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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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앙코르가 품은 동물들, 캄보디아의 소는 너무 말랐군요 ‘소’ ①[전문가 컬럼]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캄보디아를 다녀간 지인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캄보디아 소는 왜 이렇게 말랐어요?"이다. 다소 소 차별적인 발언이지만 캄보디아 소의 앙상한 갈비뼈를 보면 누구나 측은한 마음이 들기에 같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렇다면 캄보디아의 소는 왜 이렇게 말랐을까? 먹을 것이 없어서 그랬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예전의 소들은 어떠하였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캄보디아의 소들은 농사일에 동원되기보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이 많이 포착된다. 또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캄보디아이기 때문에 소들이 뜯어먹을 풀은 차고도 넘친다. 그렇다면 더워서 그런 것일까? 이 가설이 더 타당해 보인다. 더위에 잘 버티려면 두터운 살과 긴 털은 방해가 될 것이니, 동남아 기후에 적합하게 진화한 종이 캄보디아에서 볼 수 있는 소들의 주 종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금 더 확실한 확인을 위해서 캄보디아 소의 종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찾아보았더니 예상과 일치했다. 찾아본 자료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캄보디아의 소는 인도에서 '제부(Zebu)'라고 부르는 '인도혹소'의 잡종이 대부분이다. 학명으로는 '보스 타우러스(Bos Taurus)'이다. 이 종의 특징은 등에 지방이 가득한 혹을 가지고 있으며, 귀가 처진 외형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강한 열과 햇빛에 강하다. (인터넷 자료 취합) 캄보디아에는 해가 질 무렵이 되면 항상 소 떼들이 도로를 가로막는다. 소들도 집으로 돌아 가는 것이다. 보통 소 떼들 속에는 꼬마 아이 한 둘이 섞여 있다. 이 어린 목동들은 소보다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소들은 의외로 꼬마 목동들의 말을 잘 듣는다. 수십 마리의 소들로 막혀있던 도로도 꼬마 목동들이 나서서 지휘를 하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오래지 않아 열리게 된다. 그런데 이 소 때들을 관찰하다 보면 꽤나 영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캄보디아의 시골 마을은 많은 경우 길을 따라 집들이 길게 늘어서는 식으로 형성되는데, 길을 따라가던 소들이 자기 집 앞을 지날 때가 되면 누가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들어가는 것이다. 별 특별한 장면이 아닌데도 이런 풍경은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캄보디아의 시골에서 집집마다 소를 키우는 이유가 있다. 예전에는 농사를 짓거나 수레를 끄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이유가 컸겠지만 요즘엔 조금 다르다. 키우는 동안 새끼를 낳으면 마치 은행에 맡겨둔 목돈에 이자가 붙는 것과 같이 큰 이득이 된다. 즉 소를 키우는 것은 캄보디아 시골 농민들의 재테크 수단인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소는 오래전부터 소중한 동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소에 대한 애정이 특별했던 것처럼, 농경이 중요했던 캄보디아에서도 소에 대한 고마움을 가지고, 소를 소중하 존재로 대하는 문화가 있었다. 게다가 인도에서 유입된 힌두교에서도 소를 중요시하였기에, 이러한 조건들이 일치되어 앙코르 유적에 소의 모습이 많이 남겨지게 되었다. 앙코르 유적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소의 모습은 사원 앞에서 앉아 기다리고 있는 소의 석상이다. 이는 시바신이 타고 다니는 소, '난디(Nandi)'이다. 난디 이야기 옛날에 실라다(Shilada)라는 현자가 있었다. 실라다는 시바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를 입양하고 싶어 시바신에게 기도를 하였고, 시바는 곧 원하는 아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시를 내렸다. 다음 날 실라다가 집 앞의 밭을 가는데, 빛나는 아기를 발견했다. 실라다는 이 아기가 시바신의 축복을 받은 아기임을 확신하였다. 실라다는 아기의 이름을 난디(Nandi)라 지었고, 베다를 비롯한 많은 지식을 전수하는 한편으로 사랑과 정성을 다해서 키웠다. 수년 후, 실라다의 집에 두 명의 현자 미트라(Mitra)와 바루나(Varuna)가 방문하였다. 실라다와 난디는 두 현자를 정성껏 모셨다. 시간이 흘러 두 현자가 실라다의 집을 떠나게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난디에게 축복을 내리려고 하였다. 난디는 두 현자의 발 앞에 엎드려 있어 보지 못하였지만, 실라다는 두 현자의 표정이 좋지 않았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두 현자를 따라가 연유를 여쭈었다. 두 현자는 난디가 훌륭한 재목이기는 하지만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실라다는 사랑스러운 아들이 요절할 것이라는 이야기에 패닉에 빠졌고 크게 상심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고민하다가 아들 난디에게 전했다. 크게 상심하고 슬퍼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난디는 자신은 시바신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시바신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며 담담히 말하였다. 난디는 시바신을 만나기 위해 부바나(Bhuvana) 강으로 가 고행을 시작했다. 난디의 고행과 집중이 매우 훌륭하여 시바신은 곧 난디 앞에 현신하였다. 시바신은 난디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물었다. 난디는 '저는 시바신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시바는 '내가 여행할 때 함께 하던 황소를 방금 잃어버렸다. 그러니 난디 너는 소의 얼굴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나의 집 카일라사에서 함께 할 것이고, 나의 모든 가나(Ganas)들의 수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영원히 나의 동반자이며, 나의 탈 것 그리고 나의 친구가 될 것이다. 그 후 난디는 소의 모습을 하게 되었고 항상 시바신과 함께 하게 되었다. <난디의 탄생 이야기 요약> 위의 사진은 프레아 코 사원의 정면에 놓여있는 난디 석상이다. 