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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㉓ 모차르트의 반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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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㉓ 모차르트의 반항

임 송 문화예술학 박사
여수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표 예술감독

임 송 박사 자료제공 - 18세기 말의 링슈트라세(Wien Ringstrassen) 거리 풍경.jpg
임 송 박사 자료제공 - 18세기 말의 빈 링슈트라세(Wien Ringstrassen) 거리 풍경

 

[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이야기㉓ 모차르트의 반항

18세기 후반의 유럽은 궁정사회로서 예술을 포함한 문화의 변화는 왕족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귀족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 계층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지배자들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대에 활동하던 음악가는 피지배층으로서 지배층의 예술적 감성과 취향에 맞추어 작곡하고 연주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였다. 그렇게 하여야만 인정받을 수 있었고, 기본적인 생활과 명성도 유지할 수 있었다.

 

수공업 예술시대로 구분되는 당시의 예술적 기준과 가치는 예술가 개별의 창조적 영감보다는 주문자의 취미 성향과 의도가 기본 규범이었다. 지배층이 요구하던 음악은 미사곡ㆍ교회 소나타 등의 종교음악과 행진곡ㆍ디베르디멘토(divertimento)ㆍ희유곡(嬉遊曲) 같은 그 시대의 유행음악이었다. 모차르트도 이러한 흐름의 수요에 대해 최대한 발맞추기도 했지만 끝없이 솟아나는 오페라 창작의 샘물을 절제해야 하는 압박감도 함께 누적되고 있었다.

 

1781년 4월 17일 콜로라도 대주교는 빈에 마련된 임시 궁정의 집무실로 모차르트를 불렀다. 빈에서 그의 인기가 치솟고, 당사자가 직접 일자리를 구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훌륭한 재능을 가진 인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대주교였지만, 모차르트가 그러한 실력과 재주를 잘츠부르크를 위해서 쏟아주기를 원하였기에 빈을 떠날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모차르트는 당황했다. 언젠가 잘츠부르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명령이었다. 툰 백작부인으로부터 슈테파니(빈의 배우)를 통해 오페라 '후궁 탈출'을 주문할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고, 이미 잘츠부르크보다 더 편성이 큰 오케스트라를 제공 받아 작곡과 연습을 시작한 상태였다. 더구나 작곡료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 돈을 빌려서 생활하며 곡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주교에게 이유를 설명하며 당장은 떠날 수 없다고 하소연 하였다.

 

1781년 5월 1일, 모차르트는 시종에게서 ‘짐을 싸서 당장 이곳 궁정에서 나가라고 명하셨다’라는 대주교의 전언(轉言)을 받았다. 그러나, 잘츠부르크로 돌아가라는 말은 빠져 있었기에 계속 빈에서 궁정으로 입궁하며 선처를 기대했다. 5월 9일, 대주교는 모차르트에게 중요한 물건 하나를 직접 배달해야 하니 지금 받아서 바로 출발하라고 독촉했다. 모차르트는 ‘저는 음악가이지 짐을 운반하는 하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빌린 돈을 갚아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 곤란합니다’라는 설명을 계속하였다.

 

대주교는 요제프 2세 황제의 개혁정책을 따르고는 있었지만 혁명의 분위기로 변해가는 프랑스를 비롯한 세상의 변화에 대해 불만이 쌓여있던 터였다. 화가 난 대주교는 모차르트에게 모욕적 표현과 욕설(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 의하면)을 퍼붓기 시작했다. 볼테르, 루소 이런 것들이 나의 궁정음악가를 망쳐 놓았다며 더욱 분개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모차르트는 당장 사직서를 내겠다고 말하고 비서관 아르코 백작에게 이끌려 나왔다. 모차르트는 이날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바로 편지를 썼다.

 

-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빈에서, 1781년 5월 9일

……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

아직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역시, 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니까 아마 저와 같은 심정이시겠죠. 제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모두들 지금까지 시험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결국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제 더는 잘츠부르크에 취직한 불행한 신분이 아닙니다. 오늘은 제게 행운의 날이었습니다. 들어보세요.

 

지금까지 두 번이나 그(뭐라고 불러야 할지 도통 모르겠네요)가 저를 마주 보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알려드리지 않았던 이유는 아버지에게 상처를 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언제나 최고인 우리 아버지, 아버지를 눈앞에 떠올리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반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게 '애송이', '너절한 놈'이라며, '꺼져버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모든 걸 인내했지만, 이번에는 그가 제 명예뿐 아니라 아버지의 명예까지 손상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잠자코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러는 게 낫다고 생각하실 것 같아서요.

