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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㉔ 자유 음악가! 새장을 벗어나다

입력 2023.07.03 18:31
수정 2023.07.03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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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송 문화예술학 박사
    여수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표 예술감독
    임송 박사 자료제공 - 18세기.jpg
    임송 박사 자료제공 - '18세기에 그린 오스트리아 빈 징거슈트라세 7번지 독일기사단 궁전 세밀화' 건물 뒤 보이는 첨탑은 슈테판 성당이다

     

    [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이야기㉔ 자유 음악가! 새장을 벗어나다

     

    사직서 제출

    1781년(25살) 5월 10일, 모차르트가 아르코 백작에게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아르코 백작은 어이없는 행동에 놀라며 이를 반려했다. 영주에게 사직서를 내는 것은 선례가 없었다. 더구나 세습 영주이면서 성직자이기도 한 잘츠부르크의 대주교에 대한 순명은 신자의 의무였다. 백작은 모차르트에게 훈계했다. “자네 아버지(레오폴트) 동의 없이는 사직할 수 없네 그것은 자네가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일세!” 그는 레오폴트와 오랜 친분이 있었기에 모차르트의 처지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충고했다.

     

    그간의 정황을 잘 알고 있는 아르코 백작이 갑자기 아버지에 대한 책무를 얘기하자 모차르트는 화가 치밀었다. “아버지에 대한 의무는 당신 이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에게 이런 얘기를 듣는 것이 매우 유감입니다” 라고 대답하며 사직서 수령을 거듭 요구했다. 언쟁이 오간 후 주위의 만류로 자리를 떠난 모차르트는 흥분한 상태에서 예정된 오페라를 관람하다가 고열과 오한으로 극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 쓰러졌다.

     

    5월 12일 몸을 추스른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그저께 있었던 일을 상세히 쓰면서 사퇴를 하겠다는 자신의 뜻이 확고하다는 것을 거듭 밝혔다. 이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아들을 사랑한다면 아버지는 이 일에 대하여 자신의 뜻을 받아들여 달라는 입장을 분명히 적었다. 우편으로 편지를 발송하고 다시 앓아 누운 모차르트는 오후에 일어나 이번에는 흥분한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아버지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를 썼다.

     

    모차르트는 같은 날(5월 12일), 두 통의 편지를 따로 보냈다. 한 통은 정식 우편으로 보내고, 다른 한 통은 친지를 통해 보냈다. 이 편지를 받고 놀란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마음을 돌리려고 몇 통의 답장을 보냈다. 5월 16일부터 6월 9일까지의 모차르트가 쓴 네 통의 편지(5월 16일, 5월 19일, 6월 2일, 6월 9일) 내용으로 추정해 볼 때 아버지의 설득과 레오폴트와 아르코 백작이 말을 맞춰 사태를 회복하려고 보낸 여러 통의 편지가 있었던 것이 짐작되지만 화가 난 모차르트가 모두 찢어서 없앤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음은 모차르트의 답장 중 하나이다.

       

    -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빈에서, 1781년 5월 16일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

    (제가 틀림없이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계셨을 텐데) 이번 사건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바람에 아버지는 바로 울컥하신 겁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본 그런 투로 글을 쓰신 게 틀림없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한층 깊이 여러모로 생각한 끝에 아시고 또 간파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명예를 중히 여기는 남자로서 모욕을 한층 강하게 느꼈고, 이전부터 생각하던 일이 지금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일어났다는 사실을요. 잘츠부르크에서 빠져나오기가 점점 어려워질 뿐입니다.

    ......

     

    그리고 또 저를 단단히 믿어주세요. 저는 아버지를 압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생각하는 제 선량한 마음도 알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 믿어주세요. 제 이성이 명하는 바를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자면, 남자로서의 강점 모두를 쏟아 부울 필요가 있답니다. 아버지에게서 떠난다는 게 제게는 얼마나 가슴 쓰라린 일인지는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하지만 걸식하는 처지가 되더라도, 실제로 그 건은 이제 평생토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부탁이 있습니다. 온 세계의 모든 걸 걸고 부탁드리는 바이니, 제 결심을 멈추게 하지는 말아주십시오, 관철하도록 격려해주세요. 아버지는 제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십니다. 제 소원은, 제 희망은, 명예와 명성과 돈 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잘츠부르크보다는 빈에 있는 편이 아버지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프라하로 가는 길 또한, 잘츠부르크에 있는 것보다는 막혀 있지 않습니다.

    최고인,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기다리겠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에게 힘을 북돋아주십시오.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 있으면서도, 아버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생각하기만 해도 저는 아주 비참해집니다.