난디가 사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통해 사원 안에 시바신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인도에서부터 유래한 것으로 대다수의 시바 사원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앙코르에 그려진 소의 모습은 비슈누의 화신 중 하나인 크리슈나(Krishna)의 활약상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고대의 어떤 마을에서 인드라 신을 충분히 숭배하지 않자 인드라는 7일간 이어진 폭우를 쏟아 마을을 범람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목동이었던 영웅 크리슈나는 고바르다나(Govardhana) 산을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려 인드라 신의 폭우를 막아내었고, 마을을 구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장면의 묘사를 살펴보면 크리슈나 신이 보호하고 있는 대상은 사람들과 소들이다. 이 장면도 앙코르 유적 곳곳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장면이다. 앙코르 유적에서는 신화와 관련된 장면 외에도 일상생활에서 사용된 소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아래의 두 사진은 각각 바이욘 사원과 바푸온 사원의 벽화에 그려진 우마차를 활용하고 있는 고대 크메르인들의 모습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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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문화다양성과 제주 설문대할망페스티벌[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국악전통과 현대음악의 어울림 크로스오버 지난주 제주돌문화공원 하늘연못 옆 야외 무대에서는 나무꽃의 공연이 제주의 대자연 속에서 공연되었다. 제주에서는 보기 어려운 명창 정상희를 비롯하여 춤꾼 백경우, 아쟁연주자 서정호, 소리꾼 임현빈, 안태원과 고수 김태영이 출연하여 국악의 흥겨움과 전통춤의 멋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마지막 크로스오버앙상블 나무꽃의 공연은 클라리넷, 콘트라베이스, 드럼의 양악기와 아쟁, 가야금 등의 국악기와 소리꾼으로 편성되어 제주의 자연과 어우러진 멋진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동안 서양 음악과 클래식 음악에 익숙한 제주에 전통국악과 다양한 장르의 예술이 조화되는 아름다움이었다. 또한, '화공을 불러라'는 하늘연못을 활용한 연출이 돋보였고, 국악가요 '배 띄워라'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콘트라베이스트 박수현이 직접 편곡한 음악은 국악과 팝음악이 접목된 멋진 앙상블이었다. 천혜의 돌문화공원에서 벌어지는 설문대할망페스티벌 올해로 16회째를 맞이하는 설문대할망페스티벌은 제주를 창조한 모성애의 여신 설문대할망을 기리고 제주 창조신화와 문화를 전승하기 위해 매년 5월을 설문대할망의 달로 정하고 2007년부터 축제를 이어가고 있다. 단순 관광지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독특하고 고유한 제주만의 문화와 예술을 접목한 문화관광예술축제로 컨셉을 잡은 것은 돌문화공원 사업단과 관계직원들 및 예술가들과의 협업의 성과였다. 올해는 총 14개의 문화예술 프로그램으로 공원의 오백장군갤러리공연장, 하늘연못과 야외무대, 석부작 전시장 등에서 설문대할망제와 시화전, 학술세미나, 국악 등 그야말로 문화예술의 다양성을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국제즉흥춤축제와 나무꽃의 크로스오버 공연은 이 축제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었다고 보였다. 측흥춤과 글로벌, 전통, 클래식이 함께한 융ㆍ복합 프로그램이었기에 그러하다. 설문대할망에 대한 제주신화를 보는 학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이야기는 낭만과 신비를 가득 실은 지적문화재(知的文化財)이다. (임석재, 민속학자, 전 서울대 교수), 설문대할망은 제주를 만든 창조여신으로 제주땅의 위대한 어머니이며 한라산의 산신으로 성모신, 그리고 땅을 창조한 조모신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좌혜경, 제주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 단군신화보다도 더 원초적인 신화형태 : 천지창조의 주인공인 설문대할망을 영웅화하는 작업이 제주도 문화전통의 핵심을 재발견하는 작업이고 탐라국 문화독립의 근간이다.(전경수, 한라일보 특별기고문) 유네스코 문화다양성 협약 유네스코는 2001년 제31차 총회에서 ‘세계문화다양성 선언’을 채택하였고, 2002년 제57차 UN총회에서는 매년 5월 21일을 ‘발전과 대화를 위한 세계문화 다양성의 날’로 제정하였다. 이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적 가치를 고양함으로 전 세계 인류가 직면한 문화의 획일화, 상업화, 종속화에 대응하고 아울러 다원적 가치를 상호 존중함으로써 민족 간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는데 기본 제정 목적이 있다. 2005년에는 유네스코 제33차 총회에서 '문화 다양성 협약'(정식명칭: 문화콘텐츠와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를 위한 협약)을 의결하였고, 이후 각 나라에서는 문화다양성 관련 법률을 제정하였다. 이에 맞추어 우리 정부에서도 2014년 ‘문화다양성의 보호와 증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우리는 주류문화와 함께하는 경향이 있지만, 한 사회의 건강한 문화생태 작용을 위해서는 문화 종의 다양성이 존재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문화의 흐름은 지역의 고유한 전통문화에서, 국내ㆍ외의 다양하고 새로운 문화예술로 확장ㆍ변화되고 있다. 다양한 문화예술이야말로 지역문화를 변화시키는 핵심이기에 제주돌문화공원이 추진하고 있는 설문대할망페스티벌은 이러한 문화 다양성과 예술의 다양성을 총족시키고 있는 수범사례이다. 이처럼 지역의 고유한 자연환경에 전통과 현대를 접목하고 거기에 문화예술을 입히는 이러한 축제는 지역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성공한 문화도시의 좋은 사례이기에 이 축제가 지속되고 발전되기를 고대한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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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개인정보 침해는 왜 계속되는가?[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개인정보의 침해가 왜 계속 발생되는지 아주 궁금 하실 겁니다. 최근에도 얼굴이 파랗게 질려 필자 사무실을 찾아주시는 분들이 가끔이 있어 오늘은 개인정보의 유출을 통한 악용사례와 현재의 우리나라에서 발생되는 개인정보 유출 유형,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금은 유출을 방지할 수 대책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최근 사건사례를 살펴보면 공무원이 2만 원 정도로 개인정보를 유출을 하여 사망사건이 발생되는 뉴스를 들을 수 도 있습니다. 이렇듯 개인정보가 악용되는 피해는 살인사건에 연루, 의사와 한의사 7명의 예금이 예금당사자도 모르게 약 6억 원 가량 인출되는 경우, 인터넷 쇼핑몰에 가입했다가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간 경우, 누군가 내 휴대폰을 복제해서 쓰고 요금청구서만 날아온 경우, 외국의 불량사이트에 본인도 모르게 가입이 된 경우, 최악은 보이스피싱 등의 범죄의 대상이 대는 등의 광범위한 도용 피해가 발생되고 있습니다. 