 

하지만 들어주세요. 1주일 전 심부름꾼이 불쑥 들어오더니, 지금 바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미리 날짜가 정해져 있었고, 저만은 결정되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허겁지겁 여러 물건들을 트렁크에 쑤셔 넣었습니다. 그리고 베버 노부인이 친절하게도 집을 사용하게 해주셨습니다. 그 집에서 깔끔한 방을 받았죠. 갑자기 필요한데 혼자서는 마련하기 힘든 물건이 생길 때면 도와주곤 하는, 배려심 깊은 사람 집에 있는 겁니다.

 

저는 수요일(그러니까 오늘 9일)에 보통 편으로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받기로 한 돈이 그때까지 아직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출발을 토요일까지 미루었습니다.

 

......

 

그러자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몰아댔습니다. 너처럼 칠칠치 못한 애송이는 본 적이 없다, 이렇게 근무 태도가 나쁜 인간은 없었다, 오늘 안에 떠난다면 몰라도, 제가 가는 곳에 편지를 써서, 급료를 주지 않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잔뜩 화가 나서 몰아대는 바람에 대꾸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태연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제 급료가 500플로린(사실은 450플로린)이라고 얼굴을 맞대고 거짓말하면서, 저한테 버릇없는 놈, 못된 놈, ‘펙스’(바보. 이 말에 모차르트는 특히 화가 났다. 잘츠부르크의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크레틴병과 정신병 환자가 당시 ‘Fex’라고 불렸기 때문이다)라는 겁니다. 아, 모두 여기에 쓰고 싶지 않습니다. 마침내 피가 끓어오르는 바람에 저는 한마디 했습니다.

“그럼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겁니까?”

“뭐라고? 네놈이 날 협박할 셈이냐? 바보 멍청이, 밥통아! 나가라! 알겠냐? 네놈 같은 천덕꾸러기 애송이한테는 이제 볼일이 없다.”

마침내 저도 말했습니다.

“나도 이제 당신에게는 볼일이 없습니다.”

“자, 나가라고!”

그래서 저는 나가면서 “이제 결정되었습니다. 내일 문서를 제출하겠습니다”라고 했죠.

 

최고인 우리 아버지, 말씀해보세요. 제가 이런 말을 한 게 너무 이르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늦은 게 아닐까요? 들어보세요. 제 명예는 저로서도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걸 저는 압니다.

저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곳에서 제 일에 대해서는 자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이유가 없었더라도 사직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이유가 생긴 겁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그러니 이건 제 승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두 번씩이나(지난번 알현 때) 비굴했었으니까요. 세 번째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대주교가 여기 있는 동안에는 발표회를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귀족이나 황제에게 신용을 잃으리라 여기신다면, 전적으로 잘못 생각하시는 겁니다. 대주교는 여기에서 혐오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황제가 가장 싫어합니다. 황제가 대주교를 락센부르크(빈 남쪽, 황제의 별장이 있는 곳)로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그 증거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곤란하지 않다는 걸 믿으실 수 있도록 다음 편지로 돈을 조금 보내겠습니다.

 

어쨌든 건강히 계세요. 제 행운은 이제 시작이니까요. 그리고 제 행운은 아버지의 행운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그것으로 만족해하신다는 걸, 제게 몰래 써 보내주세요. 실제로 만족하실 테니까요. 하지만 겉으로는, 아버지가 죄를 뒤집어쓰지지 않도록 저를 냅다 야단쳐주세요. 그럼에도 대주교가 조금이라도 아버지에게 무례하게 굴거든, 바로 누나하고 함께 제가 있는 빈으로 오세요. 세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명예를 걸고 보증합니다. 하지만 1년 만 더 참아주신다면 더 좋습니다.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제가 지내던) 궁정으로는, 소포가 딸린 편지는 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츠부르크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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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송 박사 자료제공 - 현재의 빈 링슈트라세(Wien Ringstrassen) 거리 풍경

 

5월 9일의 궁정사건 마지막 장면은 모차르트의 편지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 사료 검토의 측면에서 볼 때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일 수 있다. 대주교의 언행에도 다소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러나, 결국 5월 초에 궁정에서 쫓겨나 옛 사랑 알로이지아 가족의 집에서 하숙하면서 궁정에 출근하던 모차르트와 영주(대주교)의 관계는 이날, 파국에 이르렀다.

 

대주교의 입장에서 모차르트의 반응은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다. 일자리를 찾아 여러 나라를 돌던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 받아들였던 잘츠부르크의 영주로서, 단지 복종을 받아내고자 할 뿐이었는데 하인이 오히려 자신에게 스스로 사퇴를 선언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모차르트의 결심은 확고했다. 다음날 5월 10일 모차르트는 대주교의 비서관 아르코 백작에게 사직을 허락해 달라는 공식 청원서를 제출했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leaderjj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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