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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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누가 책임을 방기한 것인가?[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누가 책임을 방기한 것인가?에서 '방기'라는 말은 어려운 용어일 수 있지만, 쉽게 말하면 ‘내버리고 아예 돌아보지 아니한다’라는 뜻입니다. 지난번 컬럼에서는 국가배상을 기술한 적이 있는데 최근 국가 및 지방자치 단체가 관리하는 기반시설의 방기로 인해 피해를 보시고 필자를 찾아주는 경우가 많아 사례와 청구적격에 대해서 오늘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흔히 말해서 포트홀은 도로 위 불청객이라고 합니다. 지난 해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서울시 도로의 포트홀은 총 17만 8,475건 (총 28만 541㎡)이나 발생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매년 축구장 12개에 해당하는 면적이 포트홀로 돌변하는 것입니다. 포트홀로 인해 접수된 자동차 손해 사고접수 또한 연 약 500여 건이며, 지방자치 단체가 가입한 배상책임 보험에 따라 포트홀 사고접수로 지급된 금액은 22.7억에 이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포트홀의 사고접수는 자동차에 장착된 블랙박스를 통해 사고의 견력성과 입증이 쉽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실제 포트홀 사고가 아닌 인도 및 생활도로상 빙판 낙상사고경우는 입증하기가 힘들어 개인치료를 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지나가다가 빙판으로 낙상사고의 경우는 젊은 나이의 청소년 층에서는 타박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치만, 노년층의 경우는 골밀도가 낮고 뼈의 강도가 약해 가벼운 부상에도 골절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겨울철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다가 아파트 입구 빙판으로 인한 낙상사고를 당해 수주의 입원치료와 고액의 치료비를 개인이 부담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에, 조금은 도움을 드리고 이 컬럼으로 안내하오니 관련사항 발생 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아파트 시설물에는 관리사무소 등 관리주체가 관리해야할 법적 책임이 있습니다. 집합건물이든 공동주택이든 공유지에서 발생된 사고에 대해 책임이 관리주체에 있다면 법적책임을 물을 수 있으나, 실제 관리주체가 사고 현장에 미끄럼 주의 표지판을 설치하거나 제설제를 뿌리는 등의 안전성을 유지하고자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는 사유가 있다면 관리주체의 책임은 그만큼 감소될 수 있습니다. 실제 판례를 확인하여 보면 관리주체의 노력 여부에 따라 전체손해액 발생금액 중 30% ~ 90%까지 지불하는 경우는 관리주체의 평소노력 여부에 따라 판결이 다 다릅니다. 또한, 겨울철 인도를 가면서 빙판길이나 돌출될 보도블록으로 인해 넘어지거나 낙상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이를 지방자치 단체에 발생된 손해액을 청구가 가능하나, 관리부주의로 인해 발생된 사고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주변 CCTV를 잘 활용하실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 주변에는 상당히 많은 CCTV가 있어 해당 CCTV를 관리ㆍ유지하는 단체 및 관리청에 정보요구를 할 수 있으며, 넘어지거나 낙상사고가 발생된 시간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기록 후 정보요구를 할 경우 해당사건이 발생된 사건현장 동영상을 손쉽게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를 근거하여 지방자치 단체에 배상액을 청구하는 경우 빠른시간내에 손해배상액을 지급받으실 것으로 판단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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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③ 파리ㆍ런던 연주여행[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파리ㆍ런던 연주여행 (1763 6월 9일~1766년 11월 29일 1,269일간) 뮌헨과 빈 여행을 마친 레오폴트는 곧바로 유럽 전역의 궁정 순회를 계획했다. 독일ㆍ프랑스ㆍ벨기에ㆍ네덜란드와 영국까지 다녀오는 긴 여정이었다. 1763년 6월 9일부터 다시 시작된 연주 여행은 1766년 11월 29일에 끝났다. 1,269일간 88개의 도시와 마을에서 연주했다. 서양음악의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대기록이었다. 일곱 살이 된 모차르트가 부모와 누이와 함께한 두 번째 여행 연주도 빈 연주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구입한 마차로 뮌헨에서 시작됐다. 레오폴트가 남긴 상세한 기록에 의하면 모차르트 남매는 님펜부르크 궁전에서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를 위해 연주했다. 연주에 감동한 막시밀리안 3세는 100굴덴을 하사했다. 모차르트 가족은 라인 강을 따라 북쪽으로 갔다. 울름을 지나 7월 9일 루트비히스부르크, 7월 14일 브루흐잘을 지나 슈베칭엔(Schwetzingen)에 도착했다. 팔츠 선제후의 여름 궁전이 있는 슈베칭엔에서는 당시 유럽 최고의 악단으로 꼽혔던 만하임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괴테의 모차르트 연주 감상 1763년 8월 10일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네 차례 연주회를 가졌다. 8월 18일 연주회에 14세의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참석했다. 모차르트의 연주를 보았고 8월 25일 간단한 기록을 남겼다. '사물의 본질을 표현해내고자 우리가 그동안 쏟아 넣은 모든 노력은 모차르트가 세상에 나타나면서 곧바로 헛수고가 되어 버렸다.' 괴테는 훗날 제자이자 비서였던 요한 페터 에커만에게 모차르트에 대한 첫인상을 '나는 그가 일곱 살 소년으로 연주 여행을 하고 있었을 때 본 일이 있었는데, 머리를 곱슬 곱슬하게 땋아 내리고 칼을 차고 있던 모습이 눈에 아주 인상적이었네.'라고 말했다. 괴테는 모차르트 음악을 높이 평가해 1802년 '마술피리 2부'를 썼다. 자신의 '파우스트'를 오페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작곡가로 간주했다. 음악가 모차르트를 회화의 라파엘로나 문학의 셰익스피어와 같은 수준으로 보았다. 괴테는 천재의 정의를 의미 있고 지속적인 생명력을 갖고 활동하는 생산력으로 규정했다. 모차르트의 모든 작품이 그런 활동의 산물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모차르트 가족은 11월 18일에 파리에 도착했다. 레오폴트틑 루이 14세의 외손자인 루이 오를레앙 공작의 비서를 하는 프리드리히 멜키올 그림 남작을 찾아갔다. 