최근 개인정보보호위원회에서 최근 5년 간 온라인 개인정보 유출사고 현황에 따르면 2020년 개인정보 침해 신고ㆍ상담건수는 전년도 159,255건에 대비 약 11%가 증가한 총 117,457건 이며, 침해유출 방식 10가지 중 보인 피싱 등 금융사기 피해 분야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개인정보 침해사고 경험 유형으로는 개인정보 처리자가 개인정보를 무단으로 수집하여 마케팅 목적으로 이용한 경우와 내부의 보안관리 소홀로 개인정보가 유출된 경우가 전체의 86.5% 발생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고자 정부는 개인정보 유출사고를 방지하고자 근거법안을 개정 및 매뉴얼을 작성하여 공고 및 교육을 하고 있지만, 개인정보의 유출방식이 더욱 다양해저 계속적으로 유출되는 경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개인정보의 유출 방지를 위해서는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국가의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개인의 노력도 상당하게 많이 필요하다고 필자는 판단합니다. 현재의 개인정보 유출 방지대책 등의 각종 자료를 활용하여 보면 개인이 할 수 있는 방지대책으로 몇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1.유료사이트나 인터넷 쇼핑몰 회원가입을 하거나 개인정보를 제공할 때에는 개인정보취급방침 및 약관을 꼼꼼히 살핀다. 2.유료사이트나 인터넷 쇼핑몰 회원가입 시 비밀번호를 타인이 유추하기 어렵도록 영문ㆍ숫자 등을 조합해 8자리 이상 설정한다(비밀번호는 주기적으로 변경 한다.) 3.가급적 안전성이 높은 주민번호 대체수단(아이핀)으로 회원가입을 하고, 꼭 필요하지 않은 정보는 입력하지 않는다. 4.타인이 자신의 명의로 신규 회원가입 시 즉각 차단하고, 이를 통지받을 수 있도록 명의도용 확인서비스를 이용한다. 5.인터넷에서 아무 자료나 함부로 다운로드 하지 않는다. 6.개인정보가 유출된 경우 해당 사이트 관리자에게 삭제를 요청하고 처리되지 않는 경우 즉시 개인정보침해신고센터(국번없이 118)에 신고한다.) 상기 사항 이외에도 많은 예방대책이 있으나, 한계성으로 다 실현하기에는 어렵다고 판단되며, 필자가 설명한 상기의 6가지 사항만을 꾸준하게 지키신다면 어느정도의 예방이 되지 않을까 판단합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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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⑤ 제2차 빈 (Wien) 여행[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취재부= 제2차 빈(Wien) 여행과 끔찍한 재앙 고향 잘츠부르크에 돌아온 지 10개월 만에 모차르트 가족은 1767년(11살) 9월 11일 빈으로 출발했다. 482일 간에 걸친 제2차 빈 여행(1769년 1월 초까지)은 가족 모두가 함께 떠나는 마지막 여행이었다. 빈은 그들에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음악가족이라는 확고한 명성을 안겨준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가 있는 곳이다. 레오폴트는 이곳에서 열릴 예정인 황후의 아홉 번째 딸 마리아 요제파 공주와 나폴리의 왕 페르디난도의 결혼식을 겨냥했다. 모차르트 가족뿐만 아니라 유럽의 수많은 음악가들이 이번 빈의 음악축제에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고자 빈으로 모여들었다. 황실의 결혼식에 맞춰 음악회가 열릴 것이고 모차르트와 난네를이 황궁으로 초대될 것을 확신하는 레오폴트와 그 가족들은 람바흐, 린츠, 멜크, 상트 폴텐을 지나 나흘 만에 빈에 도착했다. 그러나 축제를 위해 찾아온 레오폴트나 음악가들의 생각과는 달리 빈에서는 뜻밖의 공포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호환마마라고 불리던 천연두의 만연으로 빈은 죽음의 도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황가의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도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가 간신히 회복했고 결혼을 앞둔 마리아 요제파 공주는 자신이 천연두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떨고 있었다. 과거 여덟 살 위의 언니 마리아 엘리자베트가 천연두에서 회복은 했으나 얼굴의 흉터가 너무 심해 수녀원에서 인스부르크 수녀원장으로 평생을 보내고 있는 데다, 바로 위의 언니 마리아 요한나 가브리엘라가 몇 년 전 천연두에 걸려 죽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큰 오빠 요제프 2세 황제의 두 번째 부인이자 자신과 이름이 같은 올케 마리아 요제파 황비까지 천연두로 사망하자 공주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드디어 나폴리 왕국의 페르디난도 왕과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빈을 떠나 알프스로 출발하던 그날 10월 15일에 마리아 요제파 공주는 끝내 천연두에 의해 사망하고 말았다. 축제 중지 예술가들이 소망하던 축제는 중지되었다. 빈에 모여 있던 예술가들은 천연두를 피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다. 황제로부터의 초청만을 기다리던 레오폴트는 절망에 빠졌다. 놓칠 수 없는 기회가 멀어지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두문불출하며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묵고 있는 숙소에서까지 환자가 발생했다. 10월 26일 레오폴트는 가족들과 함께 빈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져 있는 올로모우츠로 거쳐를 옮겼다. 그들은 프드스타츠키 백작의 저택에서 지내며 천연두의 화마가 피해 가기를 기대했지만 결국 모차르트와 난네를도 천연두에 걸리고 말았다. 모차르트는 앞이 제대로 안보일 정도가 되었다. 난네를은 일기장에 ‘모차르트가 천연두에 걸린 뒤 9일 간 아무것도 보지 못할 만큼 상태가 나빠졌다. 나은 뒤에도 몇 주 동안은 눈을 보호해야 했다’고 기록했다. 11월 10일쯤 증세가 호전됐지만, 이번엔 난네를이 3주 간 앓아누웠다. 다행히 심하게 악화되지 않고 얼굴에 약간의 흉터만을 남기고 회복했다. 모차르트는 자신을 치료해 준 의사와 그의 딸을 위해 가곡 '기쁨에 부침 An Die Freude'을 작곡하여 헌정하였다. 그해 크리스마스는 브르노의 슈라텐바흐 대주교의 동생인 슈라텐바흐 백작의 저택에서 보내며 '교향곡 제6번'을 작곡했다. 천만다행으로 남매가 위기는 넘겼지만 여행은 엉망이 되었다. 1768년 1월 10일 12살이 된 모차르트와 건강을 회복한 가족들은 다시 빈으로 이동했다. 빈은 과거와 달라져 있었다. 사람들은 모차르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당시의 빈에서의 관심은 하이든(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1732~1809)과 오늘날 오페라의 아버지로 불리는 글룩(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 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에게 쏠려 있었다. 글룩은 모차르트와 인연이 있는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음악 스승이었다. 빈 여행에서 사람들의 무관심을 경험한 소년 모차르트는 또래가 아닌 당대의 거장들에게 경쟁심을 느끼며 오히려 깊게 음악에 빠져 들었다. 1768년(12살) 1월 19일, 모차르트 부자는 쇤브룬 궁전에 초대받았다. 요제프 2세 황제가 친히 대기실까지 찾아왔다. 