. 제5주제는 장조로 변조한 처음의 주제선율로 빠르기와 셈여림으로 주제를 반복하며 빠른 템포로 코다를 넘어 가볍게 마친다

     

    고뇌와 희망, 갈등과 봉합이 교차하는 삶의 변환점에서 무심히 변화를 받아내는 아늑함을 느끼게 하는 따뜻한 곡이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