독일에서 태어난 그림 남작은 프랑스에 정착한 뒤 문예비평가로 활동하며 디드로와 루소 등과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림 남작은 모차르트 남매를 도와주기로 작정하고 1763년 12월 자신의 문예지에 모차르트 가족에 대해 호의적인 글을 기고했다. - 잘츠부르크의 궁정 악장이 최근 자신의 두 아이를 데리고 도착했다. 열한 살 난 그의 딸은 최상의 우아함으로 하프시코드를 연주한다. 남동생은 기적과도 같은 비범한 신동이라서 직접 보고 듣고 있는데도 도무지 믿기 힘들 정도다. 1시간 동안 독창적인 영감에 의존해서 악보 없이 연주하는 모습이 그렇다. 흥겨운 악상들을 조화롭고 우아하게 편곡해서 청중을 놀라게 한다는 점이 특히 대단하다.- 문예지 ‘문화통신’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의 글은 파리 상류층과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모차르트의 이름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성탄절 하루 전날 베르사유 궁전에서 초대장이 도착했다. 모차르트는 크리스마스와 이듬해 정월 초하루까지 2주 간 동안 베르사유 궁전에 머물면서 연주회를 열었다. 프랑스 청중들은 모차르트의 연주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764년 신년에 두 달 동안 모차르트는 하프시코드와 바이올린 소나타 작품 Kㆍ6번과 Kㆍ7번을 필사해 루이 15세의 공주 빅투아르 루이 마리에게 헌정했다. 4월에는 두 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Kㆍ8번과 Kㆍ9번을 레오폴트가 필사하여 왕후의 여시종장 테세 백작부인에게 헌정하였다. 이 악보는 모차르트의 작품으로는 최초로 출판된 것이었다. 모차르트 가족은 프랑스 국왕 루이15세로부터 50루이와 금으로 된 담뱃갑을 하사받았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ohann Christian Bach1735~1782)와의 만남 1764년 4월 10일 모차르트 가족은 파리를 떠나 런던으로 향했다. 런던에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도버 해협을 건너야 했다. 레오폴트도 처음에는 런던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1764년 4월 23일부터 이듬해 7월 24일까지 1년 넘게 체류했다. 단일 여행지로는 최장 기간이었다. 런던에 도착해 나흘째 되는 날, 조지 3세를 알현했다. 당시의 영국 국왕 조지 3세는 독일 하노버 선제후 출신이었다. 런던 여행에서 언어의 소통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모차르트 가족에게 대단한 행운이었다. 모차르트는 조지 3세의 명으로 헨델과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작품을 연주했다. 런던의 여정은 모차르트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특히 음악적으로 중요한 의미는 영국에 머물던 작곡가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와의 만남이었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두 번째 부인 안나 막달레나 바흐 사이에서 얻은 막내 아들이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15세 때 아버지를 여읜 뒤 프로이센의 궁정 음악가였던 둘째 형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를 따라 베를린으로 가서 형에게서 음악을 공부했다. 이들 형제는 스물 한 살이나 나이차가 났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1756년에 21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한 뒤 밀라노 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됐고, 1762년에는 자신의 오페라 초연을 위해 영국으로 갔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1763년 오페라들이 성공을 거두자 영국에 정착했고 왕비 샬럿의 음악 교사를 맡았기 때문에 ‘런던 바흐’ 또는 ‘영국 바흐’로 불린다. 모차르트가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를 처음 만난 것은 1764년 영국 런던에서였다. 닌네를의 일기장에 의하면, 요한 크리스티안이 소년 모차르트를 무릎 위에 앉히고 먼저 몇 마디를 연주하면, 곧이어 모차르트가 연주를 이어 갔다고 한다. 훗날 난네를은 '이 장면을 보지 않은 사람은 한 명이 연주하는 줄 알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모차르트는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관현악곡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교향곡 1번 (Kㆍ16)을 작곡했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교향곡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었다. 모차르트가 피아노 소품과 바이올린 소나타에 이어서 드디어 교향곡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차남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가 하이든과 베토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면, 막내 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모차르트를 통해 빈 고전파 음악의 발전에 공헌했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영향을 받아 작곡한 교향곡 1번은 모차르트의 감수성과 창의력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다. 1764년 5월 레오폴트는 친구 하게나워에게 보낸 편지에 '우리가 잘츠부르크를 떠날 때 볼프강이 알고 있던 건 지금 터득한 것에 비한다면 그저 하찮을 뿐이라네. 독창력과 상상력이 넘쳐 흐르고 있지'라고 적었다. 1765년 2월 런던에서는 모차르트의 교향곡만이 선곡된 연주회가 열렸다. 모차르트가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 받은 영향은 교향곡 1번에 그치지 않았다. 1772년에는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피아노 소나타들을 피아노 협주곡 3곡 직접 편곡했다. 그리고 1778년에 파리에서 ‘런던 바흐’와 다시 상봉하게 되었다. 그해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보낸 편지에는 '런던의 바흐는 벌써 14일째 파리에 머무르고 있는데 조만간 프랑스 오페라를 쓰게 될 것 같습니다'면서 '아버지! 저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라고 적었다. 1782년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영국인 바흐가 타계한 것을 알고 계시겠지요. 음악계에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적었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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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음률 (음계) 에 대한 이야기②[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우리가 사용하는 음계의 이름은 중세 시대 처음 명명되었다. 