레오폴트는 황제의 안내를 받아 쇤브룬 궁의 거실로 들어서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황제가 레오폴트에게 말했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간단한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는데 어린 소년이 과연 제대로 된 오페라를 만들 수 있을까?” 라며 황제가 친히 모차르트에게 오페라 작곡을 의뢰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레오폴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레오폴트는 극장지배인 겸 흥행사 주세페 아플리지오를 만나 황제의 의중을 전하고 100두카트에 오페라부파 '바보 아가씨'를 주문받았다. 모차르트는 4월에 대본을 받아 7월에 작곡을 거의 완성했지만 빈에서 두 개의 극장을 운영하고 있던 나폴리 출신의 공연 기획자 주세페 아플리지오는 결국 작곡료도 주지 않은 채 공연을 취소하고 말았다. 아플리지오의 횡포에 분노한 레오폴트는 1768년 9월 황제 요제프 2세에게 직접 청원을 올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당시 황제는 터키와의 전쟁 탓에 전장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존 음악가들의 텃세와 나이 많은 경력자들과의 경쟁도 피할 수 없었다. 레오폴트가 곡을 대신 작곡했다는 소문도 돌았고 모차르트의 나이를 속였다는 말들도 있었다. 모차르트는 '바보 아가씨'작곡을 중단했다. 좌절과 성공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 모차르트는 '바보 아가씨'의 실패를 통해 세상의 질투와 모함을 알게 되었다. 실망과 좌절을 통해 인간 본질의 이해에 대한 폭이 넓어졌다. 모차르트는 이런한 좌절을 견뎌내며 더욱 열정적으로 작곡을 이어 갔다. 마침내 '바스티엥과 바스티엔느'와 첫 번째 미사곡인 '장엄 미사곡 K.139'를 완성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좋아했던 슈라텐바흐 대주교는 1769년 5월 1일 자신의 궁전에서 초연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미사곡은 12월 7일 빈 왕실에서 재정을 지원하는 파르하머 고아원 축성식에 맞춰 렌베크에 있는 바이젠하우스 성당에서 연주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레오폴트는 그동안 빈의 보수적인 음악가들이 모차르트의 성공을 방해했지만 결국 해내고야 말았다는 기쁨의 편지를 일가 친척들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를 기다리던 슈라텐바흐 대주교는 성공에 대한 결과가 없어 걱정이 많았다. 해고하겠다는 경고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장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라는 명령도 아니지만 1769년 3월 31일부터 급료가 나가지 않는다는 편지를 보냈다. 당시에는 요즘처럼 발달된 통신망이 없었기에 모차르트의 성공소식이 잘츠부르크에 바로 전달될 수 없었다. 레오폴트가 잘츠부르크를 비운 지 벌써 6개월이 넘었고, 궁정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자신이 현재의 난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첫째 너무 늦지 않게 잘츠부르크로 귀환하는 것과 둘째 요제프 2세 황제가 귀국해 아플리지오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결국 모차르트 부자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769년 1월 5일 모차르트 가족은 1년 3개월 만에 잘츠부르크에 도착했다. 수많은 명사들의 추천장과 30년 간 드레스텐 궁정악장을 지내고 종교음악을 비롯하여 100여 편의 협주곡, 실내악, 오페라를 작곡한 요한 아돌프 하세의 추천장을 본 슈라텐바흐 대주교는 어린 모차르트를 크게 칭찬하였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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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앙코르가 품은 동물들, 물의 괴수 ‘마카라’②[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지난 편에서 앙코르의 마카라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번 편에서는 시기별 마카라에 대해서 살펴 보려한다. 우선 가장 이른 시기의 마카라부터 살펴보자. 위의 사진은 태국 프란나차부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삼보 프레이 쿡 양식(7세기)의 린텔이다. 위의 린텔을 살펴보면 린텔의 좌우에 큰 입을 벌리고 있는 마카라가 마주 보고 있다. 가운데에는 아치 모양의 밴드가 위치하는데 마치 마카라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묘사하는 듯하다. 밴드의 중앙에는 세 개의 원형 장식이 꽃과 새로 장식되어 있다. 밴드의 안쪽도 그리고 아래쪽도 꽃으로 가득하다. 특히 아래쪽으로 피어있는 꽃들은 마치 사원 안으로 들어오는 참배객들을 축복하는 듯하다. 마카라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물고기와 같은 유선형의 짧은 몸통에, 큰 머리가 특징적이다. 크게 벌린 입은 악어를 닮았고, 긴 코는 살짝 말려서 들어 올려져 있는데 흡사 코끼리 코다. 꼬리는 원형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공작이라고 하기보다는 넝쿨과 같은 식물 문양으로 보인다. 동물의 몸통이 끝없이 이어진 식물 문양으로 변화하는 표현 양식은 앙코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마카라의 등에는 남성형 신과 같은 인물상이 각각 조각되어 있다. 다음은 프레아 코 사원의 린텔이다. 프레아 코 사원은 879년에 건립된 사원이며, 이 시기에 건립된 사원들을 프레아 코 양식(9세기 후반)으로 분류한다. 가운데에 원통형 밴드가 아치형으로 뻗어 있고, 밴드 아래위로 남성형의 신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위쪽에 배치된 신들은 말을 타고 있고, 아래쪽에 위치한 신들은 나가를 타고 있는 점을 보아 위는 땅, 아래는 물로 구성되어 있는 듯하다. 동물 문양들은 식물 문양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여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린텔의 양 끝에 마카라가 각각 한 마리씩 배치되어 있는데, 앞서 본 린텔과 달리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다. 프레야 코 시기의 마카라는 앞서 살펴보았던 삼보 프레이 쿡 시기의 형태와 많이 달라졌다. 큰 머리와 코끼리의 코, 그리고 뿜어 내는 생명력 넘치는 물줄기, 동그랗게 말린 식물 문양의 꼬리 등의 특징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몸통이 확연하게 육상동물로 바뀌어 표현되었다. 앞다리와 뒷다리 그리고 체형이 마치 사자같다. 자세히 살펴보면 목 주변에 사자의 상징인 갈기도 보인다. 동 시기의 사례를 하나 더 살펴보자. 위의 사진은 앞서 본 프레아 코 사원보다 2년 뒤인 881년에 건립된 바콩(Bakong) 사원의 린텔이다. 앞서 본 린텔보다 좀 더 단순한 형태이지만 프레아 코 양식에 해당한다. 동 시기의 린텔임에도 아치형 밴드에 원형 꽃 모양이 남겨져 있다거나, 마카라의 입에서 아치형 밴드가 뿜어져 나오는 듯 한 배치에서 과거 삼보 프레이 쿡 양식의 흔적들이 더 많이 남겨져 있다. 마카라의 형태도 초기 형태의 마카라와 조금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육질의 앞다리, 그리고 목 주변의 갈기 등 사자의 몸으로 변화된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위의 사진은 10세기 초반에 건립된 프놈 복 사원이다. 