    안녕히……

     

    변하지 않는 자유에 대한 갈망

    레오폴트는 아르코 백작에게 자신은 절대로 아들의 입장을 수용하지 않고 빨리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알리고 모차르트에게도 이러한 뜻을 보내고 대주교를 찾아가 잘못을 빌라고 독촉했다. 모차르트는 계속되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실망과 허탈감에 빠졌다. 대주교에 대한 반항이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전개되는 상황에서 모차르트는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하는 기로에 섰다.

     

    6월 2일 모차르트는 사직을 위해 다시 징거슈트라세 7번지에 있는 궁전으로 아르코 백작을 찾아갔다. 백작이 모차르트에게 말했다. “내 말을 들어보게 여기 빈에서는 누구나 유혹에 넘어가네. 치솟은 명성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처음에는 모두들 칭찬을 늘어놓고 대우를 해 주네, 수입도 늘어나지만 오래가지 못하네. 몇 달만 지나면 빈 사람들은 금세 새로운 것을 찾아가지” 잘츠부르크를 떠나려는 모차르트와 이를 막으려는 궁정 쪽의 굽히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은 한 달이 넘게 지속되었다.

     

    사건의 전모는 빈의 상류사회로 퍼져서 양편의 의견 대립으로 번져갔다. 나아가 각각의 입장이 대립하여 논쟁이 벌어지곤 하였다. 6월 8일, 모차르트는 궁정을 찾아가 세 번째 사직 허락을 요구했다. 영주의 입장을 고수하지 못한 아르코 백작은 마침내 이성을 잃고 분노의 폭발이 행동으로 나타났다. 아르코 백작은 고집 센 청년 모차르트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궁전 밖으로 끌어냈다. 모차르트도 격분했다. 궁정의 모욕과 폭행은 청년 모차르트의 자제력을 극한까지 몰고 갔다.

     

    봉건과 계몽의 이중 혁명시대

    18세기 후반, 이 시기는 모차르트가 태어난 1756년부터 1763년까지, ‘7년 전쟁’이라는 큰 전화로 잘츠부르크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어려움을 겪고 난 뒤였고, 1789년부터 시작되는 프랑스대혁명(1789~1794)이 다가오는 혼란의 때였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음악가가 교회와 궁정에서 일자리를 갖고 있지 않으면 먹고 살 길조차 막막한 봉건시대에서 모차르트가 성공하기 전까지는 현실을 감내하며 잘츠부르크를 떠날 수 없었지만, 모차르트는 세상을 여행하며 끝 모르게 펼쳐져 있는 세상을 경험하여 자신의 재능을 자각한, 자유 예술인을 추구하는 계몽 시대의 삶을 시작하고 있었기에 자신을 구속하지 않는 넓은 하늘로 훨훨 날아가고자 잘츠부르크를 떠나야만 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부자의 갈등은 세대 문제, 지역 문제, 신분 문제 이 세 가지가 겹쳐있었다. 잘츠부르크를 떠나려는 아들의 태도는 아버지인 자신이 거부당하고 자식의 성공을 위해 기울인 피나는 노력을 허물어뜨리고 절망의 길로 떠나는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입장에서는 마음껏 음악을 할 수 없는 잘츠부르크와 아버지와 대주교가 자신을 가두는 새장의 집합체로 여겨졌다. 아버지의 걱정은 틀리지 않았다. 빈에 남고자 하는 모차르트는 아무런 준비 없이 잘 될 것이라는 희망만 가지고 모험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 모험은 아버지의 충고를 듣지 않고 끝까지 밀고 간 생애 최초의 사건이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분명한 자기 인식을 가지고 감행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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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송 박사 자료제공 - '1781년 3월 16일부터 5월 2일까지 모차르트가 이 집에서 거주하였음' 잘츠부르크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고 쫓겨났던 오스트리아 빈의 독일기사단 건물 에 붙어있는 명패(당시 잘츠부르크 임시 궁정)

     

    마침내 문이 열린 새장

    빈 시민의 관심 속에 모욕을 받으며 사직을 받아 낸 사건 현장은 잘 보존되어 있다. 빈의 징거슈트라세 7번가 ‘독일 기사단의 집’에는 ‘엉덩이를 걷어차이며 쫓겨난 곳’이라는 말 대신 ‘1781년 3월 16일부터 5월 2일까지 모차르트가 이 집에서 거주하였음’ 이라는 명패가 걸려있다. 모차르트에게는 굴욕의 장소인 동시에 음악사에서 최초의 자유 음악인으로 새롭게 출발한 역사의 장소이다. 1781년 6월 8일은 모차르트가 세대와 지역과 신분의 새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행복한 날이었다. 그날 처음으로 느낀 자유를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인간의 마음이 인간을 귀족으로 만듭니다. 나는 귀족이 아니지만 다른 수많은 귀족들보다도 더 큰 명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