종교적인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한 음악의 후대 전수를 위한 기보법이 필요해졌고 (이때까지 가사와 음높이로만 이루어진 노래를 외워서 전달했다.) 기보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교회의 성가곡을 전부 외우는데 10년이 넘게 걸렸다는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다가 11세기 이탈리아의 수도사 귀도다레쪼(Guido d'Arezzo)가 처음 기보법을 만들게 된다. ‘세례요한의 노래’라는 곡에서 첫 발음들을 차용해서 Ut, Re, Mi, Fa, Sol, La, Sa 의 음절이 그것인데 Ut의 발음을 Dominus(하나님의 의미)에서 가져와 Do 로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음계의 이름에 종교적인 의미부여로 각 음들의 이름이 정해진 것과 중세시대의 국가들의 권력과 사회적인 상황이 표준을 정하는 바탕이 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중세시대는 이탈리아의 위상이 종교와 접목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명명이 가능했다. 지난 글에서 음 사이 간격 (주파수의 높이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 했었는데 음계는 이미 피타고라스가 수학적으로 정리를 해놓은 상태였다. (만든게 아니고 정리라고 이야기한 이유는 음악은 그 이전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수학적인 기준에 이름을 붙인 것이니 이름을 정하는 것이 표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음악이 종교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것은 논리적 비약에 가깝다. 그리고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ISO (International Standards Organization)에서 그 이전까지 사용하던 이탈리아어의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이름을 영어의 알파벳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리스어가 기원이다.)으로 다시 표준이 정해진다는 점이다. 이 역시 당시의 국가적인 위상과 표준을 정할 때의 사회적인 논리가 바탕이 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종교적으로 본다면 그리스는 다신국가에 전혀 다른 신들의 언어로 음악의 기준이 옮겨간다는 의미도 된다.) 그리고 기준도 도(Do, C)음이 기준이 아닌 라(La, A)를 기준으로 한다. 도라는 음이름이 Dominus (하나님의 의미)에서 La(Lavii, 하나님의 입술, 사도들)로 옮겨 온 것이니 이런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도 생각해 볼만한 문제다. (신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로 바뀐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도 있다.) 최근 음악게에선 과학적인 접근이 더 강조되면서 음계의 Key (주로 알파벳으로 명명한다.)와 로마숫자 (I, II, III, IV, V, VI, VII)를 더 많이 활용한다. 인류가 존재하던 어느 시대, 어디에나 음악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음계의 이름이 있다. ‘궁상각치우’라고 이름이 붙어있는데 ‘도레미솔라’의 5음계 (대부분의 민속음계는 5음계이다.)의 이름이다. (당시 음 이름에 대한 차용은 중국을 기원으로 한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각기관인 청각에 대한 반응성에 근거한 예술적 기준을 이해할 때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살면서 의미 부여가 삶의 존재이유이고 그 의미부여는 곧 역사로 남기 때문이다. 음 이름은 종교적인 것에서 인간적인 것으로 지금 다시 과학적인 것으로 변하고 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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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앙코르가 품은 동물들, 권력의 상징 ‘코끼리’②[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한편 코끼리는 고대 앙코르의 토기 디자인에도 애용되었다. 위의 토기는 크메르 흑유 토기이다. 앙코르에서 검은색 유약을 바른 토기는 주로 1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흑유 토기 중에서도 토끼나 돼지, 올빼미 등의 새 모양 등 다양한 동물의 형태로 만들어진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만들어진 것이 코끼리 모양이다. 1981년에 작성된 보고서에 따르면 코끼리 모양 토기 안에 석회가 담겨 있었는데, 저자는 동남아시아에서 기호품으로 사용하는 베텔(Betel)을 씹기 위한 석회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견해가 맞다면, 코끼리는 일반 크메르인들도 일상적으로도 좋아하였던 동물이었던 듯하다. 크메르인들이 코끼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앙코르에 코끼리와 관련한 인도 신화 중 어떠한 신화가 유행하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앙코르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신화 속 코끼리는 '아이라바타(Airavata)'이다. 주로 사원의 출입구 상단에 설치된 장식린텔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힌두 신화에 따르면 아이라바타는 사무드라만탄, 우유 바다 휘젓기 과정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신들은 불로불사의 영약을 만들기 위해 생명력이 넘치는 우유 바다를 천년에 걸쳐 휘저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진귀한 것들이 탄생했다. 그중 하나가 흰색 코끼리인 아이라바타이다. 아이라바타는 하늘의 신, 천둥번개의 신이자 신들의 왕이라 불리는 인드라의 탈 것이 되었고, 그 후 구름을 생성하는 등 인드라와 관련된 권능이 부여되었다. 원전에 따르면 다섯 개의 머리와 열 개의 상아가 특징이라 하지만, 앙코르에서는 머리가 셋인 경우가 많으며, 하나의 머리로 묘사된 경우도 있다. 아이라바타에 대한 이미지는 신비로우며 신성한 느낌이 있다. 코끼리와 관련된 신화 중에는 가네샤(Ganesha) 이야기도 널리 유행했다. 가네샤는 시바신의 아들로 코끼리의 머리를 하고 있다. 배가 볼록하게 나와 있으며, 한 손에는 부러진 상아를 들고 있다. 쥐 (혹은 망구스)와 함께 표현되기도 한다. 가네샤가 코끼리 머리를 가지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시바는 아내 파르바티를 집에 두고 먼 길을 나섰다. 시바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그 사이에 파르바티는 시바의 아들 가네샤를 낳았고, 가네샤는 늠름하게 성장해가고 있었다. 어느 날, 파르바티는 아들 가네샤에게 목욕을 하려 하니 집에 사람을 들이지 말라고 말하고 목욕을 했다. 