세월의 풍파를 맞아 훼손이 심한데, 다행스럽게도 마카라가 조각된 부분은 남겨져 있다. 악어의 입, 코끼리의 코를 통해 마카라임을 유추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몸통의 묘사는 생략되어 있다. 마카라는 사원 바깥 방향을 향해서 입을 벌리고 있으며, 긴 코에서 물줄기를 뿜고 있다. 사원이 가진 생명력을 사원 바깥으로 뿜어내는 듯한 묘사로 보인다. 마카라의 코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는 앞서 보았던 양식과 유사하게 식물 문양으로 변화하고 있다. 붕괴된 사원에서 다음과 같은 마카라의 흔적들을 더 찾을 수 있었다. 위의 사진은 10세기 후반에 건립된 반띠아이 스레이 사원이다. 페디먼트의 좌ㆍ우 끝부분이 마카라로 장식되어있다. 역시 사원의 바깥쪽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 앞서 프놈 복에서 본 마카라는 머리만 표현되어 있었는데 이 사원에서는 내림마루를 장식하는 긴 식물 문양이 마치 마카라의 몸통과 같이 이어져, 마카라 몸통이 뱀처럼 보인다. 또한 앞서 본 마카라들이 물줄기나 식물 문양을 뿜고 있는 것과 달리 입에서 동물들이 뿜어 나오도록 묘사되어 있다. 확대한 사진의 왼쪽 마카라는 입에서 타오(사자)가, 오른쪽 마카라의 입에서는 나가가 나온다. 나가는 물을 상징하기에 마카라의 입에서 나가가 뿜어져 나오는 것은 의미상 연결이 되지만, 타오가 나오는 것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었는지는 불명확하다. 아마도 사원 장식의 바리에이션 다양화 과정에서 나가에 상응하는 상상의 동물을 적용한 것이 아닐까라고 추정해 본다. 자세히 살펴보면 또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 왼쪽 마카라는 명확하게 코끼리의 코가 확인된다. 하지만 오른쪽 마카라는 코가 짧다. 이 또한 마카라가 아닌 다른 동물을 넣어 사원의 장식과 의미 부여에 다양화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11세기 이후 마카라의 표현은 크게 변화한다. 앞서 본 반띠아이 스레이 사원에서 확인된 코가 길고 타오를 뿜는 형태의 마카라는 사라지고, 코가 짧고 입에서 나가를 뿜는 형태의 마카라만 남겨진다. 위의 사진은 각각 바푸온 사원(11세기), 앙코르 왓(12세기 초반), 프레아 칸(12세기 후반)의 지붕 장식이다. 코가 사라진 뱀과 같은 괴수를 계속 마카라로 볼 수 있을지, 아니면 또 다른 종류의 상상의 동물일지 판단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배치되는 위치의 동일성이나 물을 뿜는 상징성에서 코가 짧아진 앙코르의 마카라도 마카라로 분류할 수 있을 듯하다. 한편 11세기 이후에는 마카라가 물을 뿜는 괴수라는 상징성이 정착되었고, 나가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마카라가 함께 묘사되는 경우가 크게 늘어났다. 마카라의 입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나가 난간이 등장하며, 벽면의 장식에서도 나가 문양과 함께 마카라가 따라 나온다. 지금까지 앙코르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마카라들을 살펴보았다. 필자도 마카라를 처음 접하였을 때, 너무나도 낯설어서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고대 크메르의 역사나 사회, 그리고 사원의 묘사 방식 속에서 물의 중요성은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요소였다. 물의 중요성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그 물을 관장하는 마카라에 대해 생각해 보니, 고대 크메르 인들은 분명 마카라를 경외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망망 대해와도 같은 톤레삽 호수, 생명의 젖줄인 시엠립 강, 그리고 농경과 관련하여 필수적 요소였던 비. 이렇게 고대 크메르 인들의 풍요를 결정하는 물을 관장하는 동물인 마카라는 오랜 기간 동안 크메르 사원을 장식하는 필수적인 요소로 사용되며 크메르 인들의 의식 속에 녹아든 중요한 상상의 동물인 것이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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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우리의 소리 판소리 완창 제주공연[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우리의 소리 판소리 판소리는 우리나라 전통예술의 하나로 양반층이 아닌 일반 하층민들을 대상으로 17세기경 남도지방에서 시작되어, 18세기에 들어 양반층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서, 19세기 후반에 고종과 흥선대원군 시기에 활성화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작가 신재효(申在孝:1812~1884)는 중인 출신으로서 판소리 광대를 적극 후원하면서, 양반들의 미의식을 매개로 판소리의 개작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국권상실과 서구화 및 현대화의 사회, 정치 변화로 판소리는 잊혀져 갔다. 판소리는 1명의 창자(唱者)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창(소리)ㆍ아니리(사설)ㆍ발림(몸짓)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엮어가는 드라마틱한 우리나라의 전통예술이자 서양의 오페라와 같은 종합예술이다. 판소리가 우리 대중에게 널리 소개된 것은 1993년 발표한 임권택 감독의 우리 영화 ‘서편제’가 당시 113만명(현재 누적관객 1,600만명)을 동원하면서 판소리를 소재로 하여 만들어진 거의 최초의 영화로 국악과 전통에 무관심했던 국민에게 우리의 음악을 전해준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였다. 귀하디 귀한 제주에서의 판소리 완창 공연 지난 4월 23일 제주를 대표하는 문화관광지인 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 공연장에서는 이은숙의 심청가 완창 발표회가 무려 5시간 동안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코로나 객석 거리두기 완화로 2백석의 공연장은 거의 채워졌고 관객들은 얼씨구, 조오~타의 추임새로 창자와 관객은 함께하면서 한번은 울고 한번은 웃고 모두가 함께하는 무대였다. 판소리를 구성하는 3요소가 소리꾼, 고수, 그리고 관객이라고 한다. 격식을 갖추기보다는 평민들에게 널리 사랑받은 전통문화인 만큼, 판소리는 관객이 극 중간마다 '얼쑤!', '좋다!', '잘한다!' 등의 호응인 추임새를 해야 제대로운 공연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판소리의 매력이다. 특히 심봉사가 눈뜨는 대목에서는 울고 웃기가 그치지를 않았고 공연 말미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무대로 나와 모녀가 함께 덩실덩실 춤추는 장면까지 연출된다. 판소리 재능있는 청년예술가로 인해 재탄생 판소리는 서양의 오페라와 유사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오페라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배우와 다양한 주조역 가수가 출연하고 판소리는 창자와 고수 두명이 출연하는 양식으로 규모상으로 차이가 있다. 그리고 판소리는 추임새라는 관객의 역할까지 있기에 출연자와 관객이 함께 만들어가는 어찌보면 이머시브공연의 원조라고도 볼 수 있겠다. 