가네샤가 집 앞을 지키는 동안 아버지인 시바가 오랜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바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 수 없었던 가네샤는 어머니의 말을 들어 시바가 집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막아섰다. 여기에 분노한 시바는 가네샤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파르바티는 사태를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시바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시바는 자신의 보좌역인 난디에게 북쪽으로 가서 잠자고 있는 자의 머리를 가져오라 지시했다. 난디는 코끼리의 머리를 가져왔고, 시바는 가네샤에게 코끼리 머리를 붙여주었다. 이렇게 시바의 아들인 가네샤는 코끼리 머리를 가지게 되었다. 가네샤는 힌두교 신자들로 하여금 지혜와 부의 상징으로서 숭배되었다. 엄격하며 무서운 시바에 비해, 코끼리 머리에 어린 아이의 몸을 한 가네샤는 친근한 인상에 다가가기 쉬워 신자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끌었다. 또한 부의 상징이었기에 상인들의 지지를 크게 받았다. 가네샤를 통해 볼 수 있는 코끼리의 이미지는 친근함과 부유함 등을 꼽을 수 있을 듯하다. 한편, 락슈미 여신을 묘사할 때에도 코끼리가 등장한다. 주로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락슈미 여신의 좌우에서 코끼리가 성수를 뿌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락슈미 여신은 비슈누 신의 아내이자, 지혜의 여신이다. 따라서 락슈미 여신을 보좌하는 코끼리 또한 지혜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코끼리는 불교에서도 매우 특별한 존재로 그려진다. 부처의 어머니였던 마야 부인은 흰색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가는 태몽을 꾸었다. 또한 보현보살이 타고 있는 것도 코끼리이며, 제석천(인드라)이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게 되면서 여전히 코끼리와 함께하고 있다. 하지만 부정적인 관점에서 코끼리가 묘사된 불교 설화도 있다. 부처의 사촌인 데바닷타가 부처를 시기하여 코끼리 날라기리(Nalagiri)를 술에 취하게 하여 부처의 목숨을 노리는 계책을 썼다. 하지만 난동을 부리던 날라기리 앞에 부처가 나타나자 곧바로 난동을 멈추고 고분 고분해졌다고 한다. 이 설화는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상좌부 불교가 유행한 대륙부 동남아시아에서는 매우 유행했던 설화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코끼리는 고대 앙코르에서 국력을 상징하는 강력하고 무서운 동물이며, 유용한 동물이었다. 또한 신성한 존재로 여겨지는 한 편으로 고마운 존재였다. 하지만 앙코르 왕조의 몰락, 그리고 세상의 변화와 함께 코끼리의 위상도 많이 떨어졌다. 신을 모셨던 사원들이 관광지가 되어버린 만큼 앙코르의 코끼리도 관광상품으로 전락했다. 한때, 앙코르에서는 십여 달러를 지불하면 코끼리를 타고 앙코르 유적의 특정 구간들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러던 2016년 4월 22일, 관광객을 태우고 프놈바켕 산을 오르내리던 코끼리 한 마리가 탈진하여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4월은 캄보디아가 가장 더운 시기로, 40도가 넘는 더위는 코끼리에게도 고통이었을 것이다. 사건 이후로 코끼리 관광은 잠정적으로 중단되었지만, 사건 전모가 SNS를 통해서 퍼지기 시작하며, 세계 각지 동물 애호가들로부터 비난 여론이 형성되었고, 국제적인 이슈가 되었다. 결국 앙코르 유적을 관리하는 캄보디아 정부기구인 압사라청(National APSARA Authority)은 2020년부터 코끼리를 활용한 관광을 완전히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코끼리를 돌보며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계획을 발표했다. 앙코르의 역사에서 수천 년을 인간과 함께 공존하며 살아온 코끼리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함께하게 될 것인지, 그 귀추가 자못 궁금하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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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오케스트라와 음악 : 세계 평화의 메신저[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음악의 힘: 냉전을 음악으로 해소 세계 냉전을 상징하던 동ㆍ서독의 베를린 장벽 붕괴사건은 1989년 11월 9일 있었다. 이를 기념하여 1989년 12월 25일에는 베를린 시내에서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레너드 번스타인의 지휘로 베를린필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공연이 있었다. 합창단은 서독과 동독, 미국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단원으로 구성되어 이 사건을 축하했다. 또한, 무너진 베를린 장벽 아래서는 러시아의 세계적인 첼로 거장 로스트로포비치가 벽을 넘은 베를린에 축하 연주를 선사하기도 하였다. 물론 세계 평화의 상징이 되었던 이 국경개방 사건은 당초 의도와는 다른 것이었으나 결국 동ㆍ서독의 통일로 이어지고 냉전 시대의 종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마에스트로 레너드합창 교향곡 4악장의 합창단과 솔리스트의 성악 부분은 괴테와 함께 독일 문학의 상징으로 숭상받는 쉴러의 시 ‘환희의 송가(Ode an die Freude)’를 가사로 한 것이다. 번스타인은 이 음악회 연주에서 ‘환희’를 ‘자유(Freiheit)'로 바꾸어 부르도록 한 일화는 유명하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를 의식한, 적절한 연출로 번스타인의 음악성과 평화에 대한 담대한 철학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2차 대전의 패배로 분단된 독일의 재결합을 기념하는 이 음악회를 지휘한 번스타인이 2차 대전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인 유대인이라는 점도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베토벤의 합창교향곡과 우리나라 아리랑 2008년 2월, 세계 3대 오케스트라의 하나인 뉴욕필하모닉오케스트는 로린마젤이라는 당시 현존하는 최고의 지휘자와 함께 북한 평양대극장에서 공연을 개최하였다. 북한의 심장인 평양에서 미국의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드볼작의 ‘신세계 교향곡’, 거쉬인의 ‘파리의 미국인’ 등이 연주되었다. 특히, 공연의 마지막 연주곡으로는 우리민요 아리랑이 연주되면서 1,500명의 평양시민은 어색한(?) 브라보와 앵콜의 함성으로 뒤덮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감동적인 장면으로 지금까지도 세계의 평화, 남ㆍ북한 문제와 통일을 이야기할 때 단골 메뉴로 회자되고 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코리아 공동국가는 우리민요 아리랑이었고 개막식에서의 남ㆍ북한 동시입장은 남과 북의 경계를 넘어서 지구촌 전 세계가 하나가 되는 장관을 연출하였다. 또한, 삼지연 관현악단의 강릉아트센터공연과 서울 국립중앙극장에서의 공연은 재미와 추억, 감동을 전달하기에 충분하였다. 여기에서도 홀로아리랑이 연주되면서 남과 북을 하나로 묶어내는 역할을 하였다. 약 이백년에 작곡된 베토벤 합창교향곡은 세계 어디에서나 연주되고 있는 인류의 평화, 휴머니즘, 세계의 화합을 상징하는 음악으로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하였다. 아리랑 또한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작곡가들로 구성된 선정대회에서 82%라는 높은 지지율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1위에 선정되기도 하면서 2012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예술사회학 : 음악과 평화 예술사회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미학자나 전통적인 예술비평가와는 달리, 변화하는 예술 스타일 등을 사회제도 및 구조라는 분석수준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미학자나 인문학자들이 예술에 대한 시각이나 견해는 순수예술에 중점을 두어 좁은 의미에서 정의되는 내적 관점에서 연구한다. 반면 사회학자들이 예술에 대한 시각은 예술형태의 범위를 더욱 폭넓게 설정하고, 그것을 사회적 과정과 조건의 결과로 보는 외재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우리 민요 아리랑과 베토벤 합창교향곡을 본다면 이 음악들은 미학이나 인문학을 넘어선 예술사회학 관점에서 보아도 흠잡을데가 없을만큼 사회적, 정치적 효과가 큰 것이다. 이처럼 음악이나 공연예술은 군중심리를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의 하나이다. 또한, 냉전관계를 해소하는 역할은 물론 정치적으로 막히거나 해결하기 곤란한 상황에서 해결을 위한 좋은 수단으로 활용되어진다. 지난 2002 한일월드컵과, 광화문 촛불집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음악은 군중을 국민을 하나로 묶어내는 역할을 하였다. 최근 세계 정상의 예술의 국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현대사회에서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해서도 안되는 상황이다. 더 이상의 파국으로 가기전에 이 사태의 해결의 단초가 음악을 통한 평화의 메시지 전달이 되기를 고대하고, 수준 높은 예술사회학적 관점에서 해결되기를 희망한다.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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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식품위생법 및 청소년 보호법 위반 방지 소개[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코로나로 인해 상담 및 의뢰가 없었던 식품위생법 제44조 영업자의 준수사항 위반에 관한 행정처분 의뢰가 최근에 다시 문의하는 경우가 많아 오늘은 식품위생법 제44조 영업자의 준수사항에 대한 처분기준과 이를 위한 예방책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행정처분 구제업무에 있어서 일선에 있는 필자와 같은 행정사들은 일반인들이 어떠한 문의를 자주하시는 발생빈도 및 경험에 따라 최근 일반인들 및 소상공인이 어떠한 문제점이 있고 이슈가 되고 있다는 판단을 합니다. 식품위생법 제44조 위반과 관련하여 가장 많은 사실적 요인으로써 만19세 미만의 청소년을 상대로 하여 음주를 판매하였다가, 청소년 당사자 또는 청소년의 지인 및 부모로부터 신고를 받아 출동한 경찰관에게 단속이 되어 형사처벌과 행정처분을 받는 경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영업을 개시하고 나서 한참 돈을 벌어야하는 영업자 입장에서는 벌금이 부과되는 형사처벌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으나, 식품위생법 제44조와 청소년 보호법 위반으로 영업정지 2개월(1회 적발 시)을 당하는 경우 심각한 위험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 또한 코로나 유행 이전에는 매년 청소년 음주판매로 인해 행정처분을 받아 필자를 찾아주시는 경우가 매해 20건 이상이었다는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실제 청소년 음주판매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이 발생되고 있음은 사실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과거 식품위생법은 영업자의 준수사항 즉 청소년에 대한 신분증확인 및 얼굴대조, 미성년자에 대한 음주판매 금지 고지 등의 책임을 다했더라도 이를 관할하는 행정청은 일부 기간만 감액해주거나, 처음 통지된 영업정지 기간만을 고수하였지만, 법령의 개정과 방침의 변경으로 최근의 경우는 영업자의 책임을 다하는 경우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영업장 내에서 미성년자에 대한 신분증 확인 및 절차를 진행하였다는 사항을 입증만 하면 식품위생법 및 청소년 보호법 위반으로 처벌 및 처분을 면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가급적 영업하시는 분들에게 영업장 내 CCTV 설치를 권장 드리며, 추후 식품위생법 위반사항이 발생하더라도 CCTV에 있는 동영상을 입증자료로 제출함으로써 그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하게 설명 드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일부 청소년들이 이러한 점을 악용하여 가족 및 친지, 분실된 주민등록증을 변조하여 일단 신분증 검사를 받은 후 주민등록증을 불특정 장소에 버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과 영업자 모두를 속이는 방식으로 음주를 하는 경우가 많아 정확한 증거자료 확보를 어렵게 하는 경우가 많으며, 증거자료의 부재로 인해 영업정지를 부당하게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고자 저는 항상 CCTV를 설치하여 운용할 것을 권고 드립니다. 최근 필자를 찾아 주신 의뢰인의 경우는 다행이 사설업체의 CCTV가 설치되어 있는 사항을 확인하여 관련 자료를 확보 후 검찰 및 행정청에 제출하여 검찰로부터는 불기소 처분, 행정청으로부터는 이의신청서 인용처리를 받아 형사처벌과 행정처분으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음은 알고 계셔야하는 사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끝으로, 코로나로 인한 영업금지 조치가 완화된 상태에서 일반인 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의 음주행위는 더욱 많아 질 것으로 예상이 되니, 최대한의 사전조치를 해 두시길 당부 드립니다.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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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② 천재적 재능에 대한 재조명 2[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모차르트의 재능은 천부적인가 어린 시절 특출한 재능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신동은 어느 시대이건 존재했지만, 어른이 되어서까지 그 명성을 지켜나간 신동은 드물었다. 