판소리는 본래 12마당이 존재하였으나 지금은 <춘향가>ㆍ<심청가>ㆍ<수궁가>ㆍ<적벽가>ㆍ<흥보가> 5마당만이 전하고 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소멸 위기에 있었으나 정부의 지원과 1970년대 이후 전통문화에 대한 긍정적 인식의 변화, 국ㆍ공립 전통 예술단체와 일부 지역 중심의 노력 등으로 1964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2003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한동안 우리의 자랑인 판소리와 전통예술이 어려운 상황에 있었지만 재능있는 청년예술가들의 노력은 다양하고 독창적인 공연예술로 발현되었다. 2019년 데뷔한 수궁가를 재해석한 <범 내려온다의 이날치>, 황해도 민요와 굿, 판소리 적벽가 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정거리의 악단광칠> 같은 소리꾼들이 홍대와 이태원 등 젊은이들이 모이는 클럽에서의 공연으로 힛트를 치더니 유튜브와 같은 온라인과 방송에서 인기리에 주목받는 등 21세기에 맞게 진화하면서 성공사례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이날치는 2020년 한국관광공사와 콜라보를 진행하여 서울과 지역을 배경으로 퓨전 국악을 활용한 홍보영상을 제작하여 유튜브와 페이스북, 틱톡 등에서 기록한 수가 총 2억 600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독창적이고 고유한 전통문화예술과 청년예술가들의 창의적이고 우수한 예술적 재능이 만들어낸 기적들이다. 이러한 기적들이 지역 곳곳에서 일어나기를 기원한다.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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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민원속에 사는 사회[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민원속에 사는 사회'라는 말처럼 오늘날은 여러 민원으로 인해 손해와 행정처분이 발생할지 몰라 조금은 힘든 세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컬럼은 최근 겪었던 실제사항을 위주로 하여 작성하겠습니다. 새벽아침부터 전화가 와서 무슨 이른 아침부터 무례하게 전화를 하였는지 의문점이 생겼으나, 전화를 받고 내용을 들어보니 정말로 억울하게 행정처분을 받아 잠을 못자고 필자 한테 전화해주신 의뢰인이 있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첨부된 위 그림과 같이 의뢰인의 경우는 일필토지 위에 주택을 건축하고 싶어 자신 소유의 토지를 2필지로 분할한 후 주택을 건축 후 사용승인까지 받은 상태였습니다. 건축당시 제3자의 토지가 30평 정도인데 매매를 수월하게 할 목적으로 의뢰인의 토지 경계선에서 2m정도로 하여 경계시설물을 설치한 것으로 확인이 되었으며, 건축물 건축 승인 후 약 3년 후에 의뢰인 토지를 침범한 경계시설물 설치자를 찾아 해당 경계시설물이 의뢰인 토지를 침범하고 있으니, 철거해달라는 요청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경계를 침범한 제3자는 경계시설물은 철거하지 않고, 오히려 의뢰인의 토지가 기존 지목인 전으로 유지하고 있는 점을 근거로 하여 해당 경계시설물이 포함된 토지를 무상으로 매수하겠다는 답변을 하였습니다. 이에 의뢰인께서는 무슨 날강도 짓이냐는 의문점에 공작물 철거의 소를 제기하였으며, 제3자는 해당 지목이 변경되지 않은 점을 지적소 관청에 진정을 제기하여 종래에는 지적소관청으로부터 지목변경 위반 과태가 부가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필자가 대충 전화로만 통화하기가 힘들어 의뢰인을 사무실에 오시게 하여 관련 서류를 확인하여 본 결과 의뢰인의 경우는 관계법령에 의한 토지의 형질변경 등의 공사가 준공된 경우, 토지 또는 건축물의 용도가 변경된 경우 등 지목변경할 토지가 있는 때에는 60일 이내에 토지소유자가 지적 소관청에 신청하도록 지적법 제21조, 동법 시행령 제16조, 동법 시행규칙 제25조를 위반한 사항은 맞아 과태료 처분을 원칙으로는 합당하나, 건축물이 사용승인된 점을 확인하여 ‘건축법 제22조 제4항 제2호에 따라 건축물 사용승인시 공간정보의 구축 및 관리 등에 관한 법률 제64조에 따른 지적공부의 변동사항 등록신청을 한 것으로 의제한다.’라는 타법을 적용하여 과태료 부가는 위법된 처분임을 설명드렸습니다. 해당사항에 대해 의견서를 작성하여 의뢰인에게 해당 지적소 관청에 제출하면 과태료 처분은 없는 것으로 한다는 말과 함께 오늘 내 제출하시면 처리해줄 것이라고 말씀드린 후 돌려보냈으며, 약 1시간 후 과태료 처분은 취소가 되었다는 연락과 함께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상기의 내용처럼 자신이 불리할 경우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러한 민원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행정청의 근무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최상의 청원기관인 국민권익위원회에서는 행정청의 소극행정 탈피를 위해서는 “규제는 최소한으로, 편익은 최대한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슬로건이 있습니다. 소극행정 탈피를 위해 행정청에서 조금 더 확인을 하였다면 이번 의뢰인과 같은 부당한 처분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며, 행정청에서의 자세가 변화된다면 이를 이용하는 민원인들도 감소가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램에 기술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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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 파리④ㆍ런던 연주여행 2[전문가 컬럼]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연주여행의 고통과 기적에 대한 레오폴트의 믿음 희망과 용기로 감행한 파리·런던 연주여행길(1763년 6월 9일~1766년 11월 29일)은 험하고 힘들었다. 흔들리는 마차도 고통의 연속이었다. 충격완화 장치가 없는 마차 바퀴의 충격은 그대로 가족들의 몸에 전달되었다. 겨울에는 추위를 막기 위해 마차 바닥에 짚을 깔고 무릎 위에 담요를 덮어야 했다. 도저히 쾌적하고 안락한 여행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난네를은 일기장에 ‘동생 모차르트가 여행 중에 악상이 떠오른다고 해도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악보를 쓸 수 없어서 악상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숙소에서 악보에 적었다’고 기록했다. 모차르트는 마차에서의 괴로움을 이기는 방법으로 상상력을 동원했다. 모차르트는 자신을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나라의 왕으로 여기면서 상상의 날개를 펄럭이다보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했다. 1765년(9살) 7월 24일 런던을 떠난 모차르트 가족은 캔터베리에서 연주를 마치고 칼레에 도착해 이탈리아 밀라노와 베네치아를 거쳐서 잘츠부르크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네덜란든 대사의 끈질긴 요청으로 귀국길을 변경했다. 그러나 도버 해협을 건넌 후 차질이 생겼다. 모차르트는 프랑스 북부도시 릴에서 심한 감기로 편도염을 앓았고 레오폴트는 어지럼증에 시달렸다.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도착했을 때는 난네를이 장티푸스에 걸려 연주를 취소했다. 증세가 심각해 죽기 전에 청하는 병자성사를 받을 정도였다. 난네를이 간신히 회복하자 이번에는 모차르트가 다시 장티푸스로 4주를 누웠다가 깨어났다. 