예를 들면 6살 때 루이14세 앞에서 하프시코드를 연주했고 프랑스 최초로 오페라를 완성한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뛰어난 음악가로 이름을 날린 프랑스의 엘리자베스 드라게르(1665~1729), 6살부터 뛰어난 연주를 했고 나중에 노트르담 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된 천재 오르가니스트 루이 클로드 다캥(1694~1772) 등이 그들이다. 타고난 천재가 저절로 거장이 되는 경우는 매우 희박하지만, 남모를 교육과 부단한 노력으로 시대를 풍미하며 우뚝 솟은 거장이 된 경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경우다. 모차르트의 일생은 ‘부여받은 천재적 삶’이라기보다는 성장기 환경요인과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완성된 ‘만들어진 창의적 삶’이라 볼 수 있다. 환경요인은 아버지 레오폴트의 헌신적 교육과 지속적으로 이어진 유럽여행이었고 스스로의 노력은 어린 모차르트가 성장하며 헤쳐 나간 경험에 대한 수용과 재창출의 능력이었다. 오늘날은 물론이요 영원히 식지 않을 것 같은 ‘모차르트 효과’에 대한 열풍의 이유는 무엇일까. 수많은 연구와 이론이 존재하지만 그 중 가장 큰 하나를 지목한다면 모차르트의 음악이 인간의 두뇌활동과 심리적 치료에 큰 효과가 있다고 하는 굳은 믿음일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차르트 효과’ 현상을 살펴보면 상당히 모순적이고 비과학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레오폴트가 보여 준 아버지로서의 판단과 추진력, 모차르트가 감당한 세상에 대한 감수성과 창의력을 우리는 매의 눈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차르트는 3살 때부터 하프시코드를 치고, 5살 때에 짧은 미뉴엣을 작곡했다. 6살 때에는 바이올린을 켜고 연주여행을 통해 국제적인 연주활동을 했다. 유럽의 많은 음악가들은 놀라거나 반겼고 또는 질투하고 무시했다. 우호적인 입장은 하이든 등이었다. 배타적인 사람들은 이탈리아 출신의 중견 음악가들이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알아내고 철저하게 개인지도를 했다. 모차르트의 재능을 확신하며 세상에 알리려는 의무감이 넘쳤다. 어린 모차르트는 아버지를 잘 따르고 배우는 일을 즐겼다. 보이는 것은 모두 익히려는 마음으로 악기를 잡고 앉으면 시간이 흘러도 일어나지 않을 만큼 배움에 열정을 나타냈다. 선택한 길과 포기한 길 레오폴트는 사제가 되기를 바랐던 그의 아버지가 1736년에 세상을 떠나자, 고향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잘츠부르크로 이주했다. 음악의 도시 만하임으로 가지 않고 전성기가 지난 잘츠부르크로 온 것은 당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공존한 아우구스부르크를 중심으로 서북쪽 만하임은 프로테스탄트가 번성하고 동남쪽 잘츠부르크는 가톨릭이 대세였기 때문이었다. 1737년부터 철학과 법학을 공부하지만 중퇴를 반복하는 방황의 기간을 끝내고, 당시는 음악가의 처지가 하인과 다르지 않았음에도 결국 직업 음악가의 길을 선택했다. 1740년에 요한 밥티스트 백작의 시종을 겸하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고 연주활동과 작곡 발표를 병행하며 기량을 향상하여 1743년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악단에 바이올린 연주자로 들어가 1757년에 궁정악단 작곡자로 임명되고 1763년에는 궁정악단 부악장이 되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아내 페르틀과 6살 된 아들 볼프강 그리고 10살 난 딸 난네를을 데리고 떠난 24일간의 제1차 뮌헨 여행(1762.1.12.~2월 초)과 109일 간의 제1차 빈 여행(1762.9.18.~1963.1.5.)은 두 자녀의 뛰어난 재능을 발견하고 음악교육에 전념한 레오폴트가 내린 쉽지 않은 결단과 치밀한 계획으로 시도한 인생행로의 급선회였다. 이러한 행동은 자신과 가족의 삶이 경제적으로 곤경에 빠질지도 모를 엄청난 모험이기도 했다. 레오폴트가 생전에 얻은 가장 높은 사회적 위치는 잘츠부르크 궁정악단의 부악장이었다. 그가 만약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조그만 도시의 궁정악단 부악장은 역사에 흔적도 남길 수 없는 미미한 것이었지만 어쩌면 악장의 지위까지 올라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들의 능력을 발견한 이상 아들의 미래를 위해 나름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현명한 판단을 했다. 하늘의 도움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처음 시도한 두 여행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쇤부른 궁전에서의 연주 이후 귀족들의 초대가 계속 이어졌다. 결국 모차르트는 겹치는 일정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럼에도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자하는 귀족들의 요청은 줄어들지 않고 뮌헨과 빈 이외의 다른 나라에서도 초대장을 보내왔다. 레오폴트는 많은 귀족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중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멜키올 그림 남작을 만나게 되었는데 독일인으로 파리에서 '문화통신'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던 그림 남작이 신동 모차르트 남매의 쇤부른 궁전 연주소식을 소개한 것이 굉장한 효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모차르트의 건강을 염려한 볼프강의 가족들은 1963년 1월 5일에 고향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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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음률 (음계) 에 대한 이야기①[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1953년 ISO (International Standards Organization)에서 A - 440Hz을 권장하는 것으로 세계음악은 통일된 음계가 시작된다. 이 440Hz는 물론 지킬 사람만 지킨다. 라이브 무대에서 주파수를 높이는 것이 조금 더 화려하게 들린다는 이유로 높여서 연주하거나 낮추는 것이 더 깊이 있게 들린다는 이유로 낮추는 음악가들도 많다. 그러나 음률(음계)로 설명되는 음의 간격은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지킬 수 밖에 없는 자연현상으로 음악가들에게 존재한다. 음률은 음의 간격을 정하는 수학에서 시작되었다. ‘피타고라스율, 피타고라스음계’ 라고 불리는 음률의 가장 기본적인 정의가 만들어진다, 주파수의 비율을 정수로 했을 때 가장 듣기 좋은 화음이 만들어진다는 원리를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원리는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1:1 (완전 1도), 1:2 (완전 8도), 2:3 (완전 5도), 3:4 (완전 4도)라고 정리하고 계산에 의해 각 음의 주파수 값을 계산해 냈다. 그리고 그 확인은 음간의 울림으로 확인을 할 수 있었다. (두 개의 음을 동시에 연주해서 맥놀이 현상이 없을 때 완전한 협화음으로 들리게 된다.) 이 음률엔 한 옥타브가 반음까지 포함시킬 때 반음계의 차이가 발생한다. 피타고라스 반음계라고 불리는 F# 에서의 계산 차이와 피타고라스 콤마라고 불리는 B#이 생긴다. 그 이후 새롭게 추가된 음률은 화음의 색채감(장조, 단조)을 담당하는 3도의 음향적 특징을 포함하는 ‘순정률, 순정음계’가 등장한다. 이전까지의 음악은 종교적인 특징 때문에 완전한 협화음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다가 장조와 단조의 기능이 활용이 되면서 3음의 중요성이 점점 커져 갔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율과 순정율의 차이를 설명하려면 먼저 센트(cent)라는 단위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그 차이를 숫자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 옥타브를 1200 cent로 정하고 있고 각 음의 간격은 각기 다르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뒤에 평균율의 바탕이 된다.) 순정율 역시 피타고라스율과의 미세한 차이가 만들어지는데 이를 Syntonic Comma라고 하고 평균율 악기와 협연을 할 때 순정율 튜닝의 악기가 이를 보정해서 연주하게 된다. 피타고라스율과 순정율은 모두 건반악기가 없던 시대에 적용이 될 수 있었던 음률이다. 건반악기가 만들어지면서 (교회의 오르간이 이때부터 음악의 중심에 서게 된다.) 화음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그리고 악기간의 화음과 조옮김의 문제가 음악 연주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이 시기는 바로크로 넘어오는 시기여서 대편성 관현악이 만들어지던 시기이고, 다양한 악기가 섞여서 연주하는 앙상블이 많아지던 시기였다.) 이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요한 세바스찬 바하 (Johann Sebastian Bach)다. 바하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 첫 번째가 바로 이 평균율을 활용하기 시작하고 교육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 Das wohltemperierte Clavier) 피타고라스율과 순정율 처럼 완벽한 화음은 아니지만 악기간의 소통과 공통된 음률을 적용했기 때문에 대편성이 가능해졌고 악기간의 협주가 가능하게 한 중요한 업적이 된다. 현재 음간의 간격이 고정되는 모든 악기는 평균율에 따라 만들어지고 그 외 음간의 간격이 고정되지 않는 악기들은 순정율을 따르게 된다. 피아노 조율이 예술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 평균율의 완벽하기 않은 화음의 체계 때문이다. 순정율과 평균율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가장 어울림이 좋은 소리를 찾는 정말 고난이도의 작업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 이야기는 음계 이름을 정하게 된 이야기로 이어진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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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앙코르가 품은 동물들, 권력의 상징 ‘코끼리’①[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코끼리는 동남아시아 고대 국가에서 국력의 상징이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14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라오스 북부에 존재했던 '란쌍 왕국(1354-1707)'의 국명이다. '란(ລ້ານ)'이란 현지어로 100만을 뜻하고, '상(ຊ້າງ)'이란 코끼리를 뜻한다. 즉, '100만 마리의 코끼리를 보유한 왕국'이라는 뜻이다. 분명, 군사력이 강한 나라라는 뜻일 것이다. 실제 100만 마리의 코끼리를 보유한 것은 아닐 것이고, 여기에는 나라 이름을 지을 때 흔히 적용되는 과장법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코끼리를 내세워 국력을 과시하고자 했던 모습은 앙코르 왕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앙코르의 왕궁 정면에는 '코끼리 테라스'라고 불리는 거대한 월대형 건축물이 남겨져 있다. 3미터 가량의 높이를 가진 기단형 구조체가 300미터 이상 이어지는데, 단의 측면에는 왕국의 부강함을 상징하는 장식들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왕궁의 입구와 이어진 중간 부분에는 가루다와 타오(사자) 같은 신화 속 동물들이 장식되어 있지만, 중심에서 약간 떨어진 부분에는 줄지어 있는 코끼리 부대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코끼리의 등 위에는 크메르의 병사가 타고 코끼리를 몰고 있으며, 코끼리는 앞다리나 코를 이용하여 들소나 사자, 혹은 야생 코끼리를 위협하거나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용맹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왕궁의 정면을 코끼리 부대로 장식한 것은 과거 앙코르 왕조에서 가장 강한 군대로 활용되었던 부대가 코끼리 부대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것은 앙코르뿐만 아니라 이 일대의 주변국들에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인도에서 코끼리를 길들였던 기록은 기원전 2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중국에서도 기원전 천 년 전부터 코끼리를 전쟁에 활용했음이 기록되어 있다. 앙코르를 비롯한 대륙부 동남아시아에서 코끼리를 전쟁에 동원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 역사가 상당히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앙코르 왕국이 코끼리를 동원한 전쟁에 대한 흔적은 많다. 비문 기록에서도 볼 수 있지만 바이욘 사원이나 반띠아이 츠마(Banteay Chhmar) 사원의 부조벽화에 그려진 전쟁 장면에서 코끼리가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는 더욱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조각을 살펴보면 주로 코끼리를 조종하는 사람이 코끼리 목 쪽에 타고, 등 위에는 안장과 같은 장치가 설치되고 그 위에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간혹 코끼리를 조종하는 사람만 단독으로 표현된 경우도 있다. 코끼리 조종사는 코끼리를 조종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막대기를 들고 있다. 지휘관은 창을 들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활을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두 무기 모두 높은 위치에서 사용하기 적합한 무기로 보인다. 코끼리는 전쟁에서 실질적인 공격력을 보유하기도 하였겠지만, 지휘관은 코끼리 등 위에서 전황을 살피기에도 유리하였을 것이다. 코끼리는 전시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앙코르 왓의 남측 서편 벽화를 보면, 60미터에 이르는 벽면에 왕실의 행렬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여기서 왕을 비롯한 고관 대작들은 코끼리를 타고 있다. 