일찍부터 가족의 운명이 오직 하느님의 손에 달렸다는 인식을 가져왔던 레오폴트는 여행 중 발생 할 여러 문제를 예측하고, 미리 여러 성당에 미사를 봉헌해줄 것을 부탁해 놓았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모차르트가 회복되었다고 확신한 레오폴트는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 “인간이 제안하지만 결정은 하느님이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은가? 하느님만 아실 테지. 모차르트야, 너의 병에 대해 기록하는 것도 이제 지쳤단다.”, “나는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어. 인간은 정해진 운명을 벗어날 수 없어.” 일부의 모차르트 연구자들은 레오폴트가 남매를 데리고 떠난 장기간 유럽 연주여행을 비난하고, 아버지로서의 역할이 아닌 금전적 이득을 추구하는 흥행사의 모습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들의 천재적 재능에 대한 자부심으로 금전적 성공을 전혀 꿈꾸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아이의 미래를 위해 부모로서 선택한 현실적인 판단 결과였다. 레오폴트는 모차르트를 ‘하느님이 잘츠부르크에 주신 기적’으로 확신했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식을 위해 자신의 경력을 포기한 음악가로서 세상에는 기적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은 아버지이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파리ㆍ런던 연주여행 이전과 이후 가족과 함께 3년 반의 두 번째 연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모차르트는 10살이 되었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와의 만남으로 시작된 여러 곡의 교향곡(K.16, K.19, K.22 등)과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나타(K.6~9, K.10~16 등) 작곡을 비롯한 음악적 성장은 매우 컸다. 그보다 더 큰 성과는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까지 습득하여 국제적인 음악가로서의 소통 언어인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를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모차르트가 여러 나라의 책을 읽거나 오라토리오ㆍ칸타타ㆍ독일 징슈필 그리고 이탈리아식 오페라 세리아와 오페라 부파를 작곡하는데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에게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따로 가르쳤다. 실제로 위대한 음악가나 작곡가는 프랑스인이나 이탈리아인들이 많았고 유명한 오페라는 거의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었다. 파리ㆍ런던 연주여행에서 교향곡과 오페라를 접하고 돌아온 모차르트는 신세계를 보기 이전과 보고난 이후로 구별되는 커다란 신동의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1767년(11살)이 되자 모차르트는 오페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나 당시의 오페라에 근접한 자신의 최초의 극음악(종교적 징슈필)들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제1계율의 책무(K.35) 제1막-잘츠부르크에서 공연’, ‘아폴로와 히아킨투스(K.38)’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다음 해인 1768년(12살)에는 모차르트의 최초의 오페라 ‘바스티앙과 비스티엔’이 탄생했다. 훗날 그가 고전시대의 오페라 작곡가로 평가되고 그 위상을 갖게 한 모차르트 작곡 오페라 22편의 윤곽이 서서히 나타나게 된 것이다. 피아노 소품과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출발한 작곡의 불꽃이 교향곡을 거쳐 오페라에 옮겨 붙기 시작했다. 오페라는 노래를 중심으로 하는 음악극이다. 독창ㆍ합창ㆍ관현악 등을 사용하고 발레도 포함되는 규모가 큰 음악극을 말한다. 오페라(Opera)는 이탈리아어로 ‘작품’이라는 뜻으로 라틴어 오프스(Opus)에서 유래했다. 무대 위에서 독창자와 합창자의 노래ㆍ연기ㆍ춤ㆍ무대ㆍ오케스트라 이 모든 것이 융합되어 조화를 이루는 종합예술이다. 모차르트가 활동했던 고전시기에는 대부분의 작곡자들이 성악보다는 기악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오페라가 크게 주목 받지 못하였다. 모차르트는 고전시대에 성악음악을 개척하여 성악음악의 전통을 고전시대에도 이어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것이 그를 고전시대의 유일한 오페라 작곡자로 부르는 이유이다. 음악 속에 가려졌던 어린 시절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은 엄격한 환경과 냉엄한 훈련으로 이어졌다. 당시의 음악가들은 어디에서든 혹독한 훈련으로 기악가나 성악가로 키워졌다. 모차르트도 뛰어난 재능을 알아 챈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지나치게 혹사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다. 현재와 마찬가지로 그때에도 어린 아이들은 자유롭게 놀고 서로 친구가 되었지만 모차르트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 말고는 친구도 없었고 놀 시간도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책임을 아버지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어린 모차르트는 자신의 상황과 음악에 몰두했고 외적인 요구를 수용하면서 성장했다. 여섯 살부터는 그를 음악에서 떼어놓을 수도 없었고 자연스럽게 신동으로 살아가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다. 아버지 레오폴트로부터 배운 기초음악을 제외하고는 오직 아버지가 계획한 치밀한 여행 일정과 개인지도에 따라 다른 사람의 연주를 통해 보고 느끼고 연주하고 작곡까지 하면서 스스로 익혔다. 새로운 것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을 놀이처럼 직접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식사를 할 때도 건반을 누르듯이 손가락을 끊임없이 움직이고 악상이 떠오르면 바로 악보에 옮겨 적었다. 기억력과 집중력에 있어 초인적인 자질을 갖춘 것은 틀림없지만 여기에 다양한 경험과 자극을 단순한 모방을 넘어 자신만의 것으로 재창출해내는 재능과 노력이 있었다. 아버지로 인해 평범하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내고 너무 일찍부터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지만 대신 성장기에 음악을 통한 모든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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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새 정부의 문화정책과 문화예술공간의 경제학적 파급효과[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문화정책의 근간 팔길이원칙 지난 3월 28일 새 정부 인수위에 대한 문화체육관광부의 업무보고가 있었다. 인수위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K-컬처’의 토대가 되는 콘텐츠 산업을 강조하였고, 예술계에서 행해지던 블랙리스트 등 불합리한 관행, 과학기술과 예술융합 등의 내용이 언급되었다. 