그리고 코끼리 주변으로 기마병이나 보병들이 함께 행차를 하고 있다. 마치 군대에서 사단장 이상에게 헬리콥터가 배정되는 것과 같이, 코끼리는 특별한 계층에서만 향유할 수 있었던 권위의 상징이었다. 반탓(Ban That)의 비문에 따르면 '어린 나이의 수리야바르만 2세는 선왕이었던 다라닌드라바르만 1세의 코끼리 위로 뛰어올라 가루다가 발톱으로 뱀을 낚아채듯 왕을 죽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서도 왕의 행차에 코끼리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코끼리의 강한 힘은 건축에서도 유용했다. 앙코르에 위치한 타케오 사원의 비문에 따르면 '수리야바르만 1세(1006-1050)는 선왕 자야바르만 5세(968-1001)가 미완으로 남긴 헤마스링가기리(Hemaslingagiri)의 건설을 요기스와라판디타에게 명하였고, 요기스와라판디타는 사원 건축에 앞서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한 제사를 지냄과 함께, 사원 건설에 필요한 코끼리와 석재를 마련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코끼리는 사원 건설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석재 등 무거운 물건들을 운반하는 일에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고대 앙코르 제국이 남긴 고대의 거대한 건축물들의 흔적을 보면 사원건축, 도로, 다리, 저수지 등 수 많은 국가사업에 코끼리가 흔히 이용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즉 코끼리는 앙코르 제국이 동원하였던 노동력이자 생산력이었다. -다음편에 계속-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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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다양성의 섬 제주의 독특한 자연문화 콘텐츠와 사진예술[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제주 자연유산콘텐츠 한라산 붉은 겨우살이 한라산의 하얀 눈 꽃 속 피어난 황홀하고 매혹적인 붉은색에 매혹된 한 작가의 예술혼이 제주에서 펼쳐지고 있다. 제주를 대표하는 자연문화 공간인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 갤러리에서 3월부터 4월 중순까지 진행중인 정상기 작가의 한라산 붉은겨우살이 사진전과 김종현 작가의 제주 초가 사진전이 그것이다. 작가는 겨울만 되면 미친 사람처럼 카메라 한 대를 벗삼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붉디 붉은 겨우살이를 찾아다닌다. 허리까지 쌓인 눈 쌓힌 겨울 한라산을 카메라를 지고 산을 오르며 위험도 여러 번 겪었지만, 겨우살이를 향한 그의 집념을 막진 못한다. 작가는 매서운 한파를 이겨내고 한 겨울 가장 아름다운 붉은 열매로 보답하는 겨우살이를 통해 고난의 역사와 척박한 역경을 극복해온 제주인의 정신과 매우 비슷하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붉은 겨우살이가 보여주는 공생(共生)과 공존(共存)의 정신은 고난의 역사와 척박한 역경을 극복해온 제주인과 매우 비슷하기에 그 의미가 더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특히, 이 전시와 함께 제주의 대표적인 사진작가인 김종현 작가의 제주 초가 사진전은 제주의 80년대 제주의 풍경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합동 전시를 기획한 제주도문화공원의 기획 감각 또한 작품만큼이나 박수를 받기에 충분하다. 제주의 문화 르네상스 : 위기와 기회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볼떄 문화예술의 불모지이자 척박한 땅 제주에서 문화예술은 그저 일부 특정 층만이 향유하는 분야로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제주는 1995년 지방자치제 이후로 공연을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정식 공연장조차 없었던 지역에 1988년제 최초의 문예회관인 제주도문화진흥원이 건립되었고 특히 세계적인 음악축제로 성장한 제주국제관악제는 1995년 시작하여 현재까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를 계기로 많은 음악단체가 급증하였고 국내ㆍ외 다양한 예술가들이 제주의 문화에 관심을 보이면서 관련 음악회 및 공연예술 축제가 확대되고 있다. 또한 성산일출봉을 중심으로 성황리에 개최된 제주세계유산축전은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제주의 고유한 문화와 공연 및 다양성이 소재가 되어 성공적으로 치룬 축제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2009년 제주칠머리당 영등굿, 2016년에는 제주해녀 문화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제주의 환경과 고유한 문화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집중되고 있다. 몇 해 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문예연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지역별 문화예술 활동 건수는 매해 증가하고 있다고 조사되었다. 인구 10만 명당 문화예술 활동 건수가 서울이 124.4건, 강원 93.1건, 광주 87.4건, 대구 87.1건, 부산 74.0건, 대전 65.9건 순으로 전국 평균 66.4건이었고 특히 제주는 133.3건으로 활동 건수가 전국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조사되었다. 제주가 전국에서도 최고의 문화예술 활동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러한 증가 원인을 살펴보았더니 2014년부터 제주로 이주하는 정착민이 1만 명으로 증가하였고 그 정착민 중에 문화예술 활동자가 높다고 조사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주민 증가 현상은 2020년부터 급속하게 줄어들면서 문화예술 활동 또한 축소되고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사람 간 활동과 이동 제약, 비대면 한정적인 예술 활동 등으로 전국적으로 문화예술의 위기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제주는 고유하고 독특한 전통문화와 유네스코에서 인정한 한라산과 성산일출봉 등 천혜의 관광자원이 매력적인 도시로 누구나가 오고 싶어하는 지역이다. 이러한 매력으로 인해 매해 1,500만 명의 국내ㆍ외 관광객이 제주를 방문하고 있지만 제주의 고유한 문화의 다양성을 소개하거나 제주를 대표하는 문화예술 이벤트는 공연예술에 한정적이다. 지역 문화의 핵심 과제는 지역의 고유성과 다양성과 관용이다. 앞서 이야기한 제주인을 닮은 제주 한라산의 붉은 겨우살이 전시회와 제주 전통 초가를 담아낸 전시회는 코로나로 인한 문화예술의 위기 상황을 문화 다양성과 제주의 고유성을 담보할 수 있는 이벤트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위기의 시기, 지역 문화를 소재로 한 다양한 공연, 전시 예술 활동의 확대는 제주가 지향하고 있는 진정한 문화예술의 섬의 모습이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