특히, 위기 코로나와 같은 재난상황에서 대처 매뉴얼 개발과 관리체계 구축, 청년 예술가에 지원 등을 강조하면서 윤석열 정부의 문화정책의 원칙을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문화정책‘을 주문하였다고 한다. 문화정책의 흐름과 파급효과 우리나라의 문화정책은 1972년 문화예술진흥법 제정, 1973년 문화예술진흥원이 설립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세종문화회관, 서울예술의전당 건립을 시작으로 전국 지자체별로 문예회관이 개관되면서 예술공간 중심의 정책을 펴게 된다. 이후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문화산업과 전통예술, 문화관광 중심 정책을 강조하였고,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문화예술 공간의 확대, 대중음악 및 영화와 콘텐츠산업, 문화복지 정책을 펼치면서 엘리트 중심의 문화정책에서 국민 누구나가 참여하는 대중주의 문화정책으로 변화되고 있다. 특히, 1988년 개관한 예술의전당은 우리나라 최대, 최고의 전문 복합문화예술 공간으로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문화예술을 선도하고 있다. 예술의전당은 대검찰청과 대법원이 위치한 강남에 자리하여 딱딱한 도시의 이미지를 문화예술을 통해 부드럽게 변모시키고 있다. 한편,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와 뉴욕의 링컨센터는 매해 천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면서 문화예술 공간이 관광객을 불러오고 지역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사례로, 그에 따른 교육적, 사회적, 경제적 파급효과는 수천억 원에 달하고 있다. 문화정책의 최전선 문화예술공간 문화정책을 실현하는 문화 현장의 가장 최전선에 있는 예술공간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고 문화예술섬을 지향하는 제주에서는 더욱 중요한 현안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복합문화예술 공간인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 LG아트센터나 롯데콘서트홀은 예술경영 전문 조직이 바탕이 되어 극장의 특색과 장점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시민에게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기업과 지역의 이미지를 높이고 있다. 반면 제주는 어떠한가? 제주도문예회관, 제주아트센터, 서귀포 예술의전당은 제주를 대표하는 전문 예술공간이지만 행정에서 지도, 관리, 감독하는 시스템으로 전문성이 떨어지고 사업의 지속성과 미래 지향성이 미비한 현실이다. 또한, 공무원 순환보직 시스템으로 알만하면 가버리는 상황이 연속되고 활성화 방안으로 나온 정책들은 의사결정권자의 임기에 맞추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어 30년 전보다 발전했다고 말할 수 없다. 제대로 된 복합문화 공간의 포맷은 오페라와 뮤지컬, 발레 등 대형공연 중심의 오페라 극장과 클래식 음악 중심의 콘서트홀, 연극과 중소형 공연이 가능한 중극장,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함께 운영되어야만 복합문화 공간으로의 역할이 가능하다. 전국 대부분의 지자체의 문화예술공간도 이러한 포맷이지만 제주만 그렇지 못하다. 문화 예술의 섬을 지향하는 제주는 제대로 된 복합문화 예술공간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그 공간은 문화예술을 넘어서 가족이 함께하고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지역을 화합하는 역할은 물론이고 제주를 문화다양성이 존재하는 문화가 중심이 되는 도시로 성장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문화예술의 섬이 바로 그것이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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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앙코르가 품은 동물들, 물의 괴수 ‘마카라’①[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 취재부= 크메르 사원에는 기묘하면서도 괴기한 형상을 한 상상의 동물들이 많이 조각되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기괴한 모습을 따지자면 단연 '마카라(Makara)'를 꼽을 것이다. 마카라는 큰 머리와 긴 코가 특징이다. 물을 내뿜는 속성을 가진 물 속에 사는 괴수로, 상반신은 육상동물, 하반신은 수생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세부적으로는 코끼리의 코, 악어의 턱, 쥐의 귀, 돼지의 이, 공작의 꼬리털, 사자의 발 등 다양한 동물들의 특징이 조합된 것이다. 마카라는 인도에서 유래하여 동남아시아에 널리 전파된 상상의 동물이다. 힌두 신화에서는 물의 신 바루나(Varuna)와 강의 여신 강가(Ganga)의 바하나(Vahana, 타고 다니는 동물)로 묘사된다. 시바 신이나 비슈누 신과 같이 힌두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신들과 관련성이 낮은 편이라 종교적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물'을 다루는 동물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어, 고대로부터 농경이 중시되어 온 인도의 사원 건축에서 단골 장식 요소로 사용되었다. 앙코르 지역도 농경이 인도 못지않게 매우 중요한 사회였다.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종교적인 중요성이 다소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물을 뿜는 괴수 마카라는 크메르 사원 건축을 장식하는 단골 요소로 사용되었다. 오히려 인도에서보다 더 많이 보이는 듯하다. 물을 뿜는 물의 괴수 마카라의 특징을 잘 반영한 기발한 표현이 간혹 크메르 사원의 배수구에서 확인된다. 몇몇 크메르 사원의 배수구 끝은 마카라의 머리로 장식되어 있는데, 비가 내릴 경우 마치 마카라가 물을 뿜는 것과 같은 모습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아래의 사진은 바콩(Bakong) 사원 기단 하부의 배수구이다. 배수구의 끝 부분에는 괴수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는데, 안타깝게도 윗부분이 깨져 있다. 아래의 사진은 프레 럽(Pre Rub) 사원의 기단에 설치된 마카라 머리 조각이다. 이 조각 역시 마카라의 코 부분이 손상된 상태였다. 그런데 주변에 마카라의 코로 보이는 조각이 떨어져 있어 파손부에 올려 보았는데, 딱 맞아 떨어졌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마카라 배수구들은 제 기능을 못한다. 우수가 돌 틈 사이로 새거나 다른 구멍으로 흘러나가 배수구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기 어렵다. 나오더라도 감질나게 흘러나오는 수준이다. 하지만 건립 당시 동남아시아 기후 상, 우기 때 스콜이 내리는 것을 상상해 보면, 마카라의 입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와 상당히 운치가 있는 풍경을 연출했을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시대별 마카라